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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서 한 텀을 사역하고 원래는 미국으로 신학을 하러 가려고 했었다. 어차피 신학을 하려면 제대로 하는게 낫다는 생각에서 였다. 하지만 선임 선교사님이신 양병화 선교사님께서 미국으로 가면 가족과 아내가 너무 고생한다고 차라리 한국에 가서 한국 본부 사역을 하면서 신학을 공부하라고 하셨다. 내가 속해 있는 단체는 한동대에서 시작된 훈련단체가 선교 단체로 된 케이스라 행정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열악했다. 그래서 기도 끝에 우리 가정은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필요로 하는 곳, 한국으로 본부 사역과 신학을 하기 위해 돌아갔다. 

 

본부사역을 하며, 신학공부를 하며 포항을 격주로 왔다갔다 하며 한동 NIBC 후배들을 섬겼다. 왜냐하면 그 때 교수님이 은퇴하시면서 여러가지가 복잡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화성-포항을 오가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선배 NIBCer들에게 후원을 요청하여 KTX를 타고 다녔고, 내가 아이들을 만나서 한 것은 함께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전하고, 치킨 및 야식을 먹고, 다음 날 아침에 아이들을 개인적으로 만나면서 상담을 했다. 또 밥을 먹고 부지런히 화성으로 올라왔다. 짧은 시간 함께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지금 생각하면 부족하기 짝이 없지만...) 후배들이자 동역자들을 섬겼다. (자랑을 하려고 쓰는 글이 아니다..)

 

오늘 그렇게 한동에서 만났던 한 자매에게 아침에 연락이 왔다. 후원계좌를 알려달라고... 자기 졸업하고 취업했다고... 

기분이 이상했다. 왠지 받으면 안될 것 같아 거절해야만 할 것 같았다. 또한 동시에 너무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 시간이 뭐라고… 이 어려운 시기에 취업했다고 우리 가정에게 후원을 하겠다고 연락을 주는지…

그리고 이게 처음이 아니다. 그때 만났던 친구들 중에서 졸업하고 정말 후원을 하는 친구들이 작년부터 생격나고 있다. 그런 연락이 올 때 마다 마음이 울컥울컥 한다. 

그 친구들에게 감사한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들어 뭔가 표현을 잘 못하는 것 같다. 

 

아내와 아이들이 견뎌줘서 격주로 포항을 다녀올 수 있었다. 특별히 그 시절 마라는 아토피가 너무 심해서 아내는 늘 마라를 챙긴다고 정신이 없었고, 세 명의 아이들을 양육한다고 아내가 몸이 많이 좋지 않았던 시기였다. 아내는 내가 포항에 가는 날 자주 아팠었다. 하지만 그런 시기를 함께 견뎌내며 섬겼던 우리 후배들이 이제 그들의 삶을 나눠주며 또 자신들이 애써 번 돈을 후원해주겠다고 연락이 오는 것을 보며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부족한 남편, 아빠를 견뎌준 가족들, 부족한 선교사를 견뎌준 우리 샬롬의 학생들, 부족한 선배를 견뎌준 한동 NIBC의 후배들.. 다 너무 고맙다.  

나도 더 힘을 내어 나를 견뎌준 그들을 섬기게 되기를 원한다.

 

이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사역을 함께 시작하고 있다. 이들도 역시 같은 마음으로 잘 섬길 수 있게 되길… 

Not I but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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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5.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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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3:1-18 NIBC, Not I but Christ

우리의 삶은 때로는 답답해 보이고 막막한 순간에 마주치게 된다. 오늘 시인의 모습이 그렇다. 사방에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해서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시점이다. 18절에는 그래서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고 까지 표현하고 있다. 시를 읽고 있는데도 답답한데 실제로 이 상황 속에 있어야만 했고, 이 상황을 견뎌야만 했다면 얼마나 답답하고 힘이 들었을까? 심지어 그는 1-6절에서 이 상황이 그에게 전적으로 닥친 고난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오늘 본문 예레미야 애가의 저자를 누구로 보느냐에 대한 의견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예레미야로 볼 경우 그가 얼마나 많은 순간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경고하고, 기도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가? ‘눈물의 선지자’가 그의 별명 아니었는가? 그런데도 닥친 재앙을 그 자신에게 돌리고 있다. 예레미야가 정말 무엇을 잘못 했는가? 잘못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지 않았는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오늘 본문의 저자는 그 벌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라 자신이 받고 있음을, 그 고난을 당하는 자가 ‘자신’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1절). 

