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2. 14.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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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15:1-8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

1. 일곱 천사의 일곱번 째 재앙, 곧 마지막 재앙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1절). 1절에서는 이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가 마칠 것을 말씀하신다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1절 하반부)

2. 그리고 나서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찬송한다 (2절). 온갖 어려움을 이기고 일어난 자들의 찬양은 3절과 같다.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3절)

3. 짐승과 우상들과 짐승과 우상들의 수 (666)를 이겨낸 자들, 온갖 어려움과 환난을 통과하고 나온 자들의 노래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이었다. 그 찬송의 내용은 주께서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고,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라는 찬양이었다. 

4. 내가 짐승과 우상들 속에서 온갖 어려움을 당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크고 놀라우시며, 주의 길은 의롭고 참되시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라면 고난을 마치고 나서 하나님을 이렇게 높이고, 여전히 하나님은 의롭고 참되시다고 고백할 수 있었을까? 

5. 이번에 한국에서 12월 3일에 일어난 계엄의 사태로 인해 모든 정신과 관심이 거기에 쏠렸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도 건성으로 하거나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리고, 계속 뉴스를 보고 또 보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 도대체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6. 그러나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3절을 보며 내가 해야 할 것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며 우리 하나님만이 의롭고 참되심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 믿는 나의 삶은 그 분의 의롭고 참되심이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7. 보수, 진보의 가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이 땅에 실현되는 것이다. 복음은 보수도 진보도 아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이 땅에 드러나는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변화시킨다. 

8. 오늘 그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이 땅에 드러나기 원한다. 국민들을 대표해 투표권을 가진 300명의 국회의원들이 정치적 유불리함을 떠나 우리나라에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는 한 표를 던질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그렇게 되기를 기도한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살아있는 나라가 되어 여전히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어 열방을 섬기고,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이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면서 계시록 15:3절에 나오는 것 처럼 우리 또한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다고, 주님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다고 찬송하기를 원한다. 8절의 말씀 처럼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대한민국에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살아있어 그 영광과 위엄이 가득차게 되기를 원한다. 

9. 한국 시간 오후 4시를 위해 기도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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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2. 3.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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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8:1-13 나의 자리에서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기

1. 오늘 본문은 일곱째 인이 떼어지고 나서 부터 시작되는 재앙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일곱째 인이 떨어지고 나서 일곱 천사들이 일곱 나팔들을 받는다. 각 나팔을 불 때 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 땅에 일어난다. 

2. 본문에서 흥미있는 부분은 3, 4절인 것 같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3. 금 향로에 들어 있는 향을 어떤 신학자들은 기도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맥상 기도는 뒤에 나오기에 우리가 올려드린 예배나 찬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무엇이든 그 모든 것이 우리의 기도와 합하여 일곱 나팔의 심판이 일어나기 전에 하나님께 올라가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4. 때로는 기도를 할 때, 예배를 드리거나 찬양을 올려 들릴 때, 정말 하나님께서 받으실까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때로는 의심하면서, 때로는 다른 생각을 하면서, 졸면서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기도, 예배, 찬양도 그저 땅에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받으심을 계 8:3-4절을 보여주고 있다. 

5.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향로에 담겨 올라간 우리의 기도, 예배, 찬양을 사용하신다.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5절).

6. 눈에 무엇인가 보이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내가 원하는 때,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나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더라도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듣고 계시기 때문이다. 나의 기도가 단 한 단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천사를 통해 향로에 담겨 하나님께 올라가기 때문이다. 

7. 사람인지라 오랜 기도에도 응답되지 않거나,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드려도 전혀 바뀌지 않는 것 같은 마음이 들 때, 좌절하기도 한다. 낙망하여 기도를 멈추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제 일곱째 인이 떼어지고, 첫 번째 나팔이 불기 직전의 그 고요하고 긴장감이 도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와 예배, 찬양을 받으시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8. 쉽게 기도를 멈추거나 포기하지 말자. 하나님께서 여전히 듣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들으실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예배와 찬양, 기도를 사용하신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근시안적인 시선과 자세로 하나님께서 듣지 않고, 사용하지 않으실거라 미리 판단하여 멈추지 말자.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생각보다 크고,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 일하신다. 내가 할 일은 그저 오늘도 나의 자리에서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어렵지 않지 않은가? 뭔가 엄청난 일을 오늘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예배자로, 기도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 되는 것이다. 

