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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2:36-46 ‘익숙해져버림’이 가져온 죽음을 넘어서자
예루살렘에서는 집을 짓고 살아도 되지만 밖으로는 나가지 말라. 이것이 솔로몬의 시므이를 향한 명령이었다. 그에게 구역을 정해주고, 이 선을 넘어가면 죽는다고 말한 것이다. 시므이도 당장 죽지 않아도 되니 ‘이 말씀이 좋사오니’ 라고(38절) 대답했고, 실제로 시므이가 3년을 지켰다. 하지만 자신의 종이 도망가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시므이는 이 명령을 잊어버리고 예루살렘 밖으로 그들을 잡으러 쫓아갔다. 솔로몬의 말을 무시한 것인지? 아니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시간이 흘러 잊어 버렸는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가 예루살렘 밖으로 나간 것은 결국 솔로몬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시므이는 결국 죽게 된다. 시므이를 죽게 한 것은 3년의 시간으로 인한 ‘익숙해져버림’ 이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하지만 어느새 그 마음은 식어 버리고, 주님과의 관계가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니게 되어 버린다. 너무 익숙한 나머지 그 보다 더 중요해 보이는 것 (도망간 종을 잡아오는 일)에 우리의 마음을 쏟다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된다. 기도가 익숙해지고, 예배가 익숙해지고, 말씀이 익숙해져 버린다. 그래서 덜 중요한 것이 전부인 것 처럼 되어 버린다. 시므이를 죽게 한 ‘익숙해져버림’이 나도 죽게 한다.
북부 치앙마이에서도 차로 2시간을 이동해야 하는 카렌족 마을로 왔다. 오늘 오후는 매해라는 곳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 곳에서 만나는 아이들, 그리스도인들, 우리 형제, 자매들에게서 그 ‘익숙해져버림’을 찾기는 힘들었다. 그들은 열정적이었고, 무엇을 하든 행복해 보인다. 너무 추운날씨(태국에서 12도 ㅜㅜ)로 인한 어려움도 그들에겐 중요하지 않다. 이 속에서 예수가 너무 익숙한 사람은 ‘나 한사람’ 밖에 없는 것 같다. ‘익숙해져버림’을 ‘신선한, 새로운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채우고 싶다.
언어의 답답함을 느낀다. 정체되어 있는 것 같다. 이들에게 함께 사랑을 나누고 싶은데 언어의 한계가 너무 답답하다. 이 한계가 나에게 ‘익숙해져버림’을 깨고 ‘신선함, 새로움’으로 나를 채우기 원한다. 오늘도 매해라는 곳에서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게 되는데, 기대된다. 그리고 예전에 양육했던 ‘위라시니’ 자매와 ‘렛’ 형제를 만나게 될 것 같은데 이것 또한 너무 기대된다. 예수 안에서의 새로움, 신선함으로 새 힘을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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