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5. 3. 28.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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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 6:1-12 표정에서 드러나는 거룩

1. 오늘 본문은 나실인의 법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나실인은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다. (2절) 나실인이라고 하면 우리는 보통 삼손을 떠올리게 된다. 삼손의 모습을 생각하면 나실인에 대해서 이해하기 쉽다.

2. 나실인은 지켜야 할 것이 있는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아야 하고, 포도는 그 자체로, 소산이나 씨도 껍질도 먹지 말아야 한다 (3-4절). 그리고 절대 머리에 칼을 대지 말아야 한다.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절대로 그의 머리에 대지 말것이라…" (5절 상반부)

3. 앞에 포도주, 독주, 포도에 대한 계명에는 그냥 먹지 말라고 되어 있는데, 머리에 삭도를 대는 계명에는 '절대로'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 이것은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길게 유지하는 그 모습이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되게 보여지는 헌신의 모양이고, 거룩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외적인 표현이기 때문일 것이다. 

4.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지만 사람은 외모를 볼 수 밖에 없다. 그 안에 어떤 마음이 있는지, 어떤 생각과 헌신이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내적인 헌신을 외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머리를 기르는 것이기에 나실인들은 머리에 삭도를 '절대로' 대지 말아야 한 것이다.

5.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과시하기 위함이 아닌 외적인 표현이 우리의 마음을 지켜 줄 때가 있다. 외적으로 단정하게 옷을 입고, 바르게 행동하는 것이 나의 마음과 생각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6. 이제 우리는 머리를 기를 필요는 없다. 머리를 기른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하나님을 위해 나를 표현할 방법이 될 수도 없다. 머리를 기른 사람이 너무 많지 않은가?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외적인 모습의 표현으로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임을 드러내야 한다. 

7. 긴 머리는 아니지만 그리스도 인으로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드러낼 수 있을 적절한 옷차림, 외모, 말투, 행동이 우리에게는 여전히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과 뒤섞여 있을 때 외모적으로 특별히 구분되지 않더라도 나의 말과 행동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내가 구별된 사람임을, 내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임을 드러낼 수 있다. 

8. 개성의 표현이 다양성으로 나타나는 시대에서 옷차림은 적당한 수준이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말과 행동, 그리고 표정은 특별히 나에게 매우 중요하다. 아내에게 자주 이야기 듣는 것은 내가 잘 웃지 않는다는 것이고, 웃지 않을 때 화가 난 표정이라는 것이다. 아내도 아이들도 내가 화가 났을까봐 자주 신경이 쓰인다는 것이다. 나는 정말 아닌데… 그러나 가족들의 평가는내가 가족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는 잘 웃는다는 것이다. 아마 내가 더 편하게 느껴지고, 정신을 꽉 붙들지 않아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9. 나의 평소의 표정이 그리스도를 드러내지 못한다면, 나의 평소의 얼굴에 웃음이 없다면 내가 아무리 묵상을 열심히 하고, 주님의 일에 헌신된다고 하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 삶이, 내 표정이 예수를 말해야 하고, 예수님을 드러내야 한다. 나실인의 계명을 보며 내 표정이 구별되고, 내 말과 행동이 구별되는 자가 되기로 다시 한번 다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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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5. 3. 25.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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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 4:34-49 삶으로 말하는 자

1. 모세는 아론과 함께 레위 사람의 인구 조사를 실시한다. 37절의 시작 부분과 41절의 시작부분이 동일한 것을 보게 된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이 반복된다. "이는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2. 물론 37절과 41절에서 다른 부분은 "모세에게 명령하신대로"라는 구절이 37절에는 포함이 되어 있고, 41절에는 포함이 되어 있지 않다는 차이점이 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행하였다. 

