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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8:22-32 그들의 하나님(타자의 하나님)을 만나자.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하며 하나님께 기도 드린 것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을 지켜달라는 것과
- 자신의 기도와 간구를 들어 달라는 것
- 그리고 악은 심판하시고, 의로운 행위에 대해서는 갚아 달라는 것이었다.
근데 이 세 문장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우리(이스라엘) 좀 잘 되게 해주세요’라고 요약이 된다고 본다. 내 후손들 잘 되게 해주시고, 우리 백성들이 기도할 때 들어주시고, 혹시 잘하는 것 있으면 갚아주세요 라는 것이다. 솔로몬은 여전히 하늘도 용납하지 못하는 하나님을(27절)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으로 생각하고 제한해서 생각하고 있다. 솔로몬에게 그것이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여전히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처럼 말이다.
많은 순간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그들의 하나님으로 보기 보다는 ‘우리의 하나님’으로 축소시켜 생각한다. 특히 한국 사람에게는 ‘우리’라는 단어는 좀 특별하다. 그래서 영어를 쓸 때도 가끔 틀리지 않는가? 나와 우리의 개념의 차이 때문에… 솔로몬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나의 삶에서도 하나님이 나만의 하나님 혹은 우리만의 하나님일 때가 매우 자주 있다.
우리 모두의 하나님으로, 또 그들의 하나님으로 보지 못하고 나만의 하나님으로만 보기 때문에 타인들의 아픔과 슬픔에 무관심하게 되고, 내가 얻을 것만을 간구한다. 내가 더 먹으면 다른 사람들은 못 먹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것만을 구했다. 함께 이 길을 걷기 보다는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나로 살아가려고 할 때도 많다. 내가 가장 우선이 되고, 내 가족이 가장 우선이 된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침해하면 ‘나의 하나님’께 그들의 잘못을 낱낱이 아뢴다. 진정한 ‘우리의 하나님, ‘그들의 하나님’이 내 삶에서 실종된 것은 아닌지? 오늘 솔로몬의 기도를 보며 회개하게 된다.
예수님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라고 하셨는데, 나는 나의 나라와 나의 의만 구하는 것 같다. 어찌할꼬.. 어찌할꼬… 언제쯤 ‘나 좀 잘 되게 해주세요’의 신앙에서 벗어나서 공동체와 우리를 볼 수 있을까? 답답하기만 하다. 언제쯤 ‘우리’의 개념이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더 넓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품을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넓혀 주셨다. 내 삶에서도 우리 가족들, 우리 형제들, 우리 교회, 우리… 가 아니라 그 지경이 선한 사마라이인까지 넓혀지기 원한다. 오늘은 묵상하는데 참으로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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