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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 9:15-23 왜? 가 아니라 네!

1.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성막을 세운 바로 그 날에 등장하였다 (15절).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 모양이었다.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곧 증거의 성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으되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꼬 밤이면 불 모양이 있었는데" (15-16절). 

2.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준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성막을 세운 바로 그 날에 등장한 것이다. 

3. 낮이고 밤이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 시각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순종하기가 쉬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18절부터 23절까지를 보면 이스라엘이 잘 순종한다.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또 모세를 통하여 이르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 (23절) 라고 평가한다. 

4. 24시간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잘 보이니까 정말 순종이 쉬웠을까? 18-23절 사이에 보면 구름이 어떤 때는 짧게 머문다. 21절을 보면 "혹시 구름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있다가 아침에 그 구름이 떠오를 때에는 그들이 행진하였고…" 반나절도 안되어 이동한 때도 있었다. 

5. 그러나 어떤 때는 세월을 모르고 멈춰 있어야 했던 적도 있었다. 22절을 보면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영에 머물고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행진하였으니"

6. 이스라엘 백성들 머리 속에 드는 질문이 있었을 것이다. "왜?" "왜 하나님은 언제는 반나절도 안되어서 움직이시면서 왜 언제는 일 년을 거기에 있게 하시는가?'" 이러한 질문이 계속 들었을 것 같다. 어떤 이는 그 패턴을 찾으려고 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이는 그 이유를 찾으려고 여러가지 생각을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7. 내 삶에도 이렇게 이해가 잘 안되는 일들이 많았다. 그럴 때 가끔 이해가 되면 순종하기 편할텐데 라는 생각이 내 안에도 있었다. 도대체 그 일이 왜 일어났고, 도대체 그 사람은 어떤 의도로 했는지 이해가 되면 나도 받아들일 수 있을거란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 삶에는 사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더 많다. 이해가 안되는 일이 부지기수이다. 

8.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지혜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는 중이다. 나의 얄팍한 지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게 사실 당연하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히 안다면 이해의 여부와 상관없이 순종하는 것이 나에게 더 좋은 길이다. 왜냐하면 그 분은 나의 좋은 아버지이고, 나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삶을 가장 아름답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때로는 내 생각과는 다르고, 그 길이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그 길이 가장 베스트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왜?'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네'일 것이다. 

9. 나는 하나님을 정말로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가? 나의 이해와 지식을 더 신뢰하고 있지 않다면 '왜'가 아니라 '네'를 외치는 자로 오늘을 살아가자. 물론 이유를 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알아도 그 깊이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니 오늘도 "네" 하고 따라가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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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 9:1-14 순종하기 위해 예외를 요청하다

1.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모세는 자신이 들은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에 순종하는 것이 민수기의 패턴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유월절을 모든 율례와 규레대로 지키라는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그 정한 기일 곧 이 달 열넷째 날 해 질 때에 너희는 그것을 지키되 그 모든 율례와 그 모든 규례대로 지킬지니라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1-3절)

2.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그들이 첫째 달 열넷째 날 해 질때에 시내 광야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되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다 따라 행하였더라" (5절). 그런데 순종하다 보니 예외적인 상황이 발생하였다. 시체로 인해 부정하게 되어 유월절을 지킬 수 없었떤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6절). 

3. 그들은 모세에게 질문한다. "우리가 사람의 시체로 말미암아 부정하게 되었거니와 우리를 금지하여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정한 기일에 여호와께 헌물을 드리지 못하게 하심은 어찌함이니까" (7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예외적인 상황을 만들어 달라고 질문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겠다는 그들의 태도가 빛이 난다. 

4. 보통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지키지 않을 이유를 찾는다. '술 취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시면 어디까지 지켜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취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안취하게 먹는건 괜찮지 않을까? 그렇다면 몇 잔까지는 마셔도 괜찮은걸까? 회사에서 상사가 술을 주면 그래도 먹어야 하지 않을까? 등등의 이유와 극단적인 상황을 생각하며 안지켜도 될 이유를 찾는다. 