3. 이는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순종하거나 불순종하는 것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말씀하시면 순종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4. 때로는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하면서도 순종과 불순종을 내가 결정하려고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혹은 내가 정확하게 들은 것이 확실한가? 라는 질문을 하면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고 있을 때도 많지 않은가? 모세와 아론에게는 그런 의심도 없었고, 그저 순종만이 존재했다. 

5. 그러나 37절과 41절이 다른 부분을 보면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지만 아론은 직접 듣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통 하나님께서 부부에게 같은 마음을 주시지만 때로는 남편이나 아내 둘 중에 한 사람이 먼저 듣는 경우가 있다. 내가 직접 듣지 못할 때 우리의 태도는 어때야 하는지를 아론을 통해서 보게 된다. 

6. 아론은 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것을 진심으로 신뢰했고, 또 그런 모습을 계속해서 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아론은 자신이 직접 듣지 못했더라도 모세가 말하는 것이라면 신뢰했고, 또 순종했다. 아마도 어릴 때 부터 봐왔던 모세의 모습이 아니라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 되어 버린 변화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7. 내가 직접 듣지 못해도 우리는 순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려면 그 사람에 대한 신뢰, 즉 그 사람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또한 그 사람의 인격이 성령 안에서 열매 맺는 것을 볼 때에만 가능하다. 인격도 개 차반, 단 한 번도 주님과의 교제가 없는 사람의 말을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8. 목사로 선교사로 살아가는 나에게는 때로 하나님께서 지금 하고 계신 말씀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설교를 통해, 대화를 통해 말해야 할 때가 있다. 나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기 위해 나의 욕망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그와 동시에 나의 삶이 말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 분 안에 있음이, 십자가의 능력으로 인해 내 삶이 부족하더라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이 보여져야지만 내 설교에, 내 말에 신뢰가 생기게 될 것이다. 오늘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하며,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9. 아론이 보았던 모세와 같이 내 삶에 그리스도의 흔적이 남아 있길 원한다. 내 혈기대로 말하고, 혈기대로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신 것 처럼 그렇게 내 삶에 조금이라도 그 분의 흔적이 남길 원한다. 모세와 같이 말로 말하는 자가 아니라 삶으로 말하는 자가 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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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5. 3. 25.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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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 3:40-51 숫자에 빠지면 영혼을 잃어버린다.

1. 모든 물건이 만든 자에게 소유권이 귀속됨과 같이 우리 모두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특별히 레위인들에게 맏아들의 지위를 주셨다. 그들이 제사장의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 원래라면 지파와 상관없이 맏아들 모두는 하나님의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레위인들을 그 맏아들의 역할을 하게 하고, 다른 지파들은 그 혜택을 보게 하셨다. "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가족 중 모든 처음 태어난 것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내게 돌리라" (41절).

3. 레위인들이 맏아들의 역할로 하나님의 전에서 섬기는 대신 다른 지파의 맏아들들은 다른 역할을 맡아서 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인들의 숫자보다 이스라엘의 맏아들들이 더 많기에 그 넘어가는 숫자에 대해서는 돈으로 대가를 치루게 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태어난 자가 레위인보다 이백칠심삼 명이 더 많은즉 속전으로 한 사람에 다섯 세겔씩 받되 성소의 세겔로 받으라 한 세겔은 이십 게라니라" (46-47절).

4. 전체 인구에 비하면 맏아들 273명은 그리 많은 숫자가 아닌것 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숫자를 정확하게 셈하시고, 정확하게 속전을 하도록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것 하나도 퉁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5. 때로 숫자는 우리로 하여금 그 숫자 이면의 것들을 보지 못하게 한다. 273명이라고 하면 전체에 비하면 별거 아닌 것 처럼 느껴지고 그 정도면 대충 처리해도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273명에게는 각각의 인생과 스토리, 삶이 있으며, 숫자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대할 때에만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게 된다.

6. 사람을 숫자로 대해서는 안된다. 그 숫자가 2-3명이든, 10명이든 간에 사람을 숫자로 볼 때에 함정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심과 같이 우리도 숫자가 아니라 한 영혼, 한 영혼에게 집중해야 한다. 그 어느 누구도 예외가 되어서는 안된다. 

