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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1-10 하나님이, 하나님의 약속이 내 삶을 움직이는 이유입니다.
결국 사람을 움직이는 많은 동기 중에 하나는 욕심인 것 같다. 내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모를 때 이 욕심이 발동한다.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다윗의 아픈 틈을 타 자신이 왕이 되려고 할 때,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과 함께 하자고 청하였다. 주석을 보니 그는 실질적인 다윗의 큰아들이었다. 넷째 아들이었지만 큰 아들 암논과 셋째 아들 압살롬은 그 누이의 사건을 통해 이미 죽었고, 둘째인 길르압은 병으로 죽었던 시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이야기는 그가 가장 유력한 '다윗의 후계자' 라는 사실이다.
7절에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은 아도니야를 따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8절에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선지자 나단과 시므이와 레이와 다윗의 용사들은 그 청을 거절했다. 아도니야를 움직인 것도 자신의 야망, 욕심이었고, 아마도 7절에 등장하는 요압과 아도니야를 움직인 것도 그들의 야망과 욕심이었을 것이다. 더 이상 하나님이 이유가 되지 않고, 대의와 명문이 그들을 움직이는 이유가 되지 않았다. 반면에 8절에 등장하는 더 많은 인물들은 인간적으로 다윗을 배신할 수 없었던 것도 있었을 것이고, 하나님이 세우신 다윗을 하나님의 말씀없이 버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인간적인 이유들 말고도 그들은 그들의 인간적인 기대, 즉 다윗이 늙었으니 새로운 인물을 지지함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을 포기하였고, 여전히 그들을 움직이는 이유가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약속이었던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그러하다. 때로는 나를 움직이는 이유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약속인 때가 있지만, 또한 때로는 내 욕심에 휩쓸려서 하나님은 잊고 내 맘대로, 내 생각대로, 내가 생각하기에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일 때도 있다. 내가 그 시점에 서 있었다면 나는 늙고, 더 이상 소망이 없어 보이는 다윗을 지지했을까? 아니면 젊고, 유망하고, 잘나갈 가능성이 높은 왕이 될 가장 유력한 자 아도니야를 지지했을까? 참으로 쉽지 않은 질문이다.
오늘도 나를 움직이는 것이 진정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약속인가? 아니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내 욕망이 투사된 욕심인가?(창 3:6) 눈에 보이는 것, 좋아 보이는 것, 있어 보이는 것을 쫓은 인생이 되지 않기를 원한다. 특별히 이 태국은 눈에 보이는 것, 있어 보이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곳이다. 더워도 긴 팔 옷을 입어야 하고, 외모도 열심히 꾸며야 한다. 물질주의, 외모만능주의가 아주 극대화 되어 있는 곳이다. 이 곳에서 같이 그러한 가치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약속과 하나님을 쫓는 삶을 살아내기를 원한다. 그렇게 복음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냄으로 하나님이 주인이심이 이 땅에도 나타나기 원한다. 오늘도 불러주신 그 약속을 붙들고 살아내기 원한다. 약속이 내 욕망을 이기는 하루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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