5. 그러나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헌물을 드릴 수 있을지를 고민하였던 것이고, 모세에게 자신들에게 방법을 알려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이런 그들의 요청을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매우 기쁘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을 열어주신다.

6. 평소와는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 큰 도전을 받는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진심으로 애쓰고 있는가? 혹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이유를 찾고 있지는 않은가? 극단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면서 이정도면 괜찮다고 타협하고 있지는 않은가? 

7.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쉽지 않다.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려고 하기 보다는 최소한으로 순종하려고 하는 태도가 내 안에 있다. 순종에서도 적당히 하려는 마음이 있다. 순종 안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당히만 순종하면서 면피하려는 태도, 최소한으로 순종하면서 그래도 난 순종했다라는 '자기의'만 가지려는 태도가 내 안에 있다. 

8. 오늘 이스라엘 자손들의 태도를 본받기 원한다. 말씀 그대로를 순종하기 위해서 질문하고, 말씀 그대로를 순종하기 위해서 또 듣기 원한다. 최소한만을 순종 하면서 그래도 나는 순종하고 있다는 자기위로에 빠지지 않기를 원한다. 날마다 하나님 말씀을 들은대로, 읽은대로, 또 말씀을 내 기준으로 재단하지 않고 온전한 순종을 하며 살아가기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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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 8:14-26 섬김과 공동체를 위해 부르심을 받다

1. 하나님께서 레위 백성을 택하신 것은 레위 백성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그들을 택하신 것이다. 그들을 택하신 이유는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하기 위함이었다. "너는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구별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내게 속할 것이라 네가 그들을 정결하게 하여 요제로 드린 후에 그들이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할 것이니라" (14-15절)

2. 레위인이 다른 지파보다 재능이 있다거나 뛰어나서 택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들을 택하신 이유는 *봉사*를 위해서였다. 다른 지파들을 대신하여 봉사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속죄하여야 하는 역할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들로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게 하며 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가까이 할 때에 그들 중에 재앙이 없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19절 하반부).

3.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부르시고, 또 각자에게 사명을 주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섬기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는 이것을 오해하여 내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여기거나 혹은 섬김이 아니라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자리에 앉으려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너무나도 크게 오해하는 것이다. 

4. 스파이더맨을 보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대사가 있다. "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 큰 능력은 큰 책임이 뒤따른다 뭐 이런 의미다. 우리를 불러주시고, 우리에게 자녀의 권세를 주시며, 우리에게 사명을 주신 것은 나 혼자만 하나님 자녀로 행복하고 즐겁게 살라는 것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5. 오늘 레위인도 그렇다. 그들을 부르신 이유는 이스라엘 회중들이 예배를 드리는데 필요한 봉사를 하게 함이 이유였기에 레위인은 조금도 우월의식을 가져서도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배는 하나님의 일이니까 중요하고, 다른 일은 그렇지 않으니까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가질 때, 레위인들은 스스로에게 우월의식을 가지게 된다. 

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 한번도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따로 부르신 이유는 섬김을 위해서이다. 따로 부르신 이유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서이다. 이러한 마음이 늘 있어야 하겠다. 왜냐하면 사역자들이 가장 오해하기 쉬운 부분이 바로 내가 그래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으니 나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거나 내가 이렇게 헌신했으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다른 것으로 보상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7. 목사도, 장로도, 집사도, 직분이 아직 없는 사람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역할이 다른 것 뿐이다. 다만 우리 모두는 섬김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고, 교회와 공동체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조금도 나를 남보다 낫게 여겨서는 안된다. 

