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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라이로 결혼식을 금요일, 토요일에 다녀왔습니다. 너무 좋은 시간이었고, 운전을 왕복 약 20시간 정도하며 다녀왔습니다. 말씀묵상을 여행의 일정 속에서 쉬었습니다. 이게 한 번 쉬니까 계속 쉬게 되는 관성의 법칙으로 어제도 역시 쉬었습니다. 오늘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앉았습니다. 좋은 습관을 세우는건 어렵지만 그것을 허무는 것은 매우 쉬운 일임을 깨닫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말씀을 나눌 수 있음에 참 감사합니다. 샬롬
왕상 17:8-24 절망은 내가 주인이 되려고 하는 시점에서 찾아오지만, 소망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과부를 보고 있으면 꼭 나의 모습과 같아 보인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서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12절)) 이제 이걸로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겠다고 엘리야에게 말했다. 정말 그는 죽을 수 밖에 없을 것 같아 보인다. 더 이상 먹을 것이 없고, 먹을 것이 나올 곳도 없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하나님의 사람 엘리아를 만나서 자신의 모든 것으로 떡을 만들어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에게 대접하라는 엘리야의 말에 순종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렸고, 결국 통의 가루와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 기적을 맛 보았다 (16절). 그런데 아들이 병들어 갑자기 죽게 되었다 (17절). 그러자 엘리야를 원망하기 시작한다. 엘리야에 대한 원망이었지만 또한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었다. 어차피 죽으려고 했었지 않은가? 죽을걸 살려줬는데, 굶어 죽은게 아니라 병들어 죽었으니 그게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되는가? 그런데 그렇게 되더라… 하나님이 늘 좋은 것,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바라는 것들을 주시지 않으면 그게 원망이 되고 상한 마음이 되더라. 그런 원망 가운데 엘리야가 기도를 통해 아이를 살린다. 과부의 고백이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에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을 때에는 몰랐단 말인가? 보고도 몰랐고, 먹어도 몰랐단 말인가? 그런데 정말 몰랐다.
한 번 말씀 따라 크게 순종도 해봤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놀라운 이적도 맛보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 말씀이 어떠한 것인지 잘 모르고 내가 원하는 것만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원하는 시점, 내가 원하는 방법이 머리 속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전에 엘리야에게 순종할 때에는 이미 하나님이 그 순종의 댓가로 어떤 것을 주실지 미리 말씀하셨고 그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원망할 필요가 없었지만, 아들의 죽음은 아무런 약속도 기약도 없는 자신의 힘으로 컨트롤 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 삶도 그렇다. 매일 만나를 먹고 있고, 매달 은혜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지금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여전히 원망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지 못하고 있다.
나의 무력함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다. 여전히 내게 힘이 남아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의 방법들이 있고, 포기할 수 있는 것들이 남아 있을 때 만난 하나님은 자꾸 잊어버리게 된다. 마지막 까지 가서야 이제야.. 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자꾸만 그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앉으려 하기 때문이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고 싶은 유혹이 결국 관계를 그르친다.
요즈음 하루에도 몇 번씩 절망과 소망의 롤러 코스터를 타고 있다. 아빠가 선교사로 나오는 바람에 더 예민하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 둘째 요엘이 때문이다. 내 머리 속에 기대가 여전히 있다. 내가 이렇게 하면, 내가 좀 더 양보하면, 내가 좀 더 사랑해주면, 내가 좀 더, 좀 더, 좀 더.. 내가. 내가. 내가… 이렇게 하면 아이가 이렇게 좋아질 거라는 그 마음 속에서 서 있기 때문이다. 예준이의 힘든 시간에 붙잡아 주신 것처럼 요엘이도 그렇게 해주실 것을 믿으며 보고 있는데, 자꾸만 내가 기간을 정한다. 시간을 정하고, 상황을 정해서 이정도면 달라져야지… 이정도면 좋아져야지.. 이정도면 바뀌겠지? 사르밧의 과부처럼 여전히 나의 옵션과 나의 생각을 의지하고 있다. 내가 정한 시간 안에서 조금 좋은 것 같으면 기분이 좋다가도 그렇지 않으면 못 견디고 화가 솟아 오르는 것을 느낀다.
아빠로써의 자격 미달이고, 사랑을 주는 자로써의 자격 미달이다. 아내는 좀 더 긴 시간을 바라보고 아이를 대하는데, 나는 너무나도 나 중심적이고, 근시안적이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결국은 내가 행하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러니 오늘 과부를 보니 꼭 나의 모습과 같아 보인다. 사랑의 물탱크에 물이 차서 넘칠 때 까지 충분히 부어 주는 아빠가 되고 싶다. 내가 정한 시간, 내가 정한 한계로 아이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모습이 아니라 충분히 기다려주고, 충분히 참아주고, 충분히 사랑해주는 아빠가 되기 원한다. 이미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충분히 맛보기 때문에 기다려줄 수 있는 부모가 되고 싶다. 내가 하나님이 되려고 조급함을 쫓아 움직이지 않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절망은 내가 주인이 되려고 하는 시점에서만 찾아오지만 소망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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