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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2:13-25 내 안에 있는 아도니야
아도니야는 자신의 입으로 아우 솔로몬이 왕이 된 것은 여호와로 말미암았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진정한 그의 고백은 아니었다. 그는 다윗을 섬겼던 수넴 여자 아비삭을 요구한다. 이것은 둘째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를 몰아내고 아버지의 후궁과 동침했던 것과 유사하게 자신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정통자임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잔머리를 굴린 사건이었다. 특별할 것이 없는 것 같았던 요구 속에 그의 욕망과 욕심이 꿈틀거린다. 그는 여호와로 말미암은 일을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통해 돌이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심히 큰 교만이다. 그 교만한 자의 마지막은 죽음 밖에 남지 않았다 (23절). 솔로몬이 주일 본문에서 악한 것이 보이면 죽을 것이라고 경고를 했는데, 그는 자신의 죽음을 자초하고 있다. 그의 교만한 모습을 보며 나에게도 동일한 교만이 있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하면서, 이 사역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하면서 얼마나 많은 내 생각을 더하고, 얼마나 많은 내 계략과 내 의견, 내 마음, 등등의 것들을 더하고 있는가? 내 것이 아닌데도, 내 것처럼 붙잡고 있는 것들이 수도 없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도 아도니야처럼 간교한 모습으로.. 아닌 척 하면서.. 겸손하고, 공손한 태도로 말이다.
언어 공부를 하면서도 내 안에 계속 꿈틀거리는 욕망들이 있다. 팀 켈러의 복음을 공부하면서 머리로는 복음을 이해하면서도, 여전히 삶에서는 복음이 아니라 나의 공로를 의지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하니까, 내가 이런 부분에서 이렇게 헌신 하니까, 내가 이렇게.. 내가 이렇게.. 내가 이렇게.. 내가, 내가, 내가.. 아도니야가 멀리 있지 않다. 바로 내 안에 아도니아가 있다. 복음이 아니라 공로로, 내 행위를, 내 생각을 의지하는 내가 내 안에 있다. 더욱 더 복음 앞에 내 자신을 내려놓는다. 은혜 아니면 설 수 없는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선교사로 불러 주셨고, 은혜가 아니고서는 단 한 걸음도 내 딛을 수 없는 나를 선교사로 이 태국 땅까지 보내셨다. 더욱 더 복음 위에 서기 원한다. 내 존재와 내 세계관이 여전히 내 힘으로, 내 지혜로, 내 생각으로 하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내가 그 주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임을 배울 수 있기를 원한다.
어제 읽었던 팀 켈러의 ‘당신을 위한 갈라디아서’ 에서 두 구절 함께 나눕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각하기를 구원은 복음으로 받지만 성장하려면 성경 원리들을 삶 전반에 적용해야 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복음으로 구원 받을 뿐 아니라 복음을 삶 전반에 적용하여 성장한다”
“우리가 순종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지 못함은 단지 의지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따라서 더 열심히 해서는 이런 실패를 해결할 수 없다. 더 열심히 하겠다는 결심은 어차피 자력으로 율법을 지키겠다는 결심에 불과하다. 그보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게 있다. 모든 불순종의 뿌리는 행위를 통한 의로 자신의 삶을 통제하려는 우리의 고질적 습성에 있다.”
내 안에 아도나아를 뿌리뽑기 원한다. 교묘하게 복음이 아닌 것들로 내 삶을 채우려고 하는 시도들을 멈추고, 오직 하나님의 역사와 일하심만이 내 삶에 나타나기 원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고, 나는 그 분의 손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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