8. 어제는 조금 속상한 일이 있었다. 꼭 같은 상황인데, 저쪽은 배려를 해주려고 하는 것 같은데, 우리는 배려를 하도록 강요받는 상황이었다. 별 것 아니라면 별 것 아닌데, 그게 마음에 쓰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쪽과 우리의 상황을 비교하게 되면서 마음이 상하기 시작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그런 생각이 든다. '그게 뭐라고.. 그냥 조금 더 배려해주면 되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이유가 섬김이고, 공동체를 위해서라면.. 내가 조금 덜 배려받더라도, 내가 조금 더 배려하더라도 그게 무슨 큰 일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9. 사실 큰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그 사랑을 보여주셨고, 나를 주님의 자녀로 부르신 것도 모잘라, 나를 선교사로 불러주셨는데.. 사실 그게 뭐 그리 큰 일인가? 작은 일에 마음 상하지 말자. 비교하지 말자. 그저 섬기려고 하자. 그저 사랑하려고 하자. 그게 부르심을 받은 자의 사명이다. 오늘도 그렇게 결정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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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5. 3. 28.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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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 6:1-12 표정에서 드러나는 거룩

1. 오늘 본문은 나실인의 법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나실인은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다. (2절) 나실인이라고 하면 우리는 보통 삼손을 떠올리게 된다. 삼손의 모습을 생각하면 나실인에 대해서 이해하기 쉽다.

2. 나실인은 지켜야 할 것이 있는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아야 하고, 포도는 그 자체로, 소산이나 씨도 껍질도 먹지 말아야 한다 (3-4절). 그리고 절대 머리에 칼을 대지 말아야 한다.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절대로 그의 머리에 대지 말것이라…" (5절 상반부)

3. 앞에 포도주, 독주, 포도에 대한 계명에는 그냥 먹지 말라고 되어 있는데, 머리에 삭도를 대는 계명에는 '절대로'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 이것은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길게 유지하는 그 모습이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되게 보여지는 헌신의 모양이고, 거룩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외적인 표현이기 때문일 것이다. 

4.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지만 사람은 외모를 볼 수 밖에 없다. 그 안에 어떤 마음이 있는지, 어떤 생각과 헌신이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내적인 헌신을 외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머리를 기르는 것이기에 나실인들은 머리에 삭도를 '절대로' 대지 말아야 한 것이다.

5.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과시하기 위함이 아닌 외적인 표현이 우리의 마음을 지켜 줄 때가 있다. 외적으로 단정하게 옷을 입고, 바르게 행동하는 것이 나의 마음과 생각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6. 이제 우리는 머리를 기를 필요는 없다. 머리를 기른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하나님을 위해 나를 표현할 방법이 될 수도 없다. 머리를 기른 사람이 너무 많지 않은가?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외적인 모습의 표현으로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임을 드러내야 한다. 

7. 긴 머리는 아니지만 그리스도 인으로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드러낼 수 있을 적절한 옷차림, 외모, 말투, 행동이 우리에게는 여전히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과 뒤섞여 있을 때 외모적으로 특별히 구분되지 않더라도 나의 말과 행동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내가 구별된 사람임을, 내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임을 드러낼 수 있다. 

8. 개성의 표현이 다양성으로 나타나는 시대에서 옷차림은 적당한 수준이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말과 행동, 그리고 표정은 특별히 나에게 매우 중요하다. 아내에게 자주 이야기 듣는 것은 내가 잘 웃지 않는다는 것이고, 웃지 않을 때 화가 난 표정이라는 것이다. 아내도 아이들도 내가 화가 났을까봐 자주 신경이 쓰인다는 것이다. 나는 정말 아닌데… 그러나 가족들의 평가는내가 가족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는 잘 웃는다는 것이다. 아마 내가 더 편하게 느껴지고, 정신을 꽉 붙들지 않아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9. 나의 평소의 표정이 그리스도를 드러내지 못한다면, 나의 평소의 얼굴에 웃음이 없다면 내가 아무리 묵상을 열심히 하고, 주님의 일에 헌신된다고 하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 삶이, 내 표정이 예수를 말해야 하고, 예수님을 드러내야 한다. 나실인의 계명을 보며 내 표정이 구별되고, 내 말과 행동이 구별되는 자가 되기로 다시 한번 다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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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5. 3. 25.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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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 4:34-49 삶으로 말하는 자

1. 모세는 아론과 함께 레위 사람의 인구 조사를 실시한다. 37절의 시작 부분과 41절의 시작부분이 동일한 것을 보게 된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이 반복된다. "이는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2. 물론 37절과 41절에서 다른 부분은 "모세에게 명령하신대로"라는 구절이 37절에는 포함이 되어 있고, 41절에는 포함이 되어 있지 않다는 차이점이 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행하였다. 

