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하 20:12-21 겸손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
1. 히스기야는 기도로 이스라엘을 앗수르의 손에서 구했고, 자신의 죽을 병도 나았다. 물론 하나님께서 구해주시고 낫게 해주신 것이지 히스기야의 기도 덕분은 아니다. 하지만 히스기야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자신의 기도의 능력을 과신할만한 상황이었다.
2. 강대국인 바빌론이 자신의 병이 들었다 함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그에게 보냈고, 이는 히스기야에게 강대국 왕으로부터 인정받는다는 느낌을 충분히 가지게 만들었다 (12절).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자신의 창고의 모든 것을 바벨론의 사신에게 보여준다 (13절).
3. 히스기야의 실수를 보면서 결국 모든 실수의 뿌리는 자기 과시욕, 혹은 교만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으로부터 충만하지 않으면 사람의 인정, 혹은 나의 어떠한 행위에서 오는 자존감으로 나를 채우려고 할 수 밖에 없음을 히스기야를 통해서 보게 된다.
4. 하나님 한 분 만의 인정이면 충분하다. 그런데 실제로 그것은 잘 안되고 어렵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한 분 만의 인정 보다는 지금 내 눈에 보이고,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의 인정이 더 마음 깊이 다가오지 않는가? 하지만 그러한 조급증(?), 혹은 인정의 욕구는 그의 자녀세대가 바벨론에게 모두 잡혀가도록 만들었다.
5. 나는 히스기야와 같은 기도의 능력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심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히스기야와는 다른 내용들이 다른 모습으로 내 삶에서 수없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기도 부끄럽지만 내 안에 남들보다 이러한 부분들은 내가 조금 더 낫다고 생각하든지 혹은 이러한 부분들은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이 있다.
6. 이러한 내용들은 결국 나를 높게 생각하고 다른 이들을 낮게 생각할 여지를 만들고, 하나님 한 분으로 부터의 인정이 아니라 사람으로 부터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게 만든다. 결국 교만하게 만들고, 그 교만은 나를 넘어지게 하는 올무가 될 수 밖에 없다.
7. 히스기야의 실수를 보면서 다시 한번 ‘겸손’을 생각하게 된다. 겸손이란 하나님 앞에 설 때에만 가능하다. 가장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내가 얼마나 무능한지, 내가 얼마나 쓸모없는지를 깨닫게 될 때에야 다른 사람보다 아주 아주 조금 나은 나를 보며 자고하지 않게 된다.
8. 히스기야가 만약 저 때 그의 주특기(?)를 살려 기도했었더라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그 분의 영광을 보았더라면 오늘 본문과 같이 죄를 짓지 않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겸손은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내가 겸손하고자 결정한다고 해서 가능한 것도 아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광대하신 하나님, 그 한 분 앞에 내가 설 때에만 겸손을 배우고 겸손하게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9. 말씀 앞에 서는 것,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 앞에 서는 것, 그것이 나를 겸손으로 이끄는 지름길이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 서기 원한다. 팀 켈러의 말 처럼 “나는 내가 감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한 죄인이고 허물 많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감히 바랐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용납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아야 겸손할 수 있다.
10. 말씀 앞에, 하나님 앞에 서는 하루가 되자.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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