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 24:17-27 예수라는 선을 넘지 말자.
1. 여호야다가 죽은 이후 요아스 왕은 그동안 숨겨왔던 신앙을 커밍아웃하게 된다.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으므로 그 죄로 말미암아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18절)
2. 여호야다 때문에 억지로 신앙을 가졌거나, 가진 척 했던 것 같다. 이제 여호야다가 죽고 나니 그는 더 이상 숨길 것도 없고, 억지로 할 것도 없다. 그저 그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한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기회를 주신다.
3.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시키시고, 경고케 하셨다 (20절). 하지만 그의 반응은 무시였고, 오히려 스가랴의 아들을 성전 뜰 안에서 돌로 쳐죽였다 (21절).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라고 했던가? 아니면 그의 여호야다를 향한 열등감이나 분노의 표출인 것인가?
4. 여튼 동기가 무엇이든 그의 행동은 잘못 되었다. 이해가 않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동기가 이해가 된다고 해서 그의 행동이 합리화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도 어쩌면 이럴 수 있겠다 생각이 들었다. 나의 분노나 나의 억울함은 당연해 보이고, 그러한 원인들을 제공한 사람들에게 내가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5.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구역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태도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나의 잘못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름을 아시고, 우리의 생각을 아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아픔과 슬픔도 아신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우리가 하는 잘못된 일을 허용하거나 결코 합리화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6. 그 억울함과 슬픔과 분노조차도 하나님 안에서 풀어야 한다. 하나님 밖에서 풀려고 한다면 내가 망하는 길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구역이기 때문이다. 오늘 요아스는 선을 넘었다. 때로는 선을 넘으면서까지 나를 어필하고 싶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치 않으신다.
7. 슬픔도, 분노도, 억울함도 하나님 앞에서 풀어낼 때 유익한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든 풀어내는게 유익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선을 넘으면 나도 망하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풀어낼 때, 우리가 누리는 신비와 은혜가 있다. 그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일 것이고, 우리의 고난을 함께 체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것이다.
8.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억이 실로 아름답도다” 내게 줄로 재어주신 구역은 오직 우리를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대속하여 주신 그리스도 안이다. 헛된 세상 것들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받으려고 하지 말자. 우리에게 줄로 재어 주신 구역은 바로 그리스도 안이다. 그 안에서 평안과 위로와 격려를 누리자. 그리스도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평안과 소망을 가질 수 있기를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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