3. 이는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순종하거나 불순종하는 것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말씀하시면 순종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4. 때로는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하면서도 순종과 불순종을 내가 결정하려고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혹은 내가 정확하게 들은 것이 확실한가? 라는 질문을 하면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고 있을 때도 많지 않은가? 모세와 아론에게는 그런 의심도 없었고, 그저 순종만이 존재했다. 

5. 그러나 37절과 41절이 다른 부분을 보면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지만 아론은 직접 듣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통 하나님께서 부부에게 같은 마음을 주시지만 때로는 남편이나 아내 둘 중에 한 사람이 먼저 듣는 경우가 있다. 내가 직접 듣지 못할 때 우리의 태도는 어때야 하는지를 아론을 통해서 보게 된다. 

6. 아론은 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것을 진심으로 신뢰했고, 또 그런 모습을 계속해서 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아론은 자신이 직접 듣지 못했더라도 모세가 말하는 것이라면 신뢰했고, 또 순종했다. 아마도 어릴 때 부터 봐왔던 모세의 모습이 아니라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 되어 버린 변화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7. 내가 직접 듣지 못해도 우리는 순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려면 그 사람에 대한 신뢰, 즉 그 사람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또한 그 사람의 인격이 성령 안에서 열매 맺는 것을 볼 때에만 가능하다. 인격도 개 차반, 단 한 번도 주님과의 교제가 없는 사람의 말을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8. 목사로 선교사로 살아가는 나에게는 때로 하나님께서 지금 하고 계신 말씀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설교를 통해, 대화를 통해 말해야 할 때가 있다. 나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기 위해 나의 욕망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그와 동시에 나의 삶이 말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 분 안에 있음이, 십자가의 능력으로 인해 내 삶이 부족하더라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이 보여져야지만 내 설교에, 내 말에 신뢰가 생기게 될 것이다. 오늘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하며,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9. 아론이 보았던 모세와 같이 내 삶에 그리스도의 흔적이 남아 있길 원한다. 내 혈기대로 말하고, 혈기대로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신 것 처럼 그렇게 내 삶에 조금이라도 그 분의 흔적이 남길 원한다. 모세와 같이 말로 말하는 자가 아니라 삶으로 말하는 자가 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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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5. 3. 25.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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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 3:40-51 숫자에 빠지면 영혼을 잃어버린다.

1. 모든 물건이 만든 자에게 소유권이 귀속됨과 같이 우리 모두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특별히 레위인들에게 맏아들의 지위를 주셨다. 그들이 제사장의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 원래라면 지파와 상관없이 맏아들 모두는 하나님의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레위인들을 그 맏아들의 역할을 하게 하고, 다른 지파들은 그 혜택을 보게 하셨다. "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가족 중 모든 처음 태어난 것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내게 돌리라" (41절).

3. 레위인들이 맏아들의 역할로 하나님의 전에서 섬기는 대신 다른 지파의 맏아들들은 다른 역할을 맡아서 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인들의 숫자보다 이스라엘의 맏아들들이 더 많기에 그 넘어가는 숫자에 대해서는 돈으로 대가를 치루게 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태어난 자가 레위인보다 이백칠심삼 명이 더 많은즉 속전으로 한 사람에 다섯 세겔씩 받되 성소의 세겔로 받으라 한 세겔은 이십 게라니라" (46-47절).

