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19.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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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7:40-51 묻는 은혜, 동행하는 은혜

어느 순간 묵상을 하면서 '~을 위하여'라는 단어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 삶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한다는 그 헛된 포장이 많아서 그렇게 느껴졌나 보다. 오늘 솔로몬은 드디어 성전 기구들을 죄다 완성해서 옮겼다. 다 좋았는데, 51절을 읽는데 이 단어가 못내 마음이 불편했다.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솔로몬은 이 성전의 모든 내용들을 여호와를 위해 만든 것이 아니었고, 성전을 위해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성전의 설계와 내용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성막은 모세에게 어떻게 만들라고 하나님이 모조리 지시하셨고, 모세는 거기에 순종했지만, 성전은 하나님이 어떤 것도 말씀하시지 않았다. 솔로몬의 지혜대로, 솔로몬의 생각대로 만들어져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하나님을 위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성전을 위한 것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이 불편함… 하지만 많은 순간 내 삶도 ‘주를 위해’라는 타이틀을 걸어놓고, 내 맘대로 하고 있는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성전 지으시는데 간섭하지 않으셨을까? 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을까? 주신 그 지혜 안에서 알아서 하라는 자유의지의 표현일까? 여러가지 생각이 들지만 처음으로 돌아가면 솔로몬이 하나님께 묻지 않았던 것 같다. 다윗의 인생은 묻는 은혜가 있었다. 솔로몬의 인생은 묻는 은혜가 없다. 묻지 않고 자의적으로 한다. 자의적으로 하니 ‘하나님으로 인해, 하나님과 함께’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위해’라고 표현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 물어야, 여쭤보고 들어야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걸어갈 수 있다. 학생 때 가장 싫어했던 표현이 하나 있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공부한다’라는 표현이었다. 이것만큼 내 중심적인 표현이 어디에 있는가? 내가 무엇이길래 주님의 영광이 나한테 달려 있는가? 우리는 그 분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없어도 충분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함께 공부한다’가 더 적절해 보인다. 

오늘도 내 삶에 무엇인가를 ‘하나님을 위해’ 한다는 잘못된 비복음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영역이 없는가? 나는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존재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망각하지 말자. 은혜로 구원받았고, 내가 내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주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도 없고, 그런 생각도 버려야 한다. 내가 오늘 붙잡아야 할 것은 그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그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 하나님께 묻는 것이다. 묻는 은혜가 오늘도 내 삶에 있기를 원한다. 

하나님께 물어야 산다. 물어야 듣는다. 물어야 순종한다. 어떤 모양, 어떤 모습으로 섬길 수 있을지 물어야 한다. 오늘도 묻는 은혜, 함께하는 은혜가 충만하게 내 삶에서 나타나기 원한다. 제발 좀 묻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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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