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9. 4. 11.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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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4:1-11 허비?? 준비!!

 

내가 성경에서 참 좋아하는 본문이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향유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여인과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비난하는 예수님의 제자… 뭔가 선명한 대비가 되는 본문이다.

 

오늘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을 돕지 말라고 말씀하신게 아니었다. 그들을 원하는대로 도우라고 말씀하신다 (7절). 하지만 때로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오늘은 여인의 향유를 깨뜨려 부어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는 것이었다.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는 것이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 보다 더 우선시 되어야 한다. 그것이 오늘 주님이 하신 말씀하신 것이다. 

 

가난한 자를 돕는 것보다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는 것, 그것은 때때로 아니 종종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다. 오늘 본문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4절)’ 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을 위해 좋은 일을 할 때, 그것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향유를 ‘허비’한다고 비난한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판단은 합리적이다. 계산해보면 그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눈에 낭비 같아 보이는 일을 우리는 지금 시간과 물질과 열정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허비’같이 보이는 일을 예수님은 ‘준비’라고 말씀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일을 해야만 한다

 

합리적인 생각을 넘어서, 때로는 사람의 눈에 중요해 보이는 일을 넘어서,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는 내가 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 인생의 ‘낭비’가 아니라 주님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판단에 목숨걸지 않기 원한다. 그들이 뭐라고 말하던 예수님께 좋은 일을 뚝심 있게 해 나가는 내가 되기를 원한다. 물론 독선적으로 나만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준비’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오늘 우리 형제, 자매들 중에서 송끄란(태국 설날임)때도 기숙사에 남아 있는 형제, 자매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려고 초청했다. 어제 저녁부터 청소하고, 아내는 음식을 준비하고 바쁘다. 함께 식사와 교제함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임을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과 우리 가족의 사랑이 그들에게 흘러 가기 원한다. 짧은 교제의 시간이지만 이 시간을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길 원한다. 그리고 오늘도 이 모임을 통해서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며 ‘준비’하는 우리 가정이 되기를 원한다. 

 

매일 이렇게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며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할 수 있기를 원한다. 오늘도 향유를 부을 수 있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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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3. 13.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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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5:21-34 사랑이 삶을 움직이는 힘이 되어야 한다. 

본문 전체를 읽어야 하는데, 5:21절을 읽으며 충격을 받아 뒤로 쉬이 읽어 나갈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어제 돼지의 가치와 함께 고민했던 그 귀신들린 한 영혼을 위해 일부러, 의도적으로 그 곳으로 가셨다.그리고 그 영혼을 고치시고 나서는 바로 다시 돌아오셨다.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5:21)

예수께서는 그 영혼을 고치시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시간을 내신 것이다. 지금과 같이 교통이 좋은 때도 아니고 적어도 몇 일을 걷고, 배를 타고 하셔야 했을텐데.. 예수께서는 3년이라는 정해진 공생애 중에서 아마도 몇 일 시간을 내셔서 다녀 오셨을 것이다. 이 3년의 공생애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 시간인가? 성경의 모든 것을 이뤄야 하는 그런 중요한 시간이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 시간을 그 한 영혼을 위해 쓰셨다.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진다. 예수님을 움직인 것은 효율성이 아니라 사랑이었다.'현대인은 효율성의 노예가 되어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는 어느 글에서 본 글귀가 생각이 난다. 나 또한 효율성이 매우 중요하다. 물론 선교사의 시간과 재정은 소중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많은 사람의 기도와 후원을 통해 나에게 지금 소유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선교사의 시간과 재정을 효율성으로만 보기 시작하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의 사역은 비즈니스가 결코 아니다. 투입된 대로 혹은 투입된 이상으로 이익을 남겨야 하는 사업이 아니다. 나는 기업도 아니다. 나는 효율성이 아니라 반드시 사랑으로 움직여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나의 시간과 재정의 사용이 효율성으로 우선순위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사랑으로 정해져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 처럼 말이다.

하지만 사랑으로 움직이신 예수님은 실제로 결코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셨다.사랑으로 움직이셨지만 그 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맞게 움직이셨다. 돌아오자 마자 회당장 야이로를 만나셨고, 그 딸을 고치기 위해서 움직이셨다. 그리고 가는 도중에 혈루병 걸린 여인을 고치신다. 물론 이 여인을 예수님께서 고치셨다기 보다는 그의 믿음을 통해 고침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움직이시는 그 시간에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만짐을 통해 고침을 받았다. 변두리에 있었던 그 여자조차도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사용하셔서 구원해주셨다. 