4. 전체 인구에 비하면 맏아들 273명은 그리 많은 숫자가 아닌것 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숫자를 정확하게 셈하시고, 정확하게 속전을 하도록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것 하나도 퉁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5. 때로 숫자는 우리로 하여금 그 숫자 이면의 것들을 보지 못하게 한다. 273명이라고 하면 전체에 비하면 별거 아닌 것 처럼 느껴지고 그 정도면 대충 처리해도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273명에게는 각각의 인생과 스토리, 삶이 있으며, 숫자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대할 때에만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게 된다.

6. 사람을 숫자로 대해서는 안된다. 그 숫자가 2-3명이든, 10명이든 간에 사람을 숫자로 볼 때에 함정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심과 같이 우리도 숫자가 아니라 한 영혼, 한 영혼에게 집중해야 한다. 그 어느 누구도 예외가 되어서는 안된다. 

7. 때로는 숫자나 통계의 함정에 빠질 때가 있다. 교회의 행사 중에 대부분이 참석하는데 한 두 명이 못 나오면 대부분이 참석한 것에 내 마음이 뿌듯하고 감사할 때가 있다. 행사 사진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더 그럴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 숫자에 현혹되지 말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 숫자 넘어의 한 영혼, 한 사람에게 집중하고 찾아가고 마음을 나누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8.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다. 요 4장을 보면 그 바쁜 공생애 중에도 사마리아로 의도적으로 가셔서 한 여인을 만나셨다. 나사로의 집으로 방문하셔서 마리아와 마르다를 만나셨다. 예수님은 사람을 숫자로 본 것이 아니라 한 영혼으로 보셨기 때문이다. 나는 한 영혼으로 사람을 대하고 있는가? 혹시 그들을 숫자로 대하고 있진 않은가?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으로 대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건 아닌가?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의 글귀가 떠오른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9. 그 한 사람의 일생을, 그 한 사람의 영혼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역자가 되기 원한다. 사람을 숫자로 보는 어리석음이 나의 삶에서 사라지기 원한다. 모든 장자들을 위해 돈까지 지불하라고 하셨던 민수기의 하나님, 그리고 한 영혼을 위해 이 땅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기억하며 나도 그렇게 살아가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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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5. 3. 25.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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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 2:1-34 내 삶의 중심, 오직 예수

1. 오늘 본문 같은 본문은 묵상하기가 참 어렵다. 그림으로 그리면 명확해 보이는데 그것을 글로 설명하니 읽어도 눈에 쏙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은 진 편성 및 행군 순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전쟁을 할지도 모르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명령이니 더 나와는 상관없이 느껴진다. 

2.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대략 이러하다. 이스라엘의 진은 레위인의 성막을 중심에 두고 각 방향마다 세 지파씩을 위치시킨다. 본문의 순서에 따르면 동쪽은 유다, 잇사갈, 스불론, 남쪽은 르우벤, 시므온, 갓, 그리고 가운데 레위 지파의 성막이 위치하고, 서쪽에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북쪽에는 단, 아셀, 납달리 지파를 위치시킨다.

3. 이 진에서 가장 중심은 위치적으로나 기능적으로 바로 성막이다.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 바로  그 자리가 가장 중심이다. 그런데 이 진이 의미하는 것은 다른게 아니라 전쟁시 싸우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그 중심에 전쟁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할 것 같은 성막이 위치하다니 좀 의아하게 느껴진다. 

4. 그런데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정체성이자, 이스라엘의 방향성이다. 컨트롤 타워는 어느 지파가 맡는 것이 아니라 성막에 임재하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로 순종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하는 것 같은 그 성막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바로 그 자리라는 것이다. 

5. 이것은 이스라엘 만의 정체성이 아니라 바로 나의 정체성이어야 한다. 내가 원하는데로, 내가 하고 싶은데로 살아가는 것이 나의 정체성이서는 안된다. 내 삶의 중심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하나님께서 가라하시면 가고, 서라 하시면 서는게 내가 해야 할 일이다. 

6. 그리고 승부는 세상의 관점에서 봤을 때 유리해 보이는 그 어떤 것, 예를 들면 병력이나 말의 숫자에 달린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한다. 재력이나 실력 등이 승부를 가르는 것이 아니다. 이기고 지는 것은 오직 이 세상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한다. 

