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5. 2. 19.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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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13:31-38 사랑해야 제자다 (기도제목 아래에)

1. 예수님께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새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새 계명의 기록된 위치가 절묘하다. 요한은 아마도 의도적으로 고려하여 이 부분을 작성했음이 분명하다. 본문의 앞 부분은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 것을 서술하고 (21-30절), 본문의 뒷 부분은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서술하고 있다 (36-38절). 그리고 그 한 가운데에 사랑하라고 새 계명을 주신다.

2. 3년을 항상 함께 보내며 지냈던 한 제자는 자신을 팔 계획을 가지고 있음을 그에게 알리시고, 또 다른 한 제자는 자신을 부인할 것을 알리시는 그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4절)

3. 구약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명령을 받았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19:18). 그러나 오늘 주신 이 계명이 새 계명인 이유는 이 계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때문이다.

4. 구약의 계명은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명령이었지만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다. 이 계명 앞에서 마음이 아득해진다. 다른 이들을 사랑하되, 나를 사랑하는 것 처럼 사랑하기도 힘든데..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처럼 하라니…

5. 이웃을 사랑하는 척도는 더 이상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이 되어 버렸다. 쉽게 이야기 하면 '너희들도 이웃을 사랑하기를 죽기까지 하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적당히 하지 말고 제대로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안에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사랑도 없는데, 그들을 위해 어떻게 죽기까지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 이웃은 오늘 본문 아래 위에 나오는 것 처럼 나를 팔고, 또 나를 배신하는 자들이 아닌가? 사랑하기 쉽지 않은 자들이 아닌가?

6. 그러나 요한복음 13장의 시작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는 것에서 시작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셨고, 모범만 보여주신게 아니라 그 사랑을 우리에게 쏟아 주셨다.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우리에게 그 사랑이 어떻게 실제가 되는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7. 사랑은 내 안에서 조금도 나오지 않는다. 내 안에는 악함이 가득할 뿐이다. 바울은 말한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 7:18) 내 안에 선한 것이 없다. 사랑이 없다. 다른 이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밖으로부터 사랑이 내 안으로 먼저 들어와 채워져야 하고, 그 사랑이 흘러 넘쳐야만 하는 것이다.

8. 제자들이 3년간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그 사랑을 받은 것 처럼, 세족식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것 처럼 오늘도 예수님 안에 거하며 그 사랑을 먼저 받아야 한다. 내 안에 선한 것이 없음을 먼저 확실히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을 의지하게 된다. 내 안에 절망 밖에 없음을 깨달을때에야 비로서 구원자가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사랑의 원천되시는 예수님을 붙들어야 한다. 그 사랑이 내 안에 흘러 넘쳐 들어와야 나도 흘려 보낼 수 있는 것이다.

9. 사랑해야 제자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35절). 즉 예수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은 자, 그래서 그 사랑을 흘려 보내는 자가 제자라는 것이다. 예수 안에 거하지 않는 자는 우리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에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고 싶은가? 먼저 그 분 안에 거하며 그 분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누리라. 그래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10. 오늘도 샬롬

*21일 금요일에 저 혼자 태국에 선교사 비자를 연장하러 다녀옵니다. 특별히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1. 선교사 비자가 특별한 문제 생기지 않고 잘 연장될 수 있도록 
2. 태국에서 처리해야 할 일들을 잘 마치고 돌아올 수 있도록
3. 수쿰빛언약교회 성도들과 좋은 교제를 나누고 3월 2일 주일 예배에 말씀 전할 때 주님께서 말씀하시도록
4. 남아 있는 김신애 선교사와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지낼 수 있도록
5.  트럼프 대통령 이후 출입국 문제가 어려워졌는데 캘리포니아로 돌아오는 길에 특별한 문제가 없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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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5. 2. 14.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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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12:20-36 예수님의 사랑의 확증의 방식

1.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용서에 대해서 동일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용서를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반드시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이러한 것을 더 깊이 생각해보게 된다. 때로는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 부모로서 그저 아이들을 용서해줄 때가 있다. 그러나 그냥 용서하고, 용서 받는 것 같은 그 상황에서도 누군가는 대가를 치룬다. 그게 아마 보통은 죄를 용서해주는 부모 쪽에서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

2. 물론 부모, 자식 간에 일어나는 상황인 만큼 그 상황을 대가를 지불한다는 식으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모양으로 표현되더라도 부모가 참아주고, 인내하고, 사랑하는 대가를 치루지 않고서는 아이들은 용서 받을 수 없다. 부모이기에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대가라고 생각하지 않을 따름이다.