9. 해야 할 일들에 눌리지 말고, 그저 오늘 허락하신 은혜만큼 해 나가자. 오늘도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일에 게을리하거나 멈추지 말고, 이 말씀을 붙들고 해 나가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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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1. 22.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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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2:18-29 죄를 용납하는 것도 결국 우선순위의 문제이다

1. 오늘 본문은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말씀이다. 오늘 본문도 다른 7개의 교회에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칭찬을 먼저 해 주신다. “네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19절). 

2.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칭찬은 처음보다 그들이 더 열심히 애를 썼다는 의미로 보여진다. 그들이 더 열심히 애를 쓰지 않았다면 처음보다 나중 행위가 어찌 더 많아질 수 있겠는가? 단순히 일 뿐만이 아니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의 성품까지 성장, 성숙한 것을 칭찬하셨다. 

3. 그러나 일적으로, 사역적으로, 정서적으로, 성품적으로도 성장, 성숙한 두아디라 교회의 문제는 죄를 “용납"함이었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0절). 

4. 교회의 성장함과 성숙함 속에서 그들이 잘 못한 것은 작은 죄를 용납한 것이었다. 용납했다는 헬라어 단어는 몇 일전 나누었던 2:4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에서 버렸느니라에 해당하는 단어로 동일한 단어이다. 두아디라 교회도 에베소 교회와 마찬가지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들로 대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즉 자칭 선지자라 하는 이세벨이란 여자를 하나님의 자리에 앉게 만든 것이다. 

5. 아마도 이 이세벨이란 여자는 이름으로 보아 음행에 관련된 행위나 관습 등에 관련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죄에 대해서 단호히 끊지 못하고 여지를 두고, 여지를 둔 것이 결국 하나님보다도 더 중요하게 된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6.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하면서도 얼마든지 쉽게 죄를 용인할 수 있다. 이 정도면 내가 아직 컨트롤 할 수 있다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죄를 용인하기도 하고, 이정도는 누구나 다 하는 것이라고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죄를 용인하기도 한다. 작은 죄의 눈덩이가 굴러가면서 도저히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죄의 무게로 나를 누르게 되는 것이다. 

7. 작은 죄에 타협하면 그 뒤는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심지어 그 죄가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앉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두아디라 교회를 통해서 보고 있고, 또 우리 삶의 수 많은 경험들을 통해서 봐 왔다. 죄는 전염성이 있고, 죄는 우리가 우리 생각처럼 쉽게 컨트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5:22은 우리에게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모양이라도 취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죄에 사로잡히고, 노예가 되어 버리고 만다. 

8. 내가 지금 용납하고 있는 죄는 무엇이 있을까? 때로는 단어 사용에 문제가 있다. 아이들에게 험한 말이 나올 때가 있다. 때로는 세상적인 기준이 하나님 보다 앞설 때도 있다. 모두들 다 이렇게 하는데 이정도는 괜찮겠지? 라는 마음으로 쉬이 죄를 가벼이 여길 때가 있다. 정신을 차리고 작은 죄라도 용납하지 말며, 작은 죄라도 가볍게 여기지 말자. 죄는 언제나 가장 가벼운 모습으로 찾아와서 가장 무겁게 우리를 짖누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죄가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하자. 조금도 죄에 대해서는 관용하지 말자. 그래야 내가 산다. 

9. 죄를 용납하는 두아디라 교회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를 기회를 주었으되…” (21절). 회개의 기회가 있을 때 회개하고, 다시 주 앞으로 나아가는 내가 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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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1. 20.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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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2:1-11 더욱 사랑

1. 오늘 말씀은 일곱 교회 중에서 첫 두 교회인 에베소 교회와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말씀에 관련된 내용이다. 한 구절, 한 구절 들을 때 마다 교회들의 연약함이 마치 내 모습과 같아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읽었다. 

2. 두 교회 모두 처음에는 칭찬을 받는다. 특별히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아신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2절) 행위도, 수고도, 인내도 아신다고 말씀하시니 참으로 기쁘고 감동이 되었을 것 같다. 