7. 재력이나 실력을 쌓아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야만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또 삶의 전반적인 태도 속에서 내가 의지하는 것이 재력이나 실력이 되어서는 안되고, 오직 하나님이어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8. 오늘 내 삶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는가? 내 자아인가? 아니면 하나님이신가? 나는 무엇을 의지하는가? 세상적인 기준에서 강해보이고, 좋아보이는 재력과 실력인가? 아니면 오직 나에게 승리를 주실수 있는 하나님 한 분인가? 집을 구하면서 답답함을 느낀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집과 위로의 처소를 말씀하셨는데 뭔가 지지부진하다. 브로커는 연락을 해도 답이 없다. 그러니 자꾸 처음 주신 마음을 놓고 싶고, 내 마음대로 결정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인간적인 방법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여전히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들을 기대하며 그 분을 의지하는 것이다. 혹 내 기대와 다르더라도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여전히 그 분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9. 대학교 때 부터 많이 들었던 김명식의 '오직예수'라는 찬양이 계속 맘에 멤돈다. 내 삶이 오직 예수만을 의지하게 되기를… 주님이 주신 마음을 굳게 붙들고 재력이나 실력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예수만 의지하는 하루가 되기를 결정한다. 

10. 오늘도 샬롬

https://youtu.be/aH28jaCoPe8?si=iVf7nBkFPb1n60N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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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5. 3. 18.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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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 1:47-54 원 팀, 한 선교 공동체

1. 민수기 1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숫자를 계수하고 있다. 백성들의 숫자를 계수하는 이유는 표제를 보면 '싸움에 나갈 만한 자를 계수'하기 위해서이다. 성인 남자의 숫자가 곧 병사의 숫자였고, 그것이 그들이 힘이었다. 이스라엘은 총 12지파 중에 오늘 본문은 레위 지파에 관해서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레위인은 숫자를 세지 말라고 하신다. "이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레위 지파만은 계수하지 말며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계수 중에 넣지 말고" (48-49절) 

2.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레위인은 싸움에 나갈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12지파 중에 레위 지파가 빠지면 한 지파의 숫자만큼이 병사의 숫자에 포함되지 않고, 이는 1/12만큼의 손해이다. 이렇게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레위자손을 계수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에게는 다른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3. 그것은 성막에 대한 책임이다. "그들에게 증거의 성막과 그 모든 기구와 그 모든 부속품을 관리하게 하라 그들은 그 성막과 그 모든 기구를 운반하며 거기서 봉사하며 성막 주이에 진을 칠지며" (50절). 53절 후반부는 이렇게 말씀한다. "…레위인은 증거의 성막에 대한 책임을 지킬지니라 하셨음이라"

4. 1/12의 병력 손실을 볼지라도 그들은 반드시 해야할 일이 있었기에, 그리고 그 일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장막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이것이 엄청나게 특별하고 중요하며 다른 일들과 구별되는 일이고,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기 보다는 (결코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된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레위인들을 계수하지 않으면서까지 그 일을 맡기셨다. 

5. 하나님께서 레위인들을 장막을 위해 구별하신 것은 맞다. 그러나 그 일이 레위인들만이 할 수 있다거나, 그렇기 때문에 레위인들이 다른 이들보다 낫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그저 그들에게 맡겨주신 일이고, 그렇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충성인 것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전 4:2)

6. 그것이 무슨 일이든지 관계없이 나에게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이라면 우리는 충성해야 한다. 조금도 우월의식을 가지거나 열등감을 가져서도 안된다. 나에게 주신 구역 안에서 나에게 맡기신 일을 충성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질 것이다. 사역을 맡겨주신 자는 사역하는대로, 일을 맡겨주신 자는 일하는데로 충성할 뿐이다. 