7. 때로는 숫자나 통계의 함정에 빠질 때가 있다. 교회의 행사 중에 대부분이 참석하는데 한 두 명이 못 나오면 대부분이 참석한 것에 내 마음이 뿌듯하고 감사할 때가 있다. 행사 사진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더 그럴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 숫자에 현혹되지 말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 숫자 넘어의 한 영혼, 한 사람에게 집중하고 찾아가고 마음을 나누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8.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다. 요 4장을 보면 그 바쁜 공생애 중에도 사마리아로 의도적으로 가셔서 한 여인을 만나셨다. 나사로의 집으로 방문하셔서 마리아와 마르다를 만나셨다. 예수님은 사람을 숫자로 본 것이 아니라 한 영혼으로 보셨기 때문이다. 나는 한 영혼으로 사람을 대하고 있는가? 혹시 그들을 숫자로 대하고 있진 않은가?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으로 대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건 아닌가?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의 글귀가 떠오른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9. 그 한 사람의 일생을, 그 한 사람의 영혼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역자가 되기 원한다. 사람을 숫자로 보는 어리석음이 나의 삶에서 사라지기 원한다. 모든 장자들을 위해 돈까지 지불하라고 하셨던 민수기의 하나님, 그리고 한 영혼을 위해 이 땅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기억하며 나도 그렇게 살아가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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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5. 3. 25.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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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 2:1-34 내 삶의 중심, 오직 예수

1. 오늘 본문 같은 본문은 묵상하기가 참 어렵다. 그림으로 그리면 명확해 보이는데 그것을 글로 설명하니 읽어도 눈에 쏙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은 진 편성 및 행군 순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전쟁을 할지도 모르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명령이니 더 나와는 상관없이 느껴진다. 

2.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대략 이러하다. 이스라엘의 진은 레위인의 성막을 중심에 두고 각 방향마다 세 지파씩을 위치시킨다. 본문의 순서에 따르면 동쪽은 유다, 잇사갈, 스불론, 남쪽은 르우벤, 시므온, 갓, 그리고 가운데 레위 지파의 성막이 위치하고, 서쪽에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북쪽에는 단, 아셀, 납달리 지파를 위치시킨다.

3. 이 진에서 가장 중심은 위치적으로나 기능적으로 바로 성막이다.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 바로  그 자리가 가장 중심이다. 그런데 이 진이 의미하는 것은 다른게 아니라 전쟁시 싸우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그 중심에 전쟁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할 것 같은 성막이 위치하다니 좀 의아하게 느껴진다. 

4. 그런데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정체성이자, 이스라엘의 방향성이다. 컨트롤 타워는 어느 지파가 맡는 것이 아니라 성막에 임재하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로 순종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하는 것 같은 그 성막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바로 그 자리라는 것이다. 

5. 이것은 이스라엘 만의 정체성이 아니라 바로 나의 정체성이어야 한다. 내가 원하는데로, 내가 하고 싶은데로 살아가는 것이 나의 정체성이서는 안된다. 내 삶의 중심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하나님께서 가라하시면 가고, 서라 하시면 서는게 내가 해야 할 일이다. 

6. 그리고 승부는 세상의 관점에서 봤을 때 유리해 보이는 그 어떤 것, 예를 들면 병력이나 말의 숫자에 달린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한다. 재력이나 실력 등이 승부를 가르는 것이 아니다. 이기고 지는 것은 오직 이 세상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한다. 