3.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에 대해 책망하신다. 4절이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이 버렸다는 헬라어 구절의 의미를 찾아보니 첫 번째 의미가 사랑이라는 감정의 소멸을 의미하기 보다는 오히려 삶의 우선 순위에서 하나님이 뒤로 밀려난 것을 의미하고 있다. 포기하다, 이혼하다의 의미도 있다. 

4. 이런 문맥을 보았을 때,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배반하고, 하나님을 멀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칭찬과 같이 그들은 여전히 선한 행위를 하고, 수고하고, 인내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우선순위가 점점 더 뒤로 밀려나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동기로 선한 행위, 수고, 인내를 하기 보다는 이제는 사랑과 관계 없이도 그저 선한 행위, 수고, 인내를 하게 된 것 같다. 

5. 사랑의 관계 없이 그저 서로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살아가는 부부를 생각해보면 비슷하지 않을까? 별일은 없는데, 그 관계는 이미 식어 버렸고, 결코 지속될 수 없는 그런 사이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결코 그런 관계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더 우선적이고 중요할 뿐이다.

6. 팀 켈러는 이렇게 우리 삶의 사랑의 우선순위가 바뀌는 것을 우상숭배로 설명한다. “무엇이든 당신에게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무엇이든 하나님보다 더 크게 당신 마음과 생각을 차지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다른 데서 얻으려 한다면 그게 바로 우상이다 (팀 켈러, 내가 만든 신 pp.22-23).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 보다 더 중요한 것들로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채웠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보다는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하였다. 

7.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베소 교회를 향해 사랑의 우선순위를 점검하라고 말씀하신다. 지금 가장 사랑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인가? 지금 내 마음을, 생각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이 모든 대답에 하나님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에베소 교회와 같은 책망을 들을 수 밖에 없다. 귀 있는 자는 들어야 한다 (7절). 

8. 내 삶에 하나님의 자리가 너무 좁고 협소하며 뒤로 밀려 나 있다고 생각이 든다.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을 하면서도 하나님 보다는 다른 것들을 사랑하고 의지하려고 하는 나의 죄성을 다시 한 번 회개한다. 의지적으로, 감정적으로 하나님을 내 마음에 가장 귀한 자리에 다시 모시고, 그 분으로 가득 채워지는 오늘 하루가 되기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 무엇을 쳐내고, 무엇 무엇을 하지 않고로 접근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하나님께 시선을 맞추고, 하나님께 내 생각을 더 고정시키고, 그 분을 더 사랑하려는 변화가 있어야 한다. 더 많이 사랑하면 쓸데 없는 것은 사라지게 된다. 사랑하면 변화된다. 사랑하면 사랑에 따라 우선순위가 정렬된다. 오늘 내가 해야 할 것은 그래서 더욱 사랑이다.  

9. 오늘도 예수님을 더욱 사랑, 내 이웃들을 더욱 사랑하기 원한다. 내 우선순위와 사랑의 영점을 조절하여 더욱 더 하나님으로 충만한 하루가 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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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1. 19. 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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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1:9-20 형제, 환난, 나라, 참음


1. 오늘 본문은 요한에게 말씀하신 분이 누구이신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본문이다. 그 분은 일곱 금 촛대 사이에 흰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며, 양의 모습이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의 입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는 그런 분이시다 (12-16절). 

2.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서는 각 구절로 할 말이 많을 것 같지만, 오늘은 본문 첫 구절이 마음에 딱 와 닿았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9절)

3. 밧모 섬에 유배된 요한이 자신이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 자신을 소개하는 말이 너무나도 인상 깊었다. 그는 지금 엄청난 환상과 계시를 보았다. 하나님께서 다른 이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시면서 자신에게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분명 다른 사람들보다 영적으로 더 깊고 높아 보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형제’라고 소개하고 있다. 훈계식으로 말하지도 않는다. 이런 요한에 비해 때때로 영적인 은사나 포지션을 자신의 영적인 우월감이나 더 높은 무엇으로 생각하여 사용하는 사례들을 많이 봤다. 나도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요한은 그렇지 않았다. 그저 자신은 하나님의 도구였고, 그저 자신은 구원받은 죄인일 뿐이었다. 나 또한 한 형제일 따름이다. 이 교훈을 잊지 말자. 

