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9:1-13
오늘 본문을 보면서 ‘다윗은 어떻게 이렇게 너그러울 수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수립 후 정말 잘 나가고 있었다. 어제 본문을 보면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라고 두 번이나 기록하고 있다. 그렇게 잘 나가는 다윗인데 이제 친구 요나단과의 우정을 기억하며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을 찾는다. 정적을 제거하기 위함이 아니라 은총을 베풀기 위함이다 (1절). 다윗의 이러한 너그러움은 어디서 오는가? 이 역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는 나오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 때에 비로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것도 너그럽게 샬롬을 지켜낼 수 있다. 정치적인 눈으로 사울의 자손들을 보지 않아다.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의 관점으로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보았다. 아주 파격적인 결정이었고,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결정이었다. 그런데 다윗은 해냈다. 그는 알았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모든 것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선과 호의를 베풀고, 너그럽게 대할 수 있었다. 세상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세상의 정략적인 방법을 취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로 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정말로 두려움의 소리를 들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의 소리를 들은 사람이었다.
므비보셋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역적의 자손에서 왕자의 대우를 받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Amazing grace’일 것이다. 받을 수 없는 사랑을 받는 자가 되었다. 이제는 왕의 식탁에서 함께 먹는 자가 되었다. 므비보셋의 인생을 살펴보면 그는 다리를 저는 것 때문에 전쟁에 나가지 못했다 (아마도 사람 구실도 못한다고 많은 비판을 받았으리라). 하지만 결국 그는 그 몸의 장애 때문에 은혜를 누리게 된다. 이러한 므비보셋을 잘 보니 우리의 인생과 동일한 인물같이 보인다. 우리 역시 죄의 자손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주님이 주시는 전적인 은혜로 우리는 결국 자녀가 된 것이다. 이 은혜를 잊지 말자. 서두에 다윗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세웠다고 했는데, 아마도 다윗의 눈에는 자신과 므비보셋이 하나님 앞에서는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자신도 하찮은 목동의 막내아들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음을 앞에서 고백하지 않았던가? 은혜를 잊지 않는 겸손한 자가 되자.
잠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1. 내 삶에서 교만한 부분을 돌아보자. 특별히 큰 아들 예준이와의 관계에서 내가 아빠라는 위치에 있는 것으로 아이를 누르려고 하는 것이 있는데, 회개하고 사과하자.
2. 너그러움은 결국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에서 나온다. 나는 정말 누구인가? 겸손한 마음을 가지자.
3. 겸손함의 표현은 기도이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주님께 아뢰고 주님이 도우시길 간구하는 것... 오늘은 좀 더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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