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9. 4. 23.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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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9:1-24 읽는 말씀이 아니라 행하는 말씀으로

 

시편 119편은 말씀과 율법에 대한 내용이다. 율법과 은혜를 비교를 한 사도바울의 신약에 익숙한 나로써는 이 시편 119편이 말하는 토라(율법) 사랑이 그렇게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율법은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고, 율법은 은혜(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우리를 지도하는 몽학선생에 불과한 것인데, 시편의 기자는 왜 이리 율법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있을까? 

 

이 율법이 무엇인지를 한참을 고민했다. 이 율법이 의미하는 것이 꼭 '무엇을 해라, 무엇을 하지 말아라’ 식의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들의 나열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당연히 그 계명, 그 자체도 포함이 되겠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이 본문에서 말하는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말씀 그 자체이다. ‘성경'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그 ‘계시’ 즉, 우리가 듣고, 읽을 수 있는 형태로 계시된 그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율법이라고 생각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비롯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그 모든 말씀이 여기서 말하는 율법이다. 

 

그래서 시편의 기자는 18절에서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라고 말하는 것이다. 단순히 무엇을 지키고 안 지키고의 계명의 문제라면 그 안에서 무슨 놀라운 것을 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칭한다. 그런데 여기까지 묵상하고 나니 '나는 이 말씀을 정말로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정말 이 말씀을 지키고 따르고 있는가?' 의 질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것이 율법이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든 나는 정말 이 말씀을, 이 율법을 사랑하는가? 정말로 이 말씀을 따르고 있는가? 지식적으로 이것이 율법인지 말씀인지를 구별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오늘 이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 가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신학을 공부하고, 책을 읽으면서 머리는 크고 있는데, 삶은 그 큰 머리를 따라가고 있지 않은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 단지 읽고 묵상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지는 않는가? 정말 나는 말씀을 사랑하는가? 그 말씀을 사랑하여 순종하는가?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내가 되기를 원한다. 지식적으로 말씀을 더 깊이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는 말씀이 내 삶에 영향력을 미치며 그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는데 까지 이르기를 원한다.

 

오늘도 읽는 말씀이, 묵상하는 말씀이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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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