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9. 5. 10.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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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6:1-13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우리를 부르셨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로 표현되는 그 분의 영광을 본 후 그에게 남은 것은 절망 밖에 없었다. 5절에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라고 말하고,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라고 말한다. 자신도 백성도 부정한 자들이다.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 부정한 자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니 이사야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5절 전반부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소망이 무너지고, 이제는 아무런 희망조차 남지 않았을 때 (9-12절)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거룩한 씨’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화로다’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죄인인 우리를 정결케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소망이 없는 우리의 인생에 그 거룩한 씨를 주시는 분도 결국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었다 (13절). 우리는 이 하나님의 놀라운 일에 조금도 더하거나 빼거나 할 수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8절) 우리가 무슨 보탬이 된다고 우리를 부르시는 걸까? 시작도 하나님께서 마무리도 하나님께서 하시는데 굳이 왜 우리를 부르시는 걸까? 하나님은 그 거룩한 씨앗이 우리를 통해 전해지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구원 계획의 시작과 끝, 구원의 모든 계획은 하나님께서 하셨지만 하나님은 그 구원 계획의 전달자로는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일에 동역자로 부르셨기 때문이다. 거룩한 씨앗이 이 땅의 그루터기로 남도록 우리를 가라고 부르셨다. 사명은 틀림없다. 부르신 대로 이 일에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주어진 질문은 ‘어디로 나를 부르셨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도대체 나를 어디로 부르셨는가? 

 

오늘 이사야를 부르실 때에도 두 가지 질문이 있다.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이 질문에도 어디로가 빠져있다. 자신들의 백성들에게 이사야를 보내시는 것이지 소위 어떤 ‘장소’의 개념은 빠져 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부르심에도 보니 ‘어디로’가 빠져 있다. 

 

창세기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디로 가라고 하지 않으셨다. 앞으로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물론 아브라함은 창 12:5절에 보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그 이전 구절을 봐도 하나님이 가나안이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진 않으셨다. 다만 12:4절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라고 말씀하고 있다.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물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묻고 구하여야 한다. 이 땅의 영혼들을 위해서 나를 부르셔서 지금 이 곳에 있다면 내가 어떤 모양, 어떤 모습으로 섬기고 영혼들을 사랑해야 할지 물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했다면 이제는 그 거룩한 씨앗이 그루터기가 되어야 하는 곳이 어디인지 더 묻고 들어야 하겠다. 아브라함이 했던 것과 같이 ‘말씀을 따라가는’자가 되어야 하겠다. 

 

말씀이 나를 이끌어 가시도록 나를 내어드리며 묻고 듣는 오늘 하루, 그리고 내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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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