7. 어느 것이 우월하고 혹은 어느 것이 열등하고를 고민하지 말고, 맡겨주신 것에 최선을 다하고 책임을 지켜야만 한다 (53절). 왜냐하면 내게 맡기신 것이 하나님의 베스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위인은 혼자서는 결코 생존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다른 지파들이 자신들의 십일조를 통해 레위인들을 부양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법칙은 내가 벌어서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책임지며, 공동의 목표를 위해 책임을 달리 지는 것이다.

8. 선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가정과 같이 필드에서 직접 사역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선교사들과 사역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있고, 또 재정적으로 서포트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주님께 받을 상급은 다르지 않다. 필드에 있다고 더 받거나, 후원했다고 덜 받는게 아니다. 이는 축구팀이 우승을 하면 스트라이커도, 수비도, 후보도 다 같이 우승컵을 드는 것과 동일한 이치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한 팀이고, 한 몸이고, 한 선교 공동체임을 이해하고 함께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같이 달음질 하는 것이다. 

9. 어느 자리로 부르심을 받았든지 간에 한 팀으로 함께 달음질 하길 원한다. 특별히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그 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 함께 달음질 할 수 있음에 참 감사하다. 그리고 그 길을 함께 끝까지 완주하여 그 길 끝에서 기다리시는 주님으로부터 함께 칭찬받기 원한다.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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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5. 3. 14.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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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21:1-14 예수님과의 식탁교제

1. 예수님께서 또 다시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1-2절)

2. 이미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 누구도 예수님이신 줄을 알아보지 못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인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4절)

3. 늘 이 부분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왜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그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동거동락했던 사이가 아니었는가? 예수님의 모습이 달라지기라도 했는가? 성경은 그에 대한 힌트를 주지 않는다. 다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못 알아본 것은 단지 이 본문만이 아니라 다른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4. 제자들이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못했던 예수님께서는 물고기를 밤새 잡지 못하던 전문가 어부들인 제자들에게 조언을 하신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6절 상반부) 그랬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잡혔다 (6절 하반부).

5. 그런데 물고기를 많이 잡고 나니 그제서야 제자들은 그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7절 상반부). 부활하신 주님을 이미 만났지만 알아보지 못하고, 평생 물고기를 잡았지만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이해되지 않는 일 투성이의 하루의 끝에 그제서야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 이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었다.

6. 예수님께서 우리의 상황 가운데 늘 동행하고, 함께 하시지만 우리는 잘 알아보지 못한다. 때로는 돕는 손길로, 때로는 보호하는 손길로 늘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우리는 알아보지 못한다. 오히려 그 주님을 외면하고, 멀리하고, 그러면서도 뭔가 내 뜻대로 잘 안풀리면 주님을 원망하기 시작한다. 내가 신경도 쓰지 않았고 알아보지도 못했던 그 주님을 말이다.

7. 물고기 잡는 일에 전문가였던 제자들처럼 우리 또한 내가 전문가인 것 처럼, 내가 이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처럼 하기 시작한다. 밤새 애쓴다. 아무런 성과가 없다. 그러면 또 주님을 원망한다. 그러다가 주님의 은혜로 그 일이 해결되고 나면 그제서야 항상 내 옆에 계시며, 나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알아보기 시작한다. 이것이 제자들이었고, 나의 모습이다.

8.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을(또 그런 나를) 꾸짖지 않으셨다. 오히려 함께 식사를 하자고 초청 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12절 상반부)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3절)" 예수님은 우리를 예수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식탁으로 초청하셔서 함께 식사를 나누신다. 꾸짖지도 나무라지도 않으신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충만한 이 자리가 바로 이 아버지의 품이요 아버지의 집이다.

