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2. 3. 29.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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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0:46-52 ‘필요’에서 ‘따름'으로

1. 오늘 본문에서는 맹인 바디매오가 주인공이다. 그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큰 소리쳐 예수님을 부른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47절)그의 외침은 예수님을 다른 목적으로 보기 위해서 온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꾸짖고, 잠잠하라고 한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48절 상반부)

2. 하지만 바디매오는 절대로 멈출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어느 누구의 목소리 보다도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어아만 하는 때이기 때문이다. 

3. 그는 더 크게 외쳤고, 예수께서 그 소리를 들으시고 그를 부르신다. 예수님은 그를 고쳐주셨고, 그에 대한 그의 반응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52절)

4.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에게 ‘너의 기도의 간절함이 너를 낫게 하였다’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과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바디매오의 반응도 나음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예수를 따라가는 자가 되었다. 

5. 오늘 본문에서는 바디매오는 ‘나음'이라는 필요에서 간구를 시작했지만 그 마지막은 ‘따름'으로 마쳐진다. 예수님도 바디매오의 간구 속에서 ‘믿음'에 주목하신다. 누구든 처음에는 자신의 어떠한 목적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필요하고, 그 분의 도우심이 필요할 수는 있다.

6. 하지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이후에도 여전히 나의 필요로 인해서 혹은 나의 필요의 채우심을 기대하기 위해 예수님을 불러서만은 안된다. ‘필요’에서 시작했더어도 그 마지막은 ‘예수를 따름’으로 마쳐져야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일 것이다. 

7. 나의 기도생활은 어떠한가? 예수를 따르기 위한 기도인가? 아니면 아직도 여전히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기도인가? 나의 예배는? 나의 사역은?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나의 ‘필요’인가 아니면 ‘따름'인가? 솔직히 나의 기도의 대부분은 ‘필요’를 말하지 ‘따름'을 말하지 않는 것 같다. ‘필요'에서 ‘따름'으로 넘어가는 것이 영적인 성숙인 것 같다. 지금 나의 현 주소는 어디인가? 성장하고 있는가? 성숙하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필요에만 민감하게 반응하고, 따름에는 무관심하지 않는가? 

8. 태국 성도들은 대부분 기복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자신들의 필요의 대한 하나님의 채우심이 매우 중요하다. ‘신앙적 경험'이 매우 중요하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필요’의 기도에 응답했을 때 믿음이 성장하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은 오늘 말씀처럼 ‘필요'에는 반응하지만 ‘따름'에는 무관심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결국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보느냐의 문제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는 램프의 지니인가? 아니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메시아, 하나님의 어린양인가?

9.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이해할 수록 복음을 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록 오늘 바디매오와 같이 결국 예수를 따라가게 될 것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바른 복음을 전하고, 바른 복음을 살아내는 일일 것이다. ‘필요’로 인해 일희일비 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따름’으로 인해 만족하기 원한다. ‘필요’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름’이 내 삶을 이끌어나가는 원동력이 되기를 원한다. 나도 바디매오와 같이 예수를 길에서 따르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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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