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3:28-37 깨어 있으라
1.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바로 ‘깨어 있으라' 이다. 왜 깨어 있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언제 일어날지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2.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그 징조는 알 수 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28절) 징조가 일어나면 그 징조를 통해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를 분별해야만 한다.
3. 하지만 징조는 딱 거기 까지이다. 징조는 우리에게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줄 뿐이고, 실제로 언제 어떻게 인자가 다시 오실지를 알게 하지는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항상 깨어 있는 것이다.
4. 초대교회 성도들은 항상 예수님의 이 말씀들을 마음에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35절)
5. 그들은 그들의 시대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믿었고, 그래서 순교의 자리에서도 곧 다시 오실 예수님을 찬양하며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 부활할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죽음을 그저 통과의례였을 뿐이었다.
6. 지금의 우리의 시대는 어떠한가? 예수님께서 2000년이 넘도록 아직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이 무뎌진 것은 아닐까? 너무 오래도록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기다림의 관성’이 우리로 하여금 ‘지금은 아닐꺼야'라고 너무 쉽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7. 내 영이 깨어 있어야 하는데도,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를 생각하며 늘 민감하게 살아가야 하는데도 너무나도 무뎌지고 너무나도 타성에 젖은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세상이 점점 악해지고 있는데도 거기에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나 자신을 악한 것들로 부터 지키기에만 급급하지 않는가?
8. 깨어 있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저 나 자신만 말씀 위에 서서 나를 잘 지키고 잘 살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나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 모두가 함께 영적으로 예민하게 주님을 섬기며,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일 것이다. 아이들에게, 교인들에게, 주변의 이웃들을 더 사랑하며 살아가기 원한다. 하지만 내가 먼저 깨어 있지 않는다면 주님과의 깊은 사귐의 시간이 없다면, 주님께서 곧 다시 오실거라는 절실함과 긴박감이 없다면 정말로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랑은 주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9. 깨어 있는 자로 오늘을 살아내기 원한다. ‘기다림의 관성'이 내 삶을 무뎌지게 하지 않기를 원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사랑으로 깨어 있기를 원한다. 교회의 리더십들에게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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