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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20:35-43 교제의 즐거움을 잃어버린 결과가 불순종이다.
아합왕은 벤하닷 왕을 놓아주었다. 아합을 이게게 하신 하나님께 묻지 않고 그가 원하는데로 조약을 맺고, 그를 놓아 주었다.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자신의 마음대로 처리한 왕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오늘의 본문이다. 좀 무리하다 싶은 본문이 등장한다. 선지자가 다른 친구에게 여호와의 말씀이니 자신을 치라 했는데, 치기 싫어하니 그 친구에게 사자가 너를 죽일것이라 하고, 그는 실제로 죽게 된다 (35-36절). 그리고 37절에 또 다른 친구에게 자신을 치라고 하니 그 친구가 선지라를 치되 상하도록 치게 된다 (37절).
이 말씀은 정말 단순하게 순종하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말씀에 치라고 하시면 치라는 것이다. 왕이 범한 죄는 40절에 보면 ‘네가 스스로 결정하였으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스스로 결정한 그 모든 것이 죄라고 말씀하신다. 치라고 하면 치고,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하는 것을 하나님은 요구하신 것이다. 스스로를 의지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일상에서 가장 많이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오늘 본문을 보며 드는 생각은 도대체 어떤 일은 물어야 하고 어떤 일은 묻지 않아야 할까? 분명히 우리에게 지성을 주셨고,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도대체 어느 일은 묻고, 어느 일은 묻지 않고 스스로 해도 되는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답을 제시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스텐리 하우어워스가 정의한 기독교 신앙이란 ‘정답이 없는 질문을 품고 사는 것’이라고 했고, 이 말에 깊은 동의를 한다. 어떤 기준이 있어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끊임 없이 묻고 듣고, 순종하는 삶을 그저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다. 단순한 순종이 가능하려면 충분한 관계가 먼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충분히 믿고 충분히 주님을 따라가는 자에게만 가능한 것이 단순한 순종이다.
아합왕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없었다. 그러니 자기 맘대로 결정하게 된다. 물을 이유도, 들을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어떠한가? 묻고 들을만큼 충분히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는가? 요엘이와의 관계 속에서도 동일한 것들을 느낀다. 나는 요엘이가 나의 말을 들어주길 바라지만, 내가 먼저 요엘이와 친밀하고, 깊은 관계를 맺어가고 있는가? 요엘이와 더 깊은 관계를 맺기 원한다. 그리고 하나님과도 더 깊은 관계를 맺기 원한다. 그 분과의 교제의 즐거움이 먼저 일어나서 순종은 자연스러운 일들이 되기 원한다. 요엘이와도 지금 훈육이 아니라 교제의 즐거움이 먼저 일어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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