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일 1:1-10 연약해도 사랑하면 사랑의 관계가 확장된다
1. 요한이 그가 보고 들은 바를 전하는 것은 ‘사귐'을 위해서이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3절 상반절) 이 사귐이라는 것은 사랑의 관계의 확장이다.
2. 그런데 그가 복음을 전한 것은 단순히 성도간의 교제 만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3절 하반절) 복음의 교제는 성도간의 교제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님과의 교제를 의미한다. 이 사귐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로 또한 확장된다.
3.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교제가 없는 자들로 하여금 교제하는 자리로 나아오게 하기 위함이다. 복음은 믿는 사람들 사이,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의 교제를 회복시킨다. 그리고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시킨다.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고 확장되는 것이다 .
4. 이러한 측면에서 나는 하나님과 그리고 이웃들과 어떠한 교제를 하고 있는지, 정말 내가 복음을 가진 자로써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이 사랑의 관계를 확장하고 있는 자인가?
5. 부활절 주일 저녁에 예전에 기숙사에서 섬기던 자매로 부터 연락이 왔다. 그냥 얼굴만 보고 잠시만 만나고 가고 싶다고.. 너무나도 아끼는 자매이지만 여러 이유에서 연락을 잘 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흔쾌히 오라고 했고, 함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아래는 페이스북에 남긴 글 중의 일부이다.
6. “복음과 마음, 그리고 삶을 나누었던 영적인 딸 같은 자매이고, 지금은 태국 공립학교 선생님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이 자매가 태국 설날이라고 찾아왔다. 꽃을 가져오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며 대신 과일을 가져왔다.
나이 자매가 느낀 그런 미안함과는 달리 나이 자매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꽃과 같았고. 나이 자매의 삶 그 자체가 나의 지난 선교 첫 번째 텀인 2011-2014년을 아름답게 설명해주고 있는 것 같아서 너무 행복한 시간이었고, 나이 자매와 짧은 나눔과 삶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선교사로서의 첫 텀, 그 시절 내가 복음을 가진 자로써 나이 자매 앞에서 충분히 살아내지 못했음에 미안했고, 지금은 또 나에게 주어진 다른 영혼들을 돌본다는 핑계로 돌아보지 못했음이 미안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복음을 붙들고 교회를 섬기며 살아가는 나이 자매를 통해서 충분한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
7. 내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의 확장이 일어난 것이었다. 내가 잘해서도 아니고 그저 주님의 은혜로 일어난 일이었다. 요한이 말한 것 처럼 나이 자매에게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랑의 확장이 일어났고, 이것은 누군가가 잘해서가 나타는 일이 아니라 오로지 복음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일이다.
8. 내가 좀 더 잘하면 사랑의 관계가 좀 더 잘 형성되고 확장되겠지만, 감사한 것은 내가 잘 하지 못하고 부족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이 사귐을 확장해가고 계시다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대하면서 절망감이 먼저 찾아왔다. 나는 복음을 가졌지만 충분히 복음적으로 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부활절 주일에 있었던 일, 또 내 삶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생각해보니 절망이 아니라 소망이 생기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부족한 중에도 충성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귐이 사랑의 관계가 확장되어 가기 때문이다.
9. 부족하지만 오늘을 또 그렇게 살아가기 원한다.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며 사랑하기 원한다. 연약해도 사랑하기로 결정한다. 넘어저도 사랑하기로 결정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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