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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1:13-26 믿음을 따라 죽은 믿음의 영웅들을 따라가기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13절에서는 어제 본문에서 나왔던 믿음의 용사들이 다 믿음을 따라 죽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다고 말하고 있다.
믿음이라는 것은 정말 ‘인내’인 것 같다. 그저께 묵상했던 것처럼 믿음으로 사는 삶은 주님의 말씀에 복종하며, 그 자리에 굳게 서 있는 삶인 것 같다. 내 눈 앞에서 뭔가 이루어지고, 성취되는 것들이 지금 당장 보이지 않더라도 우직하게 그 자리에서 서 있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삶이다. 즉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그 믿음으로 지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그 자리에 굳게 서 있을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
아브라함도 후손이 하늘에 별들과 같이 많게 될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약속을 믿었을 뿐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자녀 이삭을 바칠 수 있었다. 요셉은 어떠한가? 그의 유골이라도 애굽을 벗어나길 소망했고, 하나님께서 주실 약속의 땅에 대한 약속을 가지고 죽지 않았는가? 모세는 어떠했는가? 세계 최강대국의 왕자의 삶이 아니라 노예인 히브리인으로의 삶을 선택하고, 함께 고난 받기를 믿음으로 선택하지 않았는가?
이렇듯 믿음의 삶이란 때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답답함과 고통을 넘어, 지금 당장 성취되지 않는 하나님으로 부터 온 약속을 붙들고 지금의 삶을 묵묵히 살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더 나은 본향 (16절)을 사모하며 살게 된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이미 임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가 내 삶에 이루어지며, 장차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된다. 믿음을 따른 사람들의 특징은 조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믿음이 사라지면 그 곳에는 우리의 조급함에서 나온 염려와 근심들만 남는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굳게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 나는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 참 어려운 질문이다. 보이지 아니하는 믿음 보다는 뭔가 눈에 보이는 것, 일들, 사람들을 자꾸만 신뢰하려는 나를 보게 된다. 기다리는게 너무 싫고, 기다리고 싶지 않아서이다. 약속은 주셨는데, 약속의 끝은 너무 멀어보이고, 지금의 상황은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저 하나님만 붙들기를 원한다. 답답해도, 막막해도, 주님만...
그런데 주님만을 붙들 힘은 나에게 없다. 내가 무슨 수로? 주님이 나를 붙잡아 주셔야만 한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기다릴 수 있지 않은가?
말씀을 더 가까이 하며, 기도하기 원한다. 나의 염려와 근심을 예배하지 않고 주님만 예배하기 원한다.
주님께서 나를 붙잡아 주시길 간절히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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