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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10:32-42 내 삶의 궤적이 내 말과 행동과 설교를 증명하게 된다

1.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32절)

2. 유대인들은 선한 일 때문이 아니라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했기 때문에 돌로 치려고 하는 것이라 대답한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33절) 만약 유대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예수께서는 돌을 맞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사람으로서 하나님이라 스스로를 칭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예수께서는 그런 유대인들에게 오히려 성경을 가지고 말씀하신다. 성경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시 82:6을 인용하신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성경이 이렇게 증언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어찌 나를 신성모독이라고 하느냐?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34-36절).

4. 그리고 하신 말씀은 나의 삶의 궤적과 열매를 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38절)

5. 성경을 읽다가 보면 해석에 대한 다툼들이 있다. 이것이 정말 무슨 의미인지 고민하고, 또 같은 구절을 놓고 서로 다르게 해석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마다 드는 생각은 정말로 성경이 말하고 싶은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6. 이럴 때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분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그럴싸 해보이는 말을 할지라도 아무리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말을 할지라도 그 사람의 삶의 궤적이 그 말과 맞지 않고, 그 사람의 삶에 그 열매가 없다면 그 사람의 말에 대한 신뢰를 가지기 쉽지 않다. 아직 어린 20대라면 모르겠지만 30대가 되고, 40대가 되면 내 삶에 내가 걸어온 흔적들이 있고, 그렇게 살아온 내 삶의 궤적이 나의 말에 신뢰를 더하게 되는 것이다.

7.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합당하게 말씀하셨고, 하나님의 아들로 합당하게 행동하셨으며 본인이 회당에서 뽑아서 읽으신 이사야 61:1-3절까지의 내용처럼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셨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셨다. 예수님의 모든 삶의 흔적이 예수께서 자칭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메시아 임을 강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8.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나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나의 삶의 궤적은 어떠한가? 내가 말한대로, 내가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하는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40대 중반을 넘어가는 나의 삶의 궤적이 나의 지금의 말과 행동을 증명하고 있는가? 예수를 복음을 말하며 살아가는 선교사로 내 삶은 예수님의 말씀과 복음에 합당한가? 나는 오늘을 정말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내고 있는가? 부끄럽고, 죄송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가 말한대로, 성경을 해석한대로, 설교하는대로 살아가기를 결정한다.

9. 내 힘으로는 부족하다. 그렇게 살아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신뢰하고, 사랑하고, 그 분 안에 거할 때에만 가능하다. 예수께 내 짐을 내려놓고, 예수께 내 삶을 의탁하다보면 어느순간 내 삶의 궤적이 내 말과 행동과 설교를 증명해줄 것이다. 오늘도 예수 안에서 말하고, 행동하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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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10:11-21 선한 목자가 되려면

1.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 하신다. 선한 목자가 되는 조건은 자신의 양을 잘 알아야 하고, 또한 자신의 양들도 목자를 자신의 목자로 잘 아는 '관계적 앎'이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4절)

2. 이러한 '관계적 앎'이 중요한 이유는 모든 관계의 출발점이신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삼위 안에서 이러한 관계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 그리스도와 성령을 가장 잘 아시고, 가장 깊은 사랑의 관계 속에서 서로를 알고 서로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3. 따라서 우리가 따라야 할 모든 관계의 아름다운 모습은 삼위일체의 관계가 그 모범이 될 수 밖에 없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그리스도를 가장 잘 아시는 것 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잘 아시고 우리는 또한 아들 그리스도를 잘 알아갈 때에, 우리는 비로소 그 분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할 수 있고, 그 분은 우리의 선한 목자가, 우리는 그 분의 양이 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14절 상반부)

4.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이나 선한 목자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이야기 하신다. 선한 목자는 자신의 양을 알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한다. 예수님은 짧은 본문에서 3번이나 강조해서 말씀하신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거니와" (11절),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5절) "내가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7절)

5. 예수께서 목숨을 버리시는 이유는 내 양들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관계적 앎 속에서 양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양들이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있다. 양들은 죄악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그들에게는 그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드려서라도 이 양들을 살리길 원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선한 목자이시기 때문이다.