3.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때에도 그 대가가 분명히 있었다. '희생제물'이라고 해서 우리가 흘려야 할 피를 대신 흘리는 짐승들이 대가로 치뤄졌다. 하나님께서 동물의 피 냄새를 좋아하셔서 제물을 드린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반드시 피가 흘러야 했고, 누군가는 죽어야 했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제물에 전가시키신 것이다.

4.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생명이 땅에 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4절) 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2절).

5. 자신의 생명으로 그 모든 죄의 대가에 대해 지불하시고,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겠다고 선언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들려서 대신 피를 흘리고, 대신 죽어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게 하시겠다고, 우리는 그 모든 혜택을 받아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6. 이것이 복음이다. 내가 나의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에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는 그 모든 혜택을 입는 그것이 바로 복음이다. 바울은 이를 롬 5:8 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7. 그리스도께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는 방식은 들려지는 것이고, 죽는 것이고, 낮아지는 것이고, 피흘리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래서 나음을 입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입으로만 사랑을 이야기 하는 것은 복음적인 삶의 모습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나의 사랑의 대가를 치루기 보다는 때로는 아이들의 연약함을 탓하고, 화를 내고, 짜증을 부렸다. 내가 대가를 지불했는데, 쟤는 왜 저러는지에 대해 본전 생각이 나고, 속이 상한다.

8.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나에 대한 사랑의 확증 방식은 본전을 이야기 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또 배신하고, 또 주님을 버리고, 또 주님과 상관없이 살 것을 아시면서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들리셨고, 피흘리셨고, 모욕당하셨고, 죽으셨다. 그 주님의 사랑의 방식을 오늘 다시 한번 묵상하며 내가 어떻게 복음으로 살아야 할지를 다짐하게 된다. 이렇게 사는 방식을 택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든다. 그러나 복음의 방식으로 살아야만 나도 아이들도 살 수 있음을 기억하고,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는 방식이 아닌 낮아지고, 피흘리고, 죽는 방식으로 오늘을 살아가기 원한다.

9. 이름만이 아니라 삶으로 NIBC(not i but Christ)가 실천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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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5. 2. 11.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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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11:45-57 HIS STORY

1.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한다.예수님께서 많은 기적과 표적을 보이셨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기적과 표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메시아를 열망한다고 말하였지만 사실 그들이 진실로 열망했던 것은 자신들의 독립이요, 지금 누리고 있는 권력이다.

2. 48절이 이를 설명한다.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기적과 표적을 행하는 사람이 왔지만 실질적으로 그들이 고민하고 있는 것은 하늘의 문제가 아니라 땅의 문제, 즉 자신들이 계속 권력을 누리고, 로마인들로부터 간섭받지 않아 독립하는 그것이었다.

3. 예수께서 오신 이유는 모든 사람들에게 죄에서 해방되는 구원을 선포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써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데, 그나마 예수를 듣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얻고자 하여 그 기적에만 집중하고, 예수를 듣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에만 집중하고 있다.

4.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신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많음에도 허락하신 12제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계신다. 여기까지 보면 사람들의 이기심이, 사람들의 욕망이 역사를 움직이는 것 같다. 하나님의 아들 조차도 사람들의 욕망에 휘둘리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어둡고,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시간에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다.

5.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고백한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50절). 그는 아마도 예수 한 사람을죽여서 자신들은 계속 권력을 누리고, 유대인들 또한 망하지 않게 되는 시나리오를 그렸을 것이다. 사람들의 이기심과 욕망으로 대표되는 그림이었을 것이다.

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러한 이기적이고, 욕망적인 계획을 온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을 준비하는 것으로 사용하신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라" (51-52절)

7. 우리의 이기심에도, 우리의 욕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일하신다. 지금의 한국사회나 미국, 심지어 태국 사회를 돌아보면 정말로 답답하고, 암담하기 그지 없는 상황들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도대체 왜 저렇게 하는지, 도대체 얼마나 욕망에 눈이 멀면 저렇게 하는지 화가 날 정도이다.