9. 방콕에 다시 돌아가서 살 집을 계속 구하고 있는 중이다. 적당한 집을 찾으면서 고민이 많다. 가장 힘든 문제는 재정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 가정의 집이 계속 아버지 품, 아버지 집의 역할을 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우리 가정은 계속 집을 오픈하며 성도들을 식탁으로 초청하여 먹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다. 집이 단순한 우리 가정이 거주만 하는 공간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가족됨을 누리고, 태국의 믿음의 형제, 자매들에게 사랑을 나누고, 또 믿음이 없고 연약한 자들을 세워가는 장소로 사용해왔다. 그래서 좀 넓은 집을 구하고 싶었는데, 언제나 렌트비가 문제이다. 그 렌트비 앞에서 자꾸만 타협하려고 하게 된다.

10. 예수님께서 알아보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제자들을 불러서 먹이시고, 그 식탁을 통해 위로하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 가정이 거주할 공간이 이런 아버지의 품, 아버지의 집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재정이 문제가 아니다. 아버지의 집을 세워가려는 마음이 문제이다. 그 마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소망하는 집을 하나님께서 하락하시길, 또 필요한 재정을 채워주시길 함께 기도해주시길 부탁드린다.

11.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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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5. 3. 13.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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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20:24-31 손가락을 그 성흔에 넣을 기회를 버릴 만큼 강렬한 만남

1.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함께 있지 않았다 (24절).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믿을 수 없었고, 그는 체험을 하면 믿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5절).

2. 도마의 이야기는 이해가 먼저되어야 믿음이 따라온다고 말하는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과 유사하다. 하나님과 성경을 이해하려고 하는 시도와 노력은 너무나도 멋진 것이다. 이해없이 그저 강요로 믿으라고만 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3. 그러나, 그런 도마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신다. 그 분은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과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닫힌 문 속에 나타나셔서 샬롬을 말씀하신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6절)

4. 그리고 도마에게 체험을 통해 이해할 수 있도록 초청하신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7절) 예수님의 초청은 매우 친절했다. 도마가 제자들에게 했던 말을 아시고, 그 말 그대로 해보라고 초청하신 것이다.

5. 도마에게는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지금 닫힌 문들 사이로 나타나신 그 분, 이미 열하루 전에 돌아가셨고, 여드레 전에 부활하신 그 분이 지금 내 앞에 서 계시고, 나의 믿음의 고민들을 아시고 그것을 확인해보고 나서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6. 그런데 도마는 그 손의 못 자국에, 옆구리의 창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보지 않았다. 혼돈과 카오스 중에 있는 그에게 샬롬을 주시는 분을 만났기 때문이다. 죽으셨지만 지금 부활하여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하고 나니 이성적인 고민과 이해되지 않는 모든 것들이 그 즉시로 해결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손가락을 넣어볼 기회를 거절한 것이다.

7. 이성과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은 매우 아름답다. 그 자체로도 매우 중요하다. 특별히 믿음을 강조하는 기존의 교회 분위기는 이성을 억압하였고, 무조건 '믿습니다' 만이 바른 믿음의 자세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의심은 믿음과 반대되는 감정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지성과 이성으로 탐구하고 알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일이다.

8.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방법은 기질과 성품에 따라 모든 사람이 다 다른 방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은 주로 묵상을 통해서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섬세하게 나에게 말씀하시는 그 분을 만난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예배이고, 어떤 사람은 기도이며,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드라마를 보는 것일 수도 있다. 수 많은 다른 방법들이 있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기독교에 대한 지적으로 탐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지적인 방법을 넘어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각 개인의 고유한 방법이 있어야만 우리는 손을 넣어볼 기회를 거절할 수도 있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믿는 자가 될 수 있다.

9. 도마는 아마도 그 이후 단 한 번도 '아, 그 때 손을 넣어볼걸' 이라며 후회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순교하기 까지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 분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잊을 수 없는 그 시간이 손을 넣어보는 경험보다도 더 강렬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바로 그 경험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10. 나는 오늘 그 경험을 하고 있는가? 단순히 이해되지 않고, 믿어지지 않는 차원이 아니라 손가락을 넣어볼 수도 있는 그 기회를 버릴 만큼의 강렬한 예수님과의 만남과 사귐이 있는가? 그런 만남이 있는 오늘 하루가 되기 원한다.

11.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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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