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9:1-7 정의와 공의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동역자
갈릴리는 시골 촌동네였다. 뭐 하나 선한 것이 없었다. 요한복음에서도 나다나엘이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갈릴리가 영화롭게 될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 (1절) 굳이 구약의 이사야서에서 그 시골을 언급해야만 하는 이유는? 이 예언의 시점에서 아직 나타나지 않으신 바로 그 갈릴리 사람이라고 불리울 그 한 분 때문이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2절)
이 갈릴리 사람이 나타나면 일어날 일이다. 그 분은 빛으로 나타나신다. 빛으로 나타나셔서 그 분의 백성들을 흑암에서 사망의 그늘진 땅에서 구원하신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는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6절)
아기인데 단순한 아기가 아니다. 그를 하나님이라 평강의 왕이라 부른다. 하나님의 이름들이 그에게 있다. 곧 그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해서 오시기로 하신 것이다. 거룩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이 땅으로 오셔서 정의와 공의가 없던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세우실 것이다 (7절).
정말로 슈퍼 히어로가 오시는 것이다. 이 땅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슈퍼 히어로, 하나님께서 직접 오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 조차도 우리가 원해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결정하셨다. 그 분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 (7절). 하나님의 의지와 열심으로 이 일을 계획하셨고, 이 일을 실행하셨다. 우리가 할 일은 이 갈릴리 사람이라고 불리울 그 한 분, 하나님으로 이 땅에 이 계획을 실행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를 믿는 것이다.
이 구원계획에서 내가 하나도 더하고 뺄 수 없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계획하셨고, 그 분이 직접 나사렛으로 오셨고, 십자가를 지셨고, 그리고 부활하셨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분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다. 구원의 계획에 있어서는 하나도 더하고 뺄 수 없지만 그 분이 오심을 통해서 이 땅의 정의와 공의가 세워지는 부분에서, 그 분의 통치하심이 이 땅에 세워지는 부분에 있어서, 그 분께서 모든 문제의 해결자임을 전하는 부분에서는 우리의 삶이 참여할 수 있다.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전하면서 정의와 공의가 세워지도록 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단순히 영혼의 구원자 밖에 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이 땅의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시며, 결국에는 예수님으로 인해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게 될 것이다. 이 땅의 정의와 공의를 세워가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태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명령은 주어졌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을 아직 잘 모르겠다. 계속해서 더 연구하고, 더 찾아보면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이 땅에 흐를 수 있도록 나를 드릴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모든 문제의 해결자인 예수님을 영혼의 구원자로 축소시키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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