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20:1-6 누구를 위한 불편함인가?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구스든 애굽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결국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5절).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한 때, 강성해 보이고, 잘나가 보이는 그 어떠한 것들도 결국에는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이 세상이다. 우리의 생명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어리고 건강하고, 지금은 아무 문제 없지만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쇠하여지고, 약해질 때가 온다. 오늘 이사야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 옷과 신을 벗고 벗은 몸으로 다니라고 하신 이 말씀은 (2절) 결국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가짜들을(우상들을) 벗어 버리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지금 당장 우리를 보호해 줄 것 같고, 우리를 좀 더 멋져 보이는, 있어 보이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그 옷, 그 신발을 벗으란 것이다. 그것이 좋아보이는 것이든, 있어 보이는 것이든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벗으란 것이다. 사라져 버릴 것이고, 영원할 수 없는 그것을 버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닌 것은 다 벗어버리라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을 향한 징조와 예표였다 (3절).
어제는 무엇을 위한 불편함인지를 묵상했었다. 하지만 오늘 이사야 입장에서는 이 징조와 예표는 누구를 위한 불편함인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하나님이 벗으라 하셨다. 좋다. 벗고 다닌다. 그런데 누구를 위해 3년을 벗은 몸으로 다녀야만 하는가? 이 부끄러움과 불편함은 누구의 몫인가? 분명코 이 행동은 이사야 자신이 원해서 한 자신을 위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 부끄러움과 불편함의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었다. 하나님 때문에 불편한 행동을 할 수 있었고, 하나님 때문에 부끄러움을 견딜 수 있었다.
태국에서의 불편함은 결국 하나님 때문이다. 하나님 탓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 때문 임을 안다면, 그 분의 사랑 때문인 것을 안다면 이 불편함을 좀 더 기쁨으로 견딜 수 있지 않을까? 이사야도 그렇게 3년을 견뎌내지 않았을까? 이사야는 3년동안 하나님 탓을 한적도 하나님께 불평한 적도 없다. 그는 그저 이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알았기에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다. 벗고 지내라는 뭔가 비합리적인 하나님의 말씀에도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이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일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가면 갈 수록 더 불편해질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길을 걸어야 하고, 해보지 않은 것들을 점점 더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불편함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면 기쁨으로 감수하기를 원한다. 보이지 않는 이 믿음의 길을 내가 주를 위해, 태국의 영혼들을 위해서 할 수 있다면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가길 원한다. (하지만 진심으로 벗고 다니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불편함이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영혼들을 향한 것이 되기를 원하며, 기쁨으로 이 길을 걷는 내가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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