6. 선한 목자는 양들의 필요를 알고, 그 필요에 따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다. 나의 필요를 따라 양들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양들의 필요를 따라 양들을 섬기는 사람이다.

7. 지금 이 시대에는 나의 필요를 따라 양들을 이용하는 삯꾼들이 많은 것 같다. 타이틀은 목사이고, 선교사이지만 그들은 양들의 필요와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양들을 이용해서 자신의 잇속을 차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며, 심지어 자신을 위해 양들을 희생시킨다.

8. 늘 아내와 말하는 것은 어느 누군가를 선한 목자인지 삯꾼인지 판단하려고 하지 말고 우리가 선한 목자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다. 좌고우면하지 말고 오로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양들을 위해 살아가는 자가 되자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것과 같이 선한 마음을 가진 목자인가? 양들을 위해 내 삶을 내려놓으려고 하는가?

9. 조금만 방심하면,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삯꾼 목자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양들을 위해 살아가는 선교사가 되고 싶다. 그러나 혼자서는 쉽지 않다. 함께 이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좋은 친구들이 필요하다. 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가 반지를 파괴하는 여행을 혼자 해낼 수는 없었다. 함께 끝까지 걸어갔던 샘이란 친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선한 목자로의 애씀이 있는 분들과 함께 이 길을 격려하며 걸어가고 싶다.

10. 이 길을 함께 격려하며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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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10:1-10 누구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1. 정상적 상황에서 정상적인 목자라면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한다. 내 양을 지키기 위해서 담을 넘어서 들어가는 목자는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도 동일하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2절)

2. 이렇게 문으로 들어가는 자신의 목자의 음성을 양들은 기억한다. 양들은 눈이 매우 나쁘기 때문에 목자의 외모나 옷을 보고 구분할 수가 없다. 양들은 오직 목자들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만으로 자신의 목자인지, 아닌지를 구별하게 된다.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4절 하반부)

3. 이렇게 성경을 읽다보면 성경의 진리가 대부분 아주 상식적임을 알게 된다. 우리에게 엄청난 이성적 점프를 요구하지 않는다. 읽다가 보면 당연히 그래 보인다. 목자라면 문으로 들어와서 자신의 양들을 돌보며, 양들은 자신을 돌보는 목자의 음성을 통해 그가 자신의 목자인지 아닌지를 구분한다.

4.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지금 목자의 음성을 듣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말씀하시고,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데 나는 지금 듣고 있는지를 점검해봐야 한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아무리 불러도 아무리 외쳐도 듣지 않았던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아닌가? 그래서 결국 아들을 보내시지 않으셨는가?

5.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들으며 살아가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사람들이 많이 듣는 것은 아마도 유튜브일 것이다. 마치 사사기 시대와 같이 "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삿 21:25) 말하는 것들을 아무런 검증과 확인 없이 끊임없이 들으면서 받아들이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6.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들으면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유튜브보다 더 많이 듣는 것은 아마도 우리 마음의 소리일 것이다. 우리의 욕심과 욕망의 소리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우리의 마음의 소리는 유튜브나 각종 소셜 미디어와 레거시 미디어를 통해 확대 재생산되어 다시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7. 이 소리를 들을 듣지 않으려면 우리는 부지런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 분별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다면 내 마음의 소리를 듣게 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다면 다른 욕망의 소리들이 나를 잠식하게 된다. 나는 오늘 누구를 듣고 있는가? 나는 누구의 음성을 듣고 그 뒤를 따라가고 있는가?

8. 유튜브가 활성화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듣는 시간은 줄어들어가고 있다. 너무 재밌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서서 묻고 듣기 보다는 더 쉽고 편해 보이는 길들이 많이 보인다. 누군가가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간증들, 누군가가 자신에게만 특별히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셨다는 이야기들로 가득한 유튜브들.. 그런 것들 보다는 오히려 나에게 직접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 스스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묵상하고, 그 분과의 사귐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9.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암 8:11 목자의 음성을 듣는 자로 오늘 하루를 살아가기 원한다. 세상의 소리, 마음의 소리가 아니라 오직 주의 음성을 사모하고 듣는 자가 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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