8.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과 같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기심과 욕망을 넘어 일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일하고 계신다. 여전히 그 분의 계획은 확실하고, 그 분은 신실하시며, 그 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열심을 멈추지 않으신다. 불의하고 무도한 세상에서 여전히 내가 정의를 실천하려고 하고, 정직하게 살려고 애쓰는 것은 보이지 않아도 더딘 것 같아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것 같아 답답하고, 화가 날지라도 우리는 선하게 살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하고, 영혼구원에 대한 열심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도 말씀하신다. 요 5: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9. 아버지께서도, 예수께서도 일하시니 나도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나의 최선이 조금도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을 것 같아 무력하게 느껴지더라도, 나 또한 그들과 별반 다를 것 없게 느껴져서 절망스러울지라도 오늘 하루를 정성껏 살아간다. 왜냐하면 역사를 움직이시는 분이 여전히 하나님 이시고, 그 하나님께서 여전히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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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10:32-42 내 삶의 궤적이 내 말과 행동과 설교를 증명하게 된다

1.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32절)

2. 유대인들은 선한 일 때문이 아니라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했기 때문에 돌로 치려고 하는 것이라 대답한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33절) 만약 유대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예수께서는 돌을 맞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사람으로서 하나님이라 스스로를 칭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예수께서는 그런 유대인들에게 오히려 성경을 가지고 말씀하신다. 성경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시 82:6을 인용하신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성경이 이렇게 증언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어찌 나를 신성모독이라고 하느냐?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34-36절).

4. 그리고 하신 말씀은 나의 삶의 궤적과 열매를 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38절)

5. 성경을 읽다가 보면 해석에 대한 다툼들이 있다. 이것이 정말 무슨 의미인지 고민하고, 또 같은 구절을 놓고 서로 다르게 해석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마다 드는 생각은 정말로 성경이 말하고 싶은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6. 이럴 때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분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그럴싸 해보이는 말을 할지라도 아무리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말을 할지라도 그 사람의 삶의 궤적이 그 말과 맞지 않고, 그 사람의 삶에 그 열매가 없다면 그 사람의 말에 대한 신뢰를 가지기 쉽지 않다. 아직 어린 20대라면 모르겠지만 30대가 되고, 40대가 되면 내 삶에 내가 걸어온 흔적들이 있고, 그렇게 살아온 내 삶의 궤적이 나의 말에 신뢰를 더하게 되는 것이다.

7.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합당하게 말씀하셨고, 하나님의 아들로 합당하게 행동하셨으며 본인이 회당에서 뽑아서 읽으신 이사야 61:1-3절까지의 내용처럼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셨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셨다. 예수님의 모든 삶의 흔적이 예수께서 자칭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메시아 임을 강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8.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나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나의 삶의 궤적은 어떠한가? 내가 말한대로, 내가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하는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40대 중반을 넘어가는 나의 삶의 궤적이 나의 지금의 말과 행동을 증명하고 있는가? 예수를 복음을 말하며 살아가는 선교사로 내 삶은 예수님의 말씀과 복음에 합당한가? 나는 오늘을 정말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내고 있는가? 부끄럽고, 죄송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가 말한대로, 성경을 해석한대로, 설교하는대로 살아가기를 결정한다.

9. 내 힘으로는 부족하다. 그렇게 살아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신뢰하고, 사랑하고, 그 분 안에 거할 때에만 가능하다. 예수께 내 짐을 내려놓고, 예수께 내 삶을 의탁하다보면 어느순간 내 삶의 궤적이 내 말과 행동과 설교를 증명해줄 것이다. 오늘도 예수 안에서 말하고, 행동하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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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10:11-21 선한 목자가 되려면

1.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 하신다. 선한 목자가 되는 조건은 자신의 양을 잘 알아야 하고, 또한 자신의 양들도 목자를 자신의 목자로 잘 아는 '관계적 앎'이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4절)

2. 이러한 '관계적 앎'이 중요한 이유는 모든 관계의 출발점이신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삼위 안에서 이러한 관계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 그리스도와 성령을 가장 잘 아시고, 가장 깊은 사랑의 관계 속에서 서로를 알고 서로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3. 따라서 우리가 따라야 할 모든 관계의 아름다운 모습은 삼위일체의 관계가 그 모범이 될 수 밖에 없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그리스도를 가장 잘 아시는 것 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잘 아시고 우리는 또한 아들 그리스도를 잘 알아갈 때에, 우리는 비로소 그 분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할 수 있고, 그 분은 우리의 선한 목자가, 우리는 그 분의 양이 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14절 상반부)

4.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이나 선한 목자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이야기 하신다. 선한 목자는 자신의 양을 알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한다. 예수님은 짧은 본문에서 3번이나 강조해서 말씀하신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거니와" (11절),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5절) "내가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7절)

5. 예수께서 목숨을 버리시는 이유는 내 양들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관계적 앎 속에서 양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양들이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있다. 양들은 죄악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그들에게는 그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드려서라도 이 양들을 살리길 원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선한 목자이시기 때문이다.

