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3:14-22 믿음만큼 중요한 행함
1. 성도라면 누구나 들어봤을만한 라오디게아 교회이다. 이 교회에게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은 미지근함이다.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통은 믿음의 양 극단으로 이해해왔다.
2.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차가우라고 (열정없음) 말씀하실 이유는 없다. 미지근함이라도 차가움 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주석을 확인해보니 이것이 라오디게아 지역의 특징이었다.
3. “히에라볼리의 뜨거운 물에는 치유 효과가 있었고, 골로새의 차가운 물은 순수하고 마실만하며 생기를 복돋아 주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라오디게아 지역은 미지근한 물만을 공급받았다는 증거가 있다. 그 물은 맛이 없는 데다 구토를 유발했다. 사실 라오디게아는 그 위치가 상업에 유리하여 도시로 성장 했지만, 좋은 물을 공급 받는 곳으로 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물을 공급 받기 위해 수도관을 놓으려고 해도 미지근하고 구토가 나는 물만 얻을 뿐이었다. 그리스도를 향한 그들의 행동의 결과가 그들이 가진 물과 같았다" NIGCT 요한계시록에서 발췌
4. 결국은 그들의 믿음이 미지근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행위가 아멘이고,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고,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그리스도께 합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가식적인 행동에 예수님은 토해버리고 싶으셨던 것이다.
5. 치유 효과가 있는 뜨거운 물처럼 살아가든지 아니면 순수하고 마실만하여 생기를 복돋을 수 있는 차가운 물처럼 살아가라는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가식적인 삶은 예수님께서 싫어하신다는 것이다.
6. 이신칭의는 너무나도 중요한 교리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 하지만 너무나도 많은 순간 믿음만을 강조하여 우리의 행위는 그리스도께서 토해버리고 싶으실만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믿음을 가졌다는 것으로 스스로를 자위하지 않는가?
7. 뜨거운 믿음만 가지면 되는가? 스스로 뜨거운 믿음을 가졌다고 자부 하면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무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기독교를 무시당하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땅에 떨어지게 한 것이 아닌가?
8. 세상 사람들이 관심도 없는 교리의 옳고 그름을 싸우느라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게 되는 통로인 우리의 삶은 미지근하지 않았는가? 오늘 나의 삶의 모습은 어떠한가? 치유효과가 있는 뜨거운 물과 같은가? 생기를 복돋아 주는 시원한 물과 같은가? 아니면 미지근하여 먹고 나면 구토가 나는 물과 같은 삶인가?
9. 수쿰빛 언약교회에서, 가르치는 랏끄라방 감리교 신학교, 또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방콕에서 나는 어떠한 존재인가? 뜨거운 물인가? 차가운 물인가? 아니면 미지근하여 토할것 같은 물인가? 믿음이 중요하지만 그 믿음만큼 삶이 또한 중요함을 잊지 말자. 야고보서의 말씀을 기억하자.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약 2:22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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