4. 또 요한은 자신이 동일하게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설명한다.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하던 시대는 순교와 육체적인 박해가 당연한 시대였고, 요한 또한 말하기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예수의 환난과 오래 참음에 동참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5. 그리스도 인이 된다는 것은 영원한 구원의 기쁨이 있지만 단지 그런 기쁨만 있는 삶은 아니다. 모든 것이 잘 되고, 잘 풀리고, 내가 원하는 길로만 가는 삶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예수를 주로 섬기기 때문에 때로는 어렵고, 힘들고, 고난과 오해를 짊어지고 가는 삶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고 인내하고 견디는 삶이다.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 불가능하다.

6.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이 구절에서 환난과 참음 사이에 한 단어를 더 말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왕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그 분께서 왕이시고, 그 분께서 나의 아버지이시기에 찬양의 가사처럼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되는 삶이다. 

7. 환난도 일어난다. 참음도 일어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우리 홀로 겪는 일이 아니라 예수께서 왕이신 그 나라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오늘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 혼자 경험하고 이겨내야 하는 삶이 아니라 우리를 자녀로 불러주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 안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뜻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잠시, 잠깐의 어려움은 있을 수 있겠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승리하시는 나라이다.

8. 그렇기에 우리는 혹시 어려움을 경험하고 힘든 일을 경험하더라도 이겨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오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려움 중에, 환난 중에, 오해받는 중에,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난을 아시고 이해하시는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고 계실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어려움과 인내를 통해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나와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수 많은 형제, 자매들을 우리의 삶에 허락하셨다. 그렇기에 오늘을 기쁨으로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9. 한 믿음의 형제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서 오늘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기 원한다. 나 홀로 걸어가는 길이 아니라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수 많은 믿음의 형제, 자매를 주셨음을 기억하고, 겸손함으로 함께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오늘이 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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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1. 14.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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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71:1-13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1. 시편의 기자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에 얼마나 신실하게, 또한 성실하게 간섭하셨는지를 기억하고 있다. 그의 경험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피난처이셨다. 

2. 1절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소서" 인생의 수많은 어려움에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 중요한 사실은 그 분은 언제나 신실하게 그 자리에 계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도 포기하지도 않으신다. 

3.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냐를 의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자리에 게시기에 내가 할 일은 하나님 쪽으로 피하면 된다는 것이다. 늘 그 자리에 계신 하나님께 나아가면 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돌아갈 곳, 머물 곳이 있다는 것이다.

4. 시인은 어려서부터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쌓아왔다.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5-6절). 

5. 사람과의 관계도 어느 한 순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데, 하물며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하랴? 시인은 자신이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했다고 이야기 한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경험을 하는 것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우게 된다. 

6. 나의 삶과 더불어 우리 아이들은 어떤지를 돌아보게 된다. 우리 아이들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자신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힘들 때 하나님께 피하고 있는가? 나는 이러한 경험들을 어떻게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하는가? 참 큰 숙제이다. 

7. 12절에 시인은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하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결국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의 아니라 아빠의 하나님 엄마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 되도록 아이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하나님께 피하는 경험들이 아버지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 되게 만들고, 나의 하나님의 경험이 또한 더더욱 하나님께 피하도록 만든다. 

8. 믿음의 선순환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내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아이들이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을 보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힘들 때 사람을 의지하고, 내가 어려울 때 낙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아이들이 힘들때 하나님을 찾고, 어려울 때 기도하는 모습을 어디서 누구로부터 배울 것인가? 내가 부모로서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이들을 향한 가장 좋은 교육 방식임을 기억해야 한다. 

9. 하나님만 나의 피난처이시다. 하나님만 나의 산성이시요, 피할 바위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다. 그 분을 떠나서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 분안에 거해야 한다. 그 분의 나의 삶의 이유와 목적이다. 더욱 그 분을 사랑하고, 더욱 그 분을 경험하고, 더욱 그 분을 사랑하기 원한다. Nothing에서 Everything을 창조하신 분께서 오늘 아무것도 아닌 내 삶에 오셔서 모든 삶의 의미와 이유를 허락하신다. 그러기에 더더욱 그 분께만 피해야 한다. 내 삶에 가장 귀한 나의 생명도 그 분께 드린다. 내 삶의 이유와 목적이 되시는 그 분을 향해 오늘 한 걸음 더 앞으로 걸어 나가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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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1. 12.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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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70:1-5 헛된 시도를 멈추고 주께로!