6. 선한 목자는 양들의 필요를 알고, 그 필요에 따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다. 나의 필요를 따라 양들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양들의 필요를 따라 양들을 섬기는 사람이다.

7. 지금 이 시대에는 나의 필요를 따라 양들을 이용하는 삯꾼들이 많은 것 같다. 타이틀은 목사이고, 선교사이지만 그들은 양들의 필요와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양들을 이용해서 자신의 잇속을 차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며, 심지어 자신을 위해 양들을 희생시킨다.

8. 늘 아내와 말하는 것은 어느 누군가를 선한 목자인지 삯꾼인지 판단하려고 하지 말고 우리가 선한 목자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다. 좌고우면하지 말고 오로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양들을 위해 살아가는 자가 되자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것과 같이 선한 마음을 가진 목자인가? 양들을 위해 내 삶을 내려놓으려고 하는가?

9. 조금만 방심하면,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삯꾼 목자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양들을 위해 살아가는 선교사가 되고 싶다. 그러나 혼자서는 쉽지 않다. 함께 이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좋은 친구들이 필요하다. 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가 반지를 파괴하는 여행을 혼자 해낼 수는 없었다. 함께 끝까지 걸어갔던 샘이란 친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선한 목자로의 애씀이 있는 분들과 함께 이 길을 격려하며 걸어가고 싶다.

10. 이 길을 함께 격려하며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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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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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10:1-10 누구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1. 정상적 상황에서 정상적인 목자라면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한다. 내 양을 지키기 위해서 담을 넘어서 들어가는 목자는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도 동일하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2절)

2. 이렇게 문으로 들어가는 자신의 목자의 음성을 양들은 기억한다. 양들은 눈이 매우 나쁘기 때문에 목자의 외모나 옷을 보고 구분할 수가 없다. 양들은 오직 목자들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만으로 자신의 목자인지, 아닌지를 구별하게 된다.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4절 하반부)

3. 이렇게 성경을 읽다보면 성경의 진리가 대부분 아주 상식적임을 알게 된다. 우리에게 엄청난 이성적 점프를 요구하지 않는다. 읽다가 보면 당연히 그래 보인다. 목자라면 문으로 들어와서 자신의 양들을 돌보며, 양들은 자신을 돌보는 목자의 음성을 통해 그가 자신의 목자인지 아닌지를 구분한다.

4.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지금 목자의 음성을 듣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말씀하시고,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데 나는 지금 듣고 있는지를 점검해봐야 한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아무리 불러도 아무리 외쳐도 듣지 않았던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아닌가? 그래서 결국 아들을 보내시지 않으셨는가?

5.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들으며 살아가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사람들이 많이 듣는 것은 아마도 유튜브일 것이다. 마치 사사기 시대와 같이 "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삿 21:25) 말하는 것들을 아무런 검증과 확인 없이 끊임없이 들으면서 받아들이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6.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들으면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유튜브보다 더 많이 듣는 것은 아마도 우리 마음의 소리일 것이다. 우리의 욕심과 욕망의 소리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우리의 마음의 소리는 유튜브나 각종 소셜 미디어와 레거시 미디어를 통해 확대 재생산되어 다시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7. 이 소리를 들을 듣지 않으려면 우리는 부지런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 분별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다면 내 마음의 소리를 듣게 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다면 다른 욕망의 소리들이 나를 잠식하게 된다. 나는 오늘 누구를 듣고 있는가? 나는 누구의 음성을 듣고 그 뒤를 따라가고 있는가?

8. 유튜브가 활성화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듣는 시간은 줄어들어가고 있다. 너무 재밌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서서 묻고 듣기 보다는 더 쉽고 편해 보이는 길들이 많이 보인다. 누군가가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간증들, 누군가가 자신에게만 특별히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셨다는 이야기들로 가득한 유튜브들.. 그런 것들 보다는 오히려 나에게 직접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 스스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묵상하고, 그 분과의 사귐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9.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암 8:11 목자의 음성을 듣는 자로 오늘 하루를 살아가기 원한다. 세상의 소리, 마음의 소리가 아니라 오직 주의 음성을 사모하고 듣는 자가 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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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