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2. 19. 09:28
728x90
반응형
왕상 18:16-29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문제

성경 본문 중 가장 재미있는 본문 중 한 부분으로 생각된다. 응답할 수 없는 바알이라는 가짜 신 앞에서 하루종일 펼쳐지는 퍼포먼스를 생각하면 실소아니 썩소가 아니 나올 수 없다. 바알은 응답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응답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가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짜가 아닌 가짜 앞에서 하는 행동들은 모두 우리를 웃기는 꼴로 만들게 된다. 아무 응답이 없는 것이 정상이다. 몸을 상하게 하고, 피가 흐르게 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는게 정상이다. 상식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21절에서 나오는 엘리야의 도발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에 그들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는다.

아마도 일 대 사백오십이란 숫자의 압박 때문이었을까? 다수결이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따라간다고 해서 그 길이 진리라는 보장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따라가는 길이 아니라 진리를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머뭇거린다. 여전히 누가 진짜 하나님인지 테스트 하고 그 이후에나 믿겠다는(사실 믿지 않을 가능성이 더 많지만..) 태도로 보인다. 나는 무엇을 따라가고 있는가? 진리인가? 다수인가? 

내가 가장 자주 흔들리는 것은 이 다수들이 보여주는 결과 때문이다. '다들 이렇게 하는데 뭐…’ 무슨 말인가? 다들 이렇게 하니까 나도 이렇게 하는 것이 괜찮을 것이라고 합리화 시키는 것이다. 여전히 진리를 쫓기 보다는 다수결, 혹은 다자가 쫓아가는 길이 옳아 보이고, 괜찮아 보이는 타협의 접점을 찾고 있는 것이 나의 신앙이다. 이러한 나의 모습들이 바알 앞에서 하루종일 응답을 구하며 춤추고 노래하고 그들의 신을 부르는 바알의 선지자들의 모습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머뭇머뭇하면 안된다. 하나님을 쫓아야 한다. 사람들의 평판이나 다른 사람들이 쫓고 있는 가치들이 아니라 하나님만 쫓아야 한다. 일 대 사백오십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주를 부인한다고 해도 나는 주님을 쫓아야 하는 것이다.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진리의 문제이다. 가짜 앞에서 쇼를 하며 살 것인가? 진짜 앞에서 예배를 드리며 살 것인가? 

태국 땅에는 이 가짜 앞에서 쇼를 하는 사람들이 무려 99.5%가 넘는다. 1%가 기독교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인구 센서스 상에는 0.5% 정도이고 이 안에는 카톨릭과 기독교 이단들도 포함이다. 이 곳에서 내가 진짜 하나님을 만나고 진짜 하나님을 그들에게 보여줘서 거의 1:100의 싸움을 해야 하는 곳이다. 1:100이면 어떤가? 진짜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는데, 내가 하는 것은 쇼가 아니라 예배인데 무엇인 두려운가? 지금 주태한인선교사 수련회 기간이다. 이 99.5%의 영혼들을 위해 함께 땀흘리고 수고하시는 분들과 함께 모임을 하고 있다. 더 깊은 교제와 동역을 통해서 진짜 하나님을 태국 땅에 어떻게 전할지를 더 고민하고 묵상하는 시간들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내가 진짜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복음에 합당한 훈육을 하기 원한다. 아이들이 예민해지면 예민해질수록 나도 덩달아 예민해진다. 복음적인 가치관 때문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혜를 주면 안된다는 마음, 그리고 그 안에는 우리 아이들이 이 정도라는 과시하고 싶은 마음의 동기가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더 아이들을 통제하려고 하고 더 예민하게 행동한다. 그런데 아빠의 가짜의 마음은 아이들을 더 힘들게 더 멍들게 한다. 계속해서 머뭇머뭇 하지 말고, 진짜 하나님 앞으로만,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길은 복음으로만 내 삶이 더욱 더 변화되기 원한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