1. 오늘 시편은 다윗의 시편으로 매우 긴급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하는 시편이다. 1절에서 다윗은 고백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1절). 그의 상황이 어떤 것인지 성경은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혹시 광야에서 사울 왕에게 쫓기다가 같은 동굴에 갖힌 그런 상황은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2. 정말 너무나도 급박하고 긴박한 상황이다. 이제 정말 삐끗하면 죽게 생겼다. 아마도 그 상황이 아니었더라도 다윗 인생의 절대 절명의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때 다윗은 인간적인 살아날 혹은 이 어려움을 피해나갈 방법을 찾거나 자포자기하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의 선택은 여전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 자신을 속히 도와주시길 기도하는 것이었다.

3. 그리고 그의 기도의 말미는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고백하는 것이었다.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살아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4절)

4. 너무나도 급박하고, 도저히 헤어나오지 못할 순간에도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아는 사람이다. 내가 이 땅을 밟고 살아가지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그 능력으로 운행하고 계신 그 분이 바로 내 삶을 인도하시고 간섭하시고 이끌어 가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그 순간에 무너지지 않고 기도할 수 있다. 

5. 다윗은 그 놀라우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다시 한번 고백한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5절) 내 상황은 주님이 아시는 바와 같이 아무 자랑할 것이 없으나 내게는 위대하신 하나님 한 분이 계시니 나를 도와주세요! 라는 고백이다. 

6. 우리의 삶에는 내가 원하든 원치않든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때로는 그 일로 인해서 여전히 고통스럽고 아픈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도 있으며, 지금 내 앞에 있는 누군가가 나를 힘들게 하기 때문에 너무나도 그 사람이 밉고 싫은 상황에 처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순간에 나는 누구를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러나 그 긴박한 순간에 누구에게 기도하고 있는가? 

7. 내가 찾고 바라고 있는 것이 혹시 사람의 도움은 아닌가? 때로는 친구, 때로는 상담과 같은 형태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보다는 주변의 좀 더 눈에 보이는 나를 도울 수 있을 것 같은 것들을 의지하고 있진 않은가? 혹은 돈을 의지하고 있지 않은가? 힘들고 공허한 마음을 쇼핑을 하거나 돈을 이용한 것들을 통해서 상황을 모면하려고 하고 있진 않은가? 

8. 오늘 다윗의 모범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 외에 그 어느 것도 의지하지 않기를 나의 삶에 촉구하고 있다. 하나님 외에는 다 헛것이며 허상이다. 나를 돕지 못하며, 나의 삶에 어떠한 위로도 줄 수 없다. 지금 힘든 상황인가? 지금 어려운 일들을 경험하고 있는가? 위대하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자. 위대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자. 그 분께서 내 반석이시요 내 요새이시다. “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심이니다” (3절)

9.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자가 없나이다" (시 73:25) 이 고백을 붙들고 살아가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우리를 모든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구원해주신 위대하신 하나님만 붙들기 원한다. 가정을 주님의 손에 맡기며, 태국의 사역들을 주님께 맡긴다. 다른 것들을 의지하려고 하는 시도를 멈추고 주 앞에 나아가길 원한다. 

10. 오늘을 그 분에 손에 나를 맡기며..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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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1. 8.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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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68:1-8 판단을 멈추고 사랑으로 

1. 하나님은 온전하고, 절대적 선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인해 선과 악이 결정된다. 즉 하나님 편은 선이며, 하나님 편이 아닌 것은 모두 악이다. 우리는 하나님 편에 속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할 이유이다. 

2. 그렇기에 하나님은 선인들에게 복을 주시며, 악인들에게는 그들의 악행에 해당하는 심판을 주실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악인들이 흥왕하는 것 같고, 악인들이 오히려 이 땅에서 잘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라도 그것이 끝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3. 왜냐하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일어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 연기가 불려 가듯이 그들을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1-2절)

4. 그러나 우리가 마음이 어렵고 힘든 이유는 그게 언제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언제 일어나실지, 악인들의 최후의 모습은 알지만 그 최후의 모습이 언제 다가올지 모르기 때문에 마음이 어려운 것이다. 빨리 심판하여 주셨으면 좋겠고, 하나님께서 빨리 일어나셨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들의 인생은 길어 보이고,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이 땅에서 떵떵거리고 잘 사는 것 같다. 보고 있음 짜증이 올라온다. 

