눅 1:67-80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사람'이 나의 정체성이다.
눅 1:67-80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사람'이 나의 정체성이다.
1. 무엇인가를 혹은 누군가를 위해 준비하는 일은 참으로 쉽지 않다. 아무런 스포트라이트도,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하고, 빈 들에 있는 느낌을 받아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79절). 그리고 내가 결코 주인공도 아니기 때문이다.
2. 사람이 가진 '자기 중심성'은 모든 것이 모든 일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만 하는데, 무엇인가를 혹은 누군가를 준비하는 일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그 일을, 혹은 그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일에 내가 포함된 일이기 때문에 또한 마음이 쉽지 않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일이, 혹은 그 사람이 등장하고 나면 나는 사라져야만 한다.
3. 이러한 일에 세례 요한은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역할은 ‘준비'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시면 ‘퇴장'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일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그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오셔야만 하기 때문이다.
4. (나에게는) 서운하지만 혹은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수도 있지만 모든 일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모든 일에 내가 주인공일 필요도 없다. 이 모든 것은 ‘자기 중심성’ 즉 죄성의 결과일 뿐이다. 세상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갈 뿐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공이시다.
5. 세례 요한은 그것을 알았던 것 같다. 그는 아무런 불평없이 빈들에서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날 때를 기다린다 (80절).
6. 하나님이 주인공이란 사실을 알고, 나는 그 분과 함께 걸어가는 피조물임을 깨달을 때 ‘자기 중심성’은 깨어질 수 있다. 세례 요한과 같이 빈 들에 있을 수도 있고, 그 분이 나타나시면 나는 퇴장할 수도 있다. 얼마나 많은 순간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주인공이 되려고 하는가? 내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내가 주목을 받고 싶어 하는가? 우리는 모두 주의 다시오실 길을 예비하는 자들이 아닌가?
7. 큰 아들 예준이의 이름을 지으면서 참 많은 고민을 했다. 이 아이의 인생이 어떻게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담고 싶었고, 이 아이가 정말로 그런 사람이 되기 원해서 예준이라고 지었다 (짓고 나니 무척이나 흔한 이름이 되어버렸지만 같은 뜻을 가진 이름은 아직 보지 못했다).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사람” 즉 두 번째 세례 요한이 되라고 지은 이름이다.
8. 이 이름이 예준이에게만 적용되어야 하는 이름이 아님을 오늘 본문을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나 또한 ‘예준’이가 되어야 한다. 나 또한 예수님의 자리에 앉는 자가 아니라 두 번째 세례 요한이 되어야 한다. 선교사로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순간 ‘예준’이 아니라 ‘예수’가 되려고 하는가? 얼마나 많은 순간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가? 나는 아니다. 나를 버려야 한다. 배운데로 살아야 한다. Not I, but Christ.
9. 예준이의 이름이 Not I, but Christ의 의미를 가진 것 처럼, 세례요한이 주인공을 소개하고 퇴장한 것 처럼… 오늘 내 이름도 Not I, but Christ가 되며, 나 또한 주인공의 나타나심을 준비하고 퇴장하는 이가 되는 삶을 살고 싶다.
10. 끝없는 ‘자기 중심성’을 비워내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고 싶다. ‘준비’하는 자로 ‘퇴장’하는 자로 내 정체성을 세워가고 싶다. 잘 안되지만…
11. 오늘도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