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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1:1-9 자녀를 위해서 삶으로 가르치고 기도하는 것이 장로의 자격이다.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디도에게 장로와 감독의 자격을 설명하고 있다. 장로의 자격에서 마음에 들어오는 부분은 그가 한 아내의 남편이고, 또한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남편으로써 또한 아이들을 키우는 입장에서 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모습은 그래도 어떻게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부분이니 쉬워보인다. (그나마 쉽다는 것이지 절대 쉽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들에 대한 문제는 다르다고 느껴진다. 아이들 때문에 요즈음 하루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어서 그래서인지? 이 구절이 더 무거워 보인다.
6절을 보면 장로의 자격은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여야만 한다. 한 마디로 자녀가 믿음 위에 잘 서 있고, 부모의 권위에 순종하며, 절제할 수 있는 아이로 키워야만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컨트롤 하는 것 보다 더 어려운 것은 자녀들을 컨트롤 하는 것이다. 사실 최근의 나의 삶은 자녀들을 컨트롤 하다가 나를 어찌하지 못해서 화가 나거나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 매일의 일상으로 살고 있다. 그런데 아이들이 절제를 배우려면 결국은 부모가 절제의 모습을 말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줘야만 한다. 사실 지금 가장 힘든 부분이 이 부분이다. 아이들 앞에서 늘 무엇인가를 참다 참다 결국에는 빵 터지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는게 나의 모습인데, 오늘 본문의 장로의 조건이 참으로 무겁게 느껴진다. 장로에게 주어진 무게는 단순히 나만 잘 믿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자녀 또한 믿음과 사랑으로 반듯하게 키워내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자녀들이 부모들의 거울이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왜 그런 조건을 걸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아마도 겉으로 보이지 아니하는 삶을 보기 위해서 였으리라. 감독은 이 장로의 조건위에 또 더 붙는다. 초대교회의 장로와 감독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신실했는지를 볼 수 있다.
선교사로 아이들을 키우며 내가 최근에 느끼는 좌절감은 상당하다. 아이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본을 보여주는 것이 너무나도 힘이 든다. 그동안 이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뭐 도찐개찐이지 라는 생각도 든다. 솔직히 정말 내 힘으로 안된다는 것을 처절하게 느낀다. 아이들에게 말하는 것도, 가르치는 것도, 내가 아이들의 모습을 참고 인내하는 것도 내 힘으로 전혀 되질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들이 무너지고 있다. 은혜를 구해야만 한다. 어제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이들을 키우는 건 ‘은혜’ 말고는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렇다. 내가 무엇인가를 잘해서 아이들이 잘 크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주님 앞에서 바로 서는 것,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자. 내가 장로의 자격을 얻기 위해? 내가 선교사로써 아이들을 잘 키웠다는 평판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정말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자랄 수 있도록, 방탕하지 않도록,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지 않을 수 있도록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자. 기도하는 아빠가 되는 하루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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