5. 그러나 악인들의 심판의 날이 언제일지를 우리가 크게 신경 쓸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지막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일어나실 것이다. 오히려 지금 내가 관심을 기울려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계신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쏟고 돌보시는 자들에게 우리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6. 5절을 보면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우리의 관심은 이 땅에서 악인의 흥왕에 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아와 과부들에게 있어야 한다. 6절은 “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들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마음은 고독한 자들에게 있어야 한다. 

7. 악인을 심판하시는 문제는 하나님의 일이시다.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악인조차도 돌아오도록 기다리신다. 내가 죄인이었음을 내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오래 기다리고 참으셨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우리는 분노하게 된다. 저 정도 악인은 하나님께서 기다리실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이다.

8. 내 일은 고아와 과부들, 또 고독한 자들, 즉 하나님의 마음이 머물러 있는 자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복음이 필요한 자들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복음을 말하고, 복음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악인을 심판하는 것)에 관심을 끄자. 내가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 말자. 오히려 내가 구원 받았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뛰어 놀자 (3절). 그게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일이다.

9. 물론 세상의 불의를 눈감자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세상의 불의에도 맞서서 싸워야 한다. 왜냐하면 불의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과 맞서 싸우다가 내가 악이 되어서는 안된다. 불의에 맞서 싸우되 내가 그들을 판단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지는 말자. 내가 할 일은 사랑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오늘도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그 마음을 붙들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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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1. 5.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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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66:1-20 내 삶이 노래가 되가 주님을 높이길

1. 모든 우주, 만물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이다. 그 어느 한 가지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지 않으신 것은 없다. 그렇기에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솜씨와 영광을 찬양해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의무도 아니고, 우리에게 주어진 무거운 짐도 아니다. 은혜이다. 끝도 없이 펼쳐진 우주의 그 수많은 별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빛을 내고 있다. 

2. 나는 과학 유튜브를 참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천문학에 관련된 컨텐츠들을 좋아하고 자주 본다. 보다 보면 자주 나오는 말 중에 하나는 “우주 공간이 비상식적으로 크고, 별들은 너무 많고 도대체 이렇게 너무나도 큰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한다. 우주의 크기를 상상하면 사실 그렇다. 

3. 그런데 그 우주의 광대한 크기가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나타낸다면… 우주의 수 많은 별들이 빛을 내는 이유가 그 수 많은 별들을 지으신 창조주를 찬양하기 위해 빛을 내는 것이라면… 그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어서 이 광대한 우주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우주가 이렇게 크다면.. 뭔가 말이 된다. 

4. 시편 저자는 1-2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할지어다" ‘온 땅이여’ 라는 표현은 단순히 지구의 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온 우주 만물을 지칭하는 말이다. 온 우주 만물이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그 하나님이 그보다 더 광대하시고, 영화로우시고, 높으시고, 위대하시기 때문이다.

5.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 우주 전체에서 먼지 만도 못한 지구에 사는 크지도 않은 한 민족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 그래서 그들을 찾아와 만나주시고, 그들의 신음을 들으셔서 애굽으로 부터 나가게 하신다 (6-7절). 이것이 복음이다. 도저히 그럴 이유가 없는데, 그런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이 복음이다. 

6. 이스라엘이 뭐길래? 나는 누구길래? 나는 무슨 자격이 있길래 하나님의 관심을 받고 사랑을 받는가? 생각해보면 없다. 그런데 그 분은 나를 찾아오시고, 나를 구원해주시고, 나를 하나님의 선교에 사용해주신다. 그러니 내가 해야 할 것은 찬양이다. 16절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

7. 그 분의 이름을 높이고,찬양하고, 영광을 돌리고, 그 분이 행하신 놀라운 일(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잠잠하지 말아야 한다. 누가복음 19:40절의 말씀이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8. 우리가 침묵하니 온 우주의 별들이 빛을 내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우리가 침묵하고 있으니 온 자연이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다. 내가 어찌 잠잠하리? 내 입을 열어 주를 찬양하고, 내 마음을 열어 주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것이 주일 하루가 아니라 내 삶 전체가 주님께 드리는 노래가 되어야 하고 찬양이 되어야 한다. 내 삶이 찬양이 되는 그 하루가 되기 원한다. 

