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8:21-35 나의 악함을 직시할 때 용서할 수 있게 된다
1. 베드로는 예수님께 자신의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을 용서해줘야 하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그는 의기양양하게 일곱 번이면 충분하지 않겠냐고 예수님께 묻는다.
2. 왜냐하면 유대인의 랍비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3번 까지를 용서해야만 했다. 용서의 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유대인의 한도치의 두 배이며, 완전 수인 7번을 제시한다. 이는 베드로 자신이 유대인들이 세운 기준보다도 훨씬 더 관대한 사람임을 드러내려고 한 것 같다.
3.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의 생각과 베드로의 관대함을 훨씬 더 뛰어 넘는 수준이었고, 우리가 계속해서 용서해야 함을 이야기 하시면서 달란트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신다.
4. 이 달란트 비유에서 우리 각 사람은 이미 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자이다. 우리의 엄청난 죄의 빚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모두 탕감 받은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사람은 자신에게 겨우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도 탕감해주지 않고 오히려 그를 옥에 가두게 된다 (30절). 이게 바로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5. 결국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얼마나 큰 죄를 용서 받은 사람인지를 깨닫는 것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핵심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저 용서하라고, 혹은 그게 율법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용서해야 할 까닭은 우리가 이미 용서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6. 우리는 더 큰 죄(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사함을 받을 만큼의)도 용서 받았으면서 우리에게 작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용서 못해서는 되겠냐는 것이 오늘 비유의 핵심이다.
7. 그리고 35절은 말한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그저 용서하는 수준이 아니라 “마음으로" 용서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용서하라는 뜻이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의 적대감이 남아 있지만 말로만 하는 용서가 아니란 뜻이다.
8. 이러한 기준에서 비추어 보니 나는 아직도 제대로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용서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서 용서하고 싶지 않는 것들이 남아 있는 경우들이 있다.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은 내가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이고, 일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를 불쌍히 여겨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용서가 잘 안되는 이유는 반대로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하나님께 받은 용서가 일백 데나리온이고, 그가 나에게 진 빚이 일만 달란트 같기 때문이다.
9. 나의 죄성을,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결국 용서는 스스로에 대한 자아 정체성에서 부터 비롯된다. 나는 얼마나 죄인인가? 나는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죄인인가? 나는 어느정도 크기의 용서를 받은 죄인인가? 내 죄와 내 악함을 더 직시하게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다른 이들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묵상을 마치면서도 아직도 잘 안된다는 것을 느낀다. 주님께 은혜를 구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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