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18-25 좋은 소식이 믿음의 영역의 삶으로 나타나기를…
1. 좋은 소식이 임했다. 아이가 없던 가정에 그것도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기로 약속을 주셨다. 그런데 사가랴는 불신앙의 반응을 했다.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2. 그의 반응은 지극히 당연해 보였다. 누가 봐도 당연한 반응이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믿음의 반응을 기대하셨던 것 같다. 그의 불신앙은 그에게 말을 하지 못하는 시간을 갖게 만들었다. 믿지 않는 그가 말을 하면 괜한 오해와 어려움이 생길 수 있으니까..
3. 나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가랴의 반응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지만 때로는 나의 반응이 사가랴와 같으면 안되고 나의 합리성과 이성을 뛰어 넘어 믿음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하는 때가 분명히 있다.
4. 복음이 바로 그렇다. 상식적이지 않고, 합리적이지 않고, 이성적이지 않다. 나의 본능은 다시금 자꾸 율법으로, 행위로 돌아가려고 한다.
5. 예수님이 모든 것을 하셨고, 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인데 자주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은혜로 여기기 보다는 내가 쟁취해야 할 그 어떠한 것으로 여길 때가 많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나를 받아 주셨다는 사실을 잊고, 자꾸만 내가 무엇인가를 하려는 시도를 통해 하나님의 용납을 얻어내려고 하다 보니 그러한 태도들이 아이들에게도 흘러간다.
6. 그들은 내 아이이기 때문에 언제나 용납받고, 사랑받을 수 있는 아이들인데, 나는 자꾸만 그들에게도 무엇인가 착한 행동, 부모의 말에 순종을 강요하며 (물론 가르쳐야 한다) 너희들이 이것들을 해야 아빠가 사랑할거야 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7. 복음은 내 삶으로 흘러 들었는데, 나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반응으로 아이들을 오히려 비복음적인 삶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좋은 소식이 아이들에게도 좋은 소식으로 전해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가정예배때 설교와 아빠의 양육방식이 다른 것을 아이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8. 결국은 내가 나의 합리성과 이성을 뛰어넘어 믿음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그 모든 은혜를 나도 은혜로 받아 들여야 한다. 치열하게 그 분에 대해 연구해야 하지만 또한 가장 값없는 은혜를 나 스스로에게 적용해야 한다.
9. 나에게 임한 좋은 소식이 내 삶으로도 아이들에게 흘러가기를… 우리 형제들에게도 흘러가기를… 율법이 아니라 사랑을 강조하기를… 의무가 아니라 기쁨으로 섬길 수 있기를… 그 사랑이 감사해서 율법이 내게 의미를 가지게 되기를…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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