7. 재력이나 실력을 쌓아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야만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또 삶의 전반적인 태도 속에서 내가 의지하는 것이 재력이나 실력이 되어서는 안되고, 오직 하나님이어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8. 오늘 내 삶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는가? 내 자아인가? 아니면 하나님이신가? 나는 무엇을 의지하는가? 세상적인 기준에서 강해보이고, 좋아보이는 재력과 실력인가? 아니면 오직 나에게 승리를 주실수 있는 하나님 한 분인가? 집을 구하면서 답답함을 느낀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집과 위로의 처소를 말씀하셨는데 뭔가 지지부진하다. 브로커는 연락을 해도 답이 없다. 그러니 자꾸 처음 주신 마음을 놓고 싶고, 내 마음대로 결정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인간적인 방법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여전히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들을 기대하며 그 분을 의지하는 것이다. 혹 내 기대와 다르더라도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여전히 그 분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9. 대학교 때 부터 많이 들었던 김명식의 '오직예수'라는 찬양이 계속 맘에 멤돈다. 내 삶이 오직 예수만을 의지하게 되기를… 주님이 주신 마음을 굳게 붙들고 재력이나 실력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예수만 의지하는 하루가 되기를 결정한다. 

10. 오늘도 샬롬

https://youtu.be/aH28jaCoPe8?si=iVf7nBkFPb1n60N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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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5. 3. 18.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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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 1:47-54 원 팀, 한 선교 공동체

1. 민수기 1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숫자를 계수하고 있다. 백성들의 숫자를 계수하는 이유는 표제를 보면 '싸움에 나갈 만한 자를 계수'하기 위해서이다. 성인 남자의 숫자가 곧 병사의 숫자였고, 그것이 그들이 힘이었다. 이스라엘은 총 12지파 중에 오늘 본문은 레위 지파에 관해서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레위인은 숫자를 세지 말라고 하신다. "이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레위 지파만은 계수하지 말며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계수 중에 넣지 말고" (48-49절) 

2.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레위인은 싸움에 나갈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12지파 중에 레위 지파가 빠지면 한 지파의 숫자만큼이 병사의 숫자에 포함되지 않고, 이는 1/12만큼의 손해이다. 이렇게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레위자손을 계수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에게는 다른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3. 그것은 성막에 대한 책임이다. "그들에게 증거의 성막과 그 모든 기구와 그 모든 부속품을 관리하게 하라 그들은 그 성막과 그 모든 기구를 운반하며 거기서 봉사하며 성막 주이에 진을 칠지며" (50절). 53절 후반부는 이렇게 말씀한다. "…레위인은 증거의 성막에 대한 책임을 지킬지니라 하셨음이라"

4. 1/12의 병력 손실을 볼지라도 그들은 반드시 해야할 일이 있었기에, 그리고 그 일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장막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이것이 엄청나게 특별하고 중요하며 다른 일들과 구별되는 일이고,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기 보다는 (결코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된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레위인들을 계수하지 않으면서까지 그 일을 맡기셨다. 

5. 하나님께서 레위인들을 장막을 위해 구별하신 것은 맞다. 그러나 그 일이 레위인들만이 할 수 있다거나, 그렇기 때문에 레위인들이 다른 이들보다 낫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그저 그들에게 맡겨주신 일이고, 그렇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충성인 것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전 4:2)

6. 그것이 무슨 일이든지 관계없이 나에게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이라면 우리는 충성해야 한다. 조금도 우월의식을 가지거나 열등감을 가져서도 안된다. 나에게 주신 구역 안에서 나에게 맡기신 일을 충성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질 것이다. 사역을 맡겨주신 자는 사역하는대로, 일을 맡겨주신 자는 일하는데로 충성할 뿐이다. 

7. 어느 것이 우월하고 혹은 어느 것이 열등하고를 고민하지 말고, 맡겨주신 것에 최선을 다하고 책임을 지켜야만 한다 (53절). 왜냐하면 내게 맡기신 것이 하나님의 베스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위인은 혼자서는 결코 생존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다른 지파들이 자신들의 십일조를 통해 레위인들을 부양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법칙은 내가 벌어서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책임지며, 공동의 목표를 위해 책임을 달리 지는 것이다.

