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 26:1-15 기이한 도우심
1.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 (1절).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4절에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라고 기록되어 있다.
2. 성경에는 아버지가 악하지만 반대로 아들은 선한 왕이되는 혹은 반대로 아버지는 선하지만 아들은 악한 왕이되는 케이스들이 자주 있다. 그런데 웃시야는 아버지의 길을 걸어갔다. 사실 아들도 아들이지만 아버지가 어떻게 했길래? 라는 생각이 든다.
3. 자녀들을 키우면서 나의 연약함이 드러나기 때문에 마음이 어려운 적이 사실 한 두 번이 아니다. 사실은 거의 매일 겪는 일이다. 이 아이들을 믿음으로, 인격적으로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가 늘 숙제이자 고민이다. 도대체 아마샤 왕은 어떻게 했던 것일까?
4. 인간의 삶은 조금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 거기서 거기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 더 성숙하고, 조금 더 인격적이고 하는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는 모두 죄인일 뿐이고, 그것이 자식의 인격과 성격을 전부 결정하지는 않는 것 같다. 무척이나 인격적인 부모 밑에서도 엉망이라고 생각되는 자식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고 또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왕들의 역사도 그렇지 않은가?
5. 그 해답은 15절에 있는 것 같다. “또 예루살렘에서 재주 있는 사람들에게 무기를 고안하게 하여 망대와 성곽 위에 두어 화살과 큰 돌을 쏘고 던지게 하였으니 그의 이름이 멀리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었더라” 무기를 고안하게 하고 망대와 성곽 위에서 던지게 하는 것은 특별한게 아니다.
6. 오히려 특별한 것은 마지막에 나오는 ‘기이한 도우심’이란 표현이다. ‘기이한’이란 표현을 히브리어 사전에서 찾아보니 하나님의 구원의 일과 연결되는 단어라고 나온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평범한 것들이 비범해진다. 그저 망대와 성곽 위에서 돌을 던지는 평범한 일들도 비범해진다.
7. 자녀 양육도 마찬가지이다. 부모들도 모두 연약한 인간일 뿐이다. 조금 차이는 있겠지만 부모는는 결국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할 뿐이다. 물론 자녀들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이 없이는 우리의 자녀들을 잘 양육할 수도 없다.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고 나서는 그 분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하지만 내 아이가 잘 못되는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어서라고 생각하는 것은 금물이다.
8.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지만 내 아이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그저 은혜를 구한다. 쉽게 화내고, 연약함이 흘러 넘치는 나의 양육과 사역 가운데 ‘기이한 도우심’ 있기를 원한다. 이 도우심이 없이는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내 자신도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지 않는가?
9. 그 도우심을 구한다. 하나님의 주권적이시지만 인격적인 도우심을 나의 양육과 사역위에 구한다. 오늘 웃시야와 같이 그 도우심이 내 삶에 충만하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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