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2. 3. 30.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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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 11:1-11 환호에 취한 새끼 나귀가 되지 말자

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기 직전이시다. 왕으로 오신 분께서 제자들에게 무엇가를 시키신다. 엄청난 일을 시키시지 않을까 제자들은 기대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시키신 일은 아무도 타보지 않은 작은 나귀 새끼를 데리고 오라는 것이다 (1-2절)

2. 왕과 작은 나귀 새끼는 어울리지 않는다. 왕에게 어울리는 것은 젊고 혈기 넘치는 백마일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백마가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신다. 그것도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를 타신다. 

3. 제자들도 뭔가 미심쩍고, 뭔가 어색하지만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갔고, 나귀를 풀어왔다. 그때 묻는다.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5절) 가져가서 그걸로 뭘 할거냐? 묻는 이유는 놀라서일 수도 있지만 새끼 나귀가 그만큼 하찮고, 사람이 아직 타보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나귀였기 때문일 것이다. 

4. 예수님의 대답은 “주가 쓰시겠다 하라" (3절) 였다. 사람들이 보기에 하찮아 보이고, 별 볼일 없어 보이지만 주님께서는 그 새끼 나귀를 들어서 쓰신다. 그런데 묵상을 하면서 이 새끼 나귀가 바로 나의 모습 같단 생각이 들었다. 

5. 나도 하찮아 보이고 별 볼일 없는 자 였으나 (물론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어느 날 주님께서 오셔서 나를 주님의 자녀로 불러 주셨고, 나를 주님의 사역으로 초대해 주셨다. 내가 뭔가 주님과 어울리는 백마 이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새끼 나귀 였기 때문일 것이다. 14살 때 예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고, 그 해에 선교사로 또 부르심을 받았다. 이제 11년차 선교사로 살아가고 있는 사실이 놀랍고 감사하다.    

6. 특별한 장점도 특별한 은사도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주가 쓰시겠다"하며 불러 주셨고, 여전히 나의 삶을 붙들어 가고 계신다. 그러나 예수님을 태우고 가던 나귀가 “호산나" 하며 종려가지를 흔드는 사람들의 환영 앞에서 어리둥절 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쩌면 그 환호가 자신을 태우고 가는 분께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오는 환호로 혹시 착각 했을 수도 있겠다는 상상력이 들었다. 

7. 나는 어떤 새끼 나귀인가? 예수님이 불러주셨고, 그 분의 사역에 불러 주셨는데 나는 그 분을 태우고 가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 착한 나귀인가? 아니면 그 분께 오는 환호를 나에게 오는 환호로 착각하여 교만하고, 그 환호를 가로채려고 하고, 그 환호에 취해 있는 악하고 게으른 나귀인가? 

8. “주께서 쓰겠다 하라"고 나를 불러주셨으니 그 부르심을 잊어버리거나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주께서 쓰시고자 불러 주신 한낱 새끼 나귀임을 잊지 말고, 주를 태우고 감으로 인해서 경험하게 되는 주님께 드려지게 되는 그 감사와 찬송을 가로채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새끼 나귀임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내 위에 계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9. 어제 읽었던 세례요한의 고백이 결국 정답이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세례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았다. 그래서 자신에게 쏟아지는 환호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모든 자리를 내어드리고 자신은 사라졌다. 세례 요한의 삶이 내 삶에 있기를… 환호에 취한 새끼 나귀가 되지 않기를…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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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