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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2:26-35 현실의 유력함 (두려움)을 붙잡은 자들의 최후
왕상 1장에서 시작된 반역이 이제 마침표를 찍는다. 반역에 가담했던 세 사람이 모두 마지막을 맞게 된다.
아도니야는 그 마지막이 어떠한지 성경은 기록하지 않지만, 아비아달은 파면되었고, 요압은 성소에서 죽게 되었다. 여전히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심판들이다. 요압은 이미 많은 무죄한 자들의 피를 흘렸던 장군 아닌가? 우리는 우리가 잘못한 댓가를 분명히 치뤄야 하는 존재들이다.
새로 임명받은 군대장관 브나야와 제사장 사독은 왕상 1장에서 유력해 보이는 왕자에게 가담하지 않았던 자들이다. 그 순간에 더디어 보이고, 유력해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은 사람들이었다. 다윗의 대는 아도니야가 아니라 솔로몬이 잇게 된다는 것을 정말로 아도니야가 왕이 될 것 같은 그 순간까지도 믿고 있었던 자들이다. 그들에게 이제 영광의 관이 씌워진다. 이들은 현실이 아니라 약속을, 유력해 보이는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이렇게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시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이들의 삶을 보면서 나의 삶을 반추하게 된다. 나는 무엇을 쫓아가고 있는가?
반짝이고 빛나는 유력해 보이는 것들을 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약속보다는 현실을, 지금 당장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다는 유력해 보이는 상황을 선택하고 있지는 않은지?
약속을 붙들고 광야와 같은 메마른 땅을 걸어가기 보다는 순간 좋아보이는 것을 붙들고 좋은 길을 가려는 자는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내 안에 그러한 욕심들이 있다. 좋고 편한 가능성의 유혹들에 자주 휩싸인다. 어제는 내 안에 아도니야를 봤다면 오늘은 내 안에 아비아달과 요압을 보게 된다.
현실아 아니라, 유력해 보이는 상황이 아니라 약속과 하나님을 택해야 한다. 그것이 믿는 자의 길이고,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길이다.
아비아달과 같이 요압과 같이, 그리고 아도니야와 같이 살지 말자.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는 그러한 내 안에 두려움을 해결하자. 두려움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믿자. 그래야만 아비아달, 요압, 아도니야와 같지 않을 수 있다. 결국은 믿음 싸움이다. 오늘부터 토요일까지는 치앙마이 매해 지역으로 전도여행을 간다. 이 시간들을 통해서 내 안에 약속과 하나님이 더 선명해지길 구해본다.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지 않으셨다. 그저 주님 손 붙들고 같이 가면 되는 것이다. 두려워 말자. 두려워 하여 조급한 것을 붙들지 말고, 하나님을 붙잡자.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약속의 자녀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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