나의 삶을 돌아본다. 오늘 나를 움직이는 이유는 사랑인가? 한 영혼인가? 아니면 효율성인가? 
예수님처럼 사랑이 나를 움직였으면 좋겠다. 하나님을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나의 삶에 드라이브를 거는 동력이 되었으면 좋겠다. 때로는 효율적이지 못해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해도, 느리고 천천히 가는 것 같이 보여지더라도 사랑으로 움직이는 나이기를 원한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유를 대며 나태함을 피우지 않기도 원한다. 나를 이 땅으로 보내신 그 목적을 잊지 않고, 청년들을 세우는 일, 복음을 전하는 그 일에 나태하지 않기를 원한다. 

오늘도 효율성이 아닌 사랑으로 움직이며, 사랑으로 내어주며, 사랑으로 섬기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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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2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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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9:10-28 내 삶을 움직이는 동기, ‘사랑'

오늘 솔로몬은 자신을 위해 유리해 보이는 모든 것들을 하고 있다. 성도 짓고, 역군도 일으키고, 바로의 딸과도 결혼하고… 그리고 그러면서도 그는 25절에서 ‘해마다 세 번씩 번제와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또 여호와 앞에 있는 제단에 분향하니라’ 내 마음대로 살고, 내 마음대로 행하면서 예배도 드린다.

오늘 솔로몬의 정치적 행적들의 근본 원인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염려’였다. 성을 쌓는 이유는 항상 염려이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성을 쌓는 것이다. 정략결혼이 왜 존재하는가? 바로의 딸과 왜 결혼하는가? 애굽이란 강대국이 자신을 침범해서 자신의 왕의 자리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다. 염려는 결국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리고, 나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앉게 한다.

그가 예배한 이유도 아마도 ‘염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예배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자신의 자리를 어떻게 하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예배의 자리로 꼬박 꼬박 나오게 하였다. 그의 예배의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그는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자신의 두려움을 예배하며 두려움이 자신에게 겁 주는대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행하게 되었다. 

오늘 나를 움직이는 동기가 무엇인가? ‘사랑’인가? ‘두려움’인가? 요즈음 요엘이 때문에 여러가지 고민들을 하고 있는데, 나는 요엘이를 ‘사랑’때문에 요엘이를 위해 참고, 인내하고, 기다리고 있는가? 아니면 요엘이가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때문인가? 오늘 랑캄행 대학교 영어 시험반 대비 클래스를 시작하였는데, 그 동기가 ‘사랑’때문인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유가 ‘사랑’때문인가? 아니면 ‘주일에 교회에 가야 하는 당연함’때문인가? 내 삶에도 ‘두려움, 염려’가 이유가 되어 움직여지는 일들이 분명히 많아 보인다. 하지만 내 삶이 솔로몬과 같아지기를 원치 않는다. 그의 삶을 반면교사를 삼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내 삶의 모든 이유가 되기 원한다. 두려움을 쫓아가지 말자. 하나님을 쫓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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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7. 10. 11.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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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
그런데 나에게는 사랑이 없다.
사랑 그 자체이신 그 아들이 내 안에 살아야만 그 사랑이 흘러 넘칠텐데...
아들이 내 안에 거할 곳이 없다.

너무 분주하다.
너무 정신없다.
그 아들이 거할 처소를 내 안에 마련해야...
내 안에 그 사랑이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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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7. 9. 27.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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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18:1-8,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


1절에 보면 다른 천사가 내려와서 그 큰 성 바벨론이 무너졌음을 선포하고 있다. 두 번에 걸쳐서 무너졌다 라고 과거형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실제로는 아직이다. 이미 무너졌다고 선포하는 것과 아직 무너지지 않았음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오신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는 우리의 인생과 같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큰 바벨론은 이미 무너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좋아하고, 원하고, 사랑한다. 완전히 우리 눈 앞에서 무너지기 전에 이미 그것이 무너졌음을 깨닫고 거기서 돌이키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런데 이렇게 지혜없는 우리를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하신다.

그 하나님과 어린양이 아니라 바벨론에게 눈을 돌려 보고 있는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여전히 거기서 나오라고 말씀하신다.

계시록의 거의 후반부이다. 이제 심판이 어느정도 많이 진행되었고, 더 이상 구원의 여지가 없을 것 같은 심판 속에서도 여전히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신다.

거기서 나오라고... 

결국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이런 끈질긴, 계속되는, 그리고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이다. 

그 주님의 사랑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고, 우리를 회복시킬 수 있다. 오늘도 그 주님 앞에 나아가자.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결국 그 행위대로 갚아 주신다. 바벨론이 잘못 한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갚아 주신다. 

하나님의 공의인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공의로우시고, 그 사랑과 공의로 온 세상을 심판하신다.

그 때가 멀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우리를 위해서 그 때를 늦추시고 계신다.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 까지 쉬지 않으시며, 계속해서 사랑하신다고, 그리고 그 안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그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알아가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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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