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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1:17-27 제한하지 않아야 쓰임받게 된다

1. 지금도 그렇지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사는 일은 흔한 일은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있는 공감대는 사람이 죽으면 끝이고,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2. 나사로가 죽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나가 맞이하지만 오빠가 죽은 슬픔을 예수님께 투영한다 (20-21절). 마르다는 예수님이 더 빨리 오셨더라면, 즉 오빠 나사로가 죽기 전에 오셨더라면 그 병을 고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예수께 말한다.

3.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충분이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미 많은 병자들을 고치는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4. 하지만 오늘 마르다는 예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그 분께서 단순히 병을 고치는 정도의 분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예수께서 23절에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라고 말하셔도 믿지 못한다. 믿지 못하는게 아니라 못 믿는게 당연한 일이다.

5. 하지만 25절에서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의 권위에 마르다는 압도된다. 그래서 그녀는 이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된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6.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자기가 이해하는 수준으로 하나님을 끌어내리는 것을 늘 조심해야 한다. 기도를 하면서도 내가 미리 가지치기를 한다거나 이러한 일은 안될거야라고 내가 미리 선수치고 있지는 않은가? 

7. 선교지에서는 아픈 자를 위해 기도해야 할 일이 많다. 그런데 나는 머리 속에 ‘나는 치유의 은사가 없어’라고 생각하며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을 나의 은사 정도로 제한시켜서 작게 보는 모습인 것이다. 말씀을 전하거나 사역을 하면서도 내가 스스로 가지치기를 하거나 제한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8.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작은 분이 아니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25-26절) 하나님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흔하지 않다고 해서 그것을 못하시는 분이 아니다. 

9. 결국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나의 생각과 태도의 문제이다. 하나님을 내 생각에 가두어서 작게 볼 것인가? 아니면 위대하신 하나님을 하나님 그 자체로 볼 것인가? 그 분을 제한할 것인가? 아니면 그 분의 능력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 내 생각, 내 머리로 제한하지 말고 오직 그 분께 쓰임받는 인생이 되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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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