18절의 그가 고백한 그의 상황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향해 외쳤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와 매치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이 잘못 한 것이 없는데도, 묵묵히 이 상황을 받아내고, 감내해야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게 바로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복음인 것이다. 복음이란 누구에게 좋은 소식인가? 그리스도께도 좋은 소식인가? 아니었다. 그 분께는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해야 되는 고난이고 고통이었다. 그럼 누구에게 좋은 소식인가? 바로 우리와 같은 죄인에게다. 

오늘 시인의 저자가 자신에게 그 모든 고난을 돌리는 까닭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를 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회복시켜 주시길 바라는 ‘기쁜 소식(복음)'을 향한 부족한 표현이다. 물론 이것을 완성시키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오늘 시인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모형을 보여주는 그림자였다.  

그렇다면 선교사에게, 리더에게 복음은 어떠한 것인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복음이란 어쩌면 예수님이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것과 같은 고난의 시간이고, 해산의 시간일 것이다. 물론 우리도 복음을 먼저 거져 받지 않았는가? 우리가 그저 예수님의 공로로 용서받았고, 용납받았으니 우리도 예수님이 그 길을 걸어가신 것과 같이 그 고통을 감내하고, 억울함을 감내하고, 그들을 위해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하며, 그들을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는 것이 우리가 가진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억울함을 수없이 만나게 되고, 내가 무슨 낙을 보려고 이 자리에 서 있는지를 수 없이 고민해야 되고, 손해봐야 하며, 때로는 답답하고 막막한 순간을 수도 없이 마주쳐야 하는 사람들이다. 

태국 사람들의 속이 보이지 않고, 때로는 우리를 이용하려고 해도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꺼이 고난을 감내해야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 묵상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 이렇게 글로 쓰는 것처럼 쉽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이 쉽지 않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하며 자신을 내려놓는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싸우면 지는 것이다. 소리 지르면 지는 것이다. 우리는 져야만 이기는 싸움에 참여한 이상한 왕을 쫓아가고 있는 이상한 사람들인 것이다. 

오늘도 기도한다. 내 힘으로 살지 않기를, 내 생각으로 판단하지 않기를 말이다. 
롬 8:5절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라고 말씀하고 있다. 오늘도 무엇을 따르고 있는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골 3:1-2에서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복음을 먼저 받은 우리가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방법은 희생과 자기부인이다. 져야만 이기는 이 싸움에 위의 것을 생각함으로 오늘도 겸손하게 이 길을 걸어가기 원한다. 
결국은 NIBC이다. Not I but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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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8. 27.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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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90:1-17 주님의 것이기에 주님만 의지합니다.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우리의 날을 세는 것이 지혜이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10절에서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 했다.
지금은 100세 시대라고 말하지만 우리가 강건하게 살 수 있는 날이 얼마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티끌같고 한날의 흔적같은 우리의 인생을 영원하신 주님께서 불러 주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결국에는 죽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로 와서 결국 주님께로 돌아가는 인생이다. 우리의 끝이 반드시 존재하기에 우리가 모든 것을 움켜쥐려고 하며 살지 않아야 한다. 내 인생의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 것이다. 늘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내 삶도, 내 생명도, 내 자녀도, 내 사역도.. 그 어느 것도 내 것이 아니다. 모두 다 주님의 것이다. 주님의 것이라고 생각할 때에야 비로서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16절에 보면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짧은 우리의 인생에서 결국 우리가 행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주님께서 하신다는 것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 놓아야 한다. 영원하고 전능하신 주님께서 주님의 일을 하실 것이다. 나는 주님께서 일하실 통로가 되면 된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이 기쁠 수 있다 (14절)

오늘부터 영어 수업을 시작한다. 나도 잘 못하는 영어를 가르치려니 두려움도 생긴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봤더니 내가 하는 모든 일 중에서 내가 잘해서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잘해서 아이들을 양육하고 있는가? 내가 잘해서 선교사로 나와 있는가? 내가 잘해서 말씀을 전했는가? 내가 잘해서 하고 있는 것이 도대체 하나도 없다. 그래서 내가 할 일은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잘하지 못해도 맡겨주셨으니 최선을 다해서 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다. 
어차피 내 사역도 아니고, 주님의 사역인데... 어차피 내 아이도 아니고 주님의 아이인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매순간 치열하게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주님께 맡겨드리고, 내가 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주님의 뒤를 그저 쫓아가는 것이다. 내가 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하시기를 기도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모든 영역에서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다. 
오늘도 그 주님만 바라보고, 그 주님만 의지한다.
오늘도 나는 죽고 예수께서 사시길 원한다. 삶에서, 자녀양육에서, 사역에서,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하여 주님만 내 삶에서 빛나시길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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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