9. 요 몇일 정신없는 시간들을 보냈다. 한번 흐트러지면 다시 마음을 잡는 것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다시금 마음을 잡고, 내 삶이 노래가 되어 주님의 영광이 되길 원한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 19:14)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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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1. 1.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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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62:1-12 요동치 않고 흔들리지 않으려면


1.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음이 요동치는 경험을 수없이 하게 된다. 왜냐하면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바라는대로, 내가 원하는대로 잘 되지 않는 걸음을 걸어가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어려움으로 인해, 때로는 내가 원치 않은 일로 인해 우리는 마음을 빼앗기고, 우리의 마음은 요동하게 된다.

2. 그러나 오늘 시편 기자는 담대하게 이야기 한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1-2절).

3. 이 시편의 저자는 다윗이다. 다윗의 인생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큰 공을 세워 왕이 되겠다고 결심한 적도 없었고, 왕족 출신도 아니었다. 왕이 될 것이라고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요셉처럼 꿈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들에 나가 양을 치는 목동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어느 날 사무엘 선지자가 갑자기 찾아와서 기름을 부었고, 그 때 부터 사울 왕에게 원수가 되어 쫓기고 광야로 내몰리고, 쫓기고, 아내가 납치 당하고, 자신은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는 그런 처지에 내몰렸다. 

4. 한 마디로 그의 인생은 마음이 요동치는 경험을 수도 없이 했을 것이다. 때로는 하나님 앞에 너무나도 항변하고 싶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다윗이라면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제가 언제 왕이 되고 싶다고 했나요? 하나님 저에게 도대체 왜 그러세요? 저 좀 내버려두세요. 저는 편하게 살고 싶어요!!”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라고 말한다. 

5. 그러나 오늘 시편을 보고 있으면 처음과 나중의 고백이 조금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된다. 2절에서는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라고 고백한다. 그도 흔들리긴 한 모양이다. 그도 마음이 요동치긴 한 모양이다. 흔들리긴 했지만 크게 흔들리거나 낙심하거나 넘어지지는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후반부에 6절에 가면 조금 다르게 고백한다.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6.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삶이 이러할 것이다. 처음에는 흔들릴수도 있고, 요동칠 수도 있고, 넘어질 수 도 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영원히 온전하시고, 영원히 그 자리에 계신 분을 묵상하고 의지하고 따라가다보면 우리도 그 분의 성품을 조금 맛보게 되고, 그 분 처럼 요동치 않게 되는 것이다. 다윗도 처음에는 마음이 요동쳤고, 흔들렸다는 사실에 위로를 얻는다. 

7. 내 삶의 소망을 어디에 두는지, 나의 삶의 안정감과 방향을 누구에게 두는지가 우리의 삶을 결정하게 된다. 그 소망을 안정감을 나에게 두면 나의 삶은 원망과 두려움이 가득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의 나의 미래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염려와 두려움이 나를 이끌어가기 때문에 흔들리고 넘어질 수 밖에 없다. 내 삶의 주인이 나 자신인데, 내 삶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늘 불안하고 조금만 내가 원하는대로 되지 않아도 요동칠 수 밖에 없다. 

8. 그러나 나의 내일을 아시고, 나의 처음과 마지막을 아시는 그 분께 소망을 두고, 그 분이 내 삶을 인도해가시도록 내 삶의 주인의 자리를 내어드린다면 그제서야 우리는 쉼을 누리고, 평안을 얻을 수 있다. 요동치 않으려면 내 삶의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내 삶에 어려움과 고난이 있더라도 그 끝에 우리 하나님이 계신 것을 신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가장 아름답게 이끌어가고 계심을 신뢰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9. 오늘 나의 삶을 점검한다. 무엇을, 누구를 의지하고 있는지… There is no one, but You, God.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자가 되어 흔들리지 않는 삶을 걸어갈 수 있길 소망한다. 8절 말씀처럼 시시로 그를 의지하는 자가 되길!! Trust in Hium at all times!!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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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