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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21:11-29 너도 나도 은혜가 필요한 죄인이다.
이세벨의 계략대로 나봇은 결국 죽게 되고, 그의 포도밭은 아합이 차지하게 된다. 그 때에 하나님의 심판이 아합과 이세벨에게 임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27절부터는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27절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엘리야에게 말씀으로 임하셔서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을 돌로 때려 죽이도록 사주하고, 여태까지 지은 악이 얼마인데, 회개하니 돌아보십니까? 라는 불만이 내 안에서 터져나온다. 마치 니느웨 백성을 보는 요나의 마음이다. 쟤들이 과연 구원 받을 자격이 있는 자들입니까? 하나님 절대 마음을 돌이키지 마세요!! 라고 항변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은혜이고, 이것이 복음이다. 아합도, 이세벨도 복음이 필요하며, 그들이 돌이킬 때에 하나님은 언제나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으신다. 이것이 때로는 불편한 진실로 다가온다. 마치 내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에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 처럼 행동하기 시작한다. 나는 더 많은 죄와 악에서 용서 받았는데, 내 기준에 나보다 악해 보이는 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그런 마음이다. 그리고 그렇게 용서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내 알량한 의로 항변하고 있다.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이 은혜로 치뤄지는 것, 이것이 복음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어제와 다른 빛 가운데 살아내는 것이 복음이다. 아합과 내가 다른 점이 많이 없음에도 그는 악하고, 나는 선하다고 가르는 것이 비복음적인 태도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자신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자에게 하나님 한 분 외에 선한 이가 없다고 대답하셨다 (막 10:17-18). 그도 악하고, 나도 악하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악하여서 복음의 은혜가 필요한 자들이다. 내가 나봇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내가 아합이고, 내가 이세벨이기 때문에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도 심판을 연기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해야 한다.
요엘이와의 일에서 자꾸만 요엘이가 하는 행동에서 내가 참고, 내가 견딘다고 생각하는 태도도 바꿔야 한다. 요엘이의 현재 상황에 우리 부부가 관여한 것이 가장 크다. 우리로 인해 요엘이가 힘들어 하는 부분들이 분명히 많다. 나는 지금 선하고, 요엘이가 짜증부린다는 마음을 버리자. 나도, 요엘이도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일 뿐이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교만함을 내려놓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 앞으로 나아간다. 일희일비 하지 않고, 복음의 진리를 따라가는 오늘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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