8. 선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가정과 같이 필드에서 직접 사역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선교사들과 사역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있고, 또 재정적으로 서포트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주님께 받을 상급은 다르지 않다. 필드에 있다고 더 받거나, 후원했다고 덜 받는게 아니다. 이는 축구팀이 우승을 하면 스트라이커도, 수비도, 후보도 다 같이 우승컵을 드는 것과 동일한 이치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한 팀이고, 한 몸이고, 한 선교 공동체임을 이해하고 함께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같이 달음질 하는 것이다. 

9. 어느 자리로 부르심을 받았든지 간에 한 팀으로 함께 달음질 하길 원한다. 특별히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그 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 함께 달음질 할 수 있음에 참 감사하다. 그리고 그 길을 함께 끝까지 완주하여 그 길 끝에서 기다리시는 주님으로부터 함께 칭찬받기 원한다.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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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5. 3. 14.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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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21:1-14 예수님과의 식탁교제

1. 예수님께서 또 다시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1-2절)

2. 이미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 누구도 예수님이신 줄을 알아보지 못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인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4절)

3. 늘 이 부분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왜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그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동거동락했던 사이가 아니었는가? 예수님의 모습이 달라지기라도 했는가? 성경은 그에 대한 힌트를 주지 않는다. 다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못 알아본 것은 단지 이 본문만이 아니라 다른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4. 제자들이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못했던 예수님께서는 물고기를 밤새 잡지 못하던 전문가 어부들인 제자들에게 조언을 하신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6절 상반부) 그랬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잡혔다 (6절 하반부).

5. 그런데 물고기를 많이 잡고 나니 그제서야 제자들은 그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7절 상반부). 부활하신 주님을 이미 만났지만 알아보지 못하고, 평생 물고기를 잡았지만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이해되지 않는 일 투성이의 하루의 끝에 그제서야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 이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었다.

6. 예수님께서 우리의 상황 가운데 늘 동행하고, 함께 하시지만 우리는 잘 알아보지 못한다. 때로는 돕는 손길로, 때로는 보호하는 손길로 늘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우리는 알아보지 못한다. 오히려 그 주님을 외면하고, 멀리하고, 그러면서도 뭔가 내 뜻대로 잘 안풀리면 주님을 원망하기 시작한다. 내가 신경도 쓰지 않았고 알아보지도 못했던 그 주님을 말이다.

7. 물고기 잡는 일에 전문가였던 제자들처럼 우리 또한 내가 전문가인 것 처럼, 내가 이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처럼 하기 시작한다. 밤새 애쓴다. 아무런 성과가 없다. 그러면 또 주님을 원망한다. 그러다가 주님의 은혜로 그 일이 해결되고 나면 그제서야 항상 내 옆에 계시며, 나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알아보기 시작한다. 이것이 제자들이었고, 나의 모습이다.

8.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을(또 그런 나를) 꾸짖지 않으셨다. 오히려 함께 식사를 하자고 초청 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12절 상반부)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3절)" 예수님은 우리를 예수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식탁으로 초청하셔서 함께 식사를 나누신다. 꾸짖지도 나무라지도 않으신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충만한 이 자리가 바로 이 아버지의 품이요 아버지의 집이다.

9. 방콕에 다시 돌아가서 살 집을 계속 구하고 있는 중이다. 적당한 집을 찾으면서 고민이 많다. 가장 힘든 문제는 재정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 가정의 집이 계속 아버지 품, 아버지 집의 역할을 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우리 가정은 계속 집을 오픈하며 성도들을 식탁으로 초청하여 먹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다. 집이 단순한 우리 가정이 거주만 하는 공간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가족됨을 누리고, 태국의 믿음의 형제, 자매들에게 사랑을 나누고, 또 믿음이 없고 연약한 자들을 세워가는 장소로 사용해왔다. 그래서 좀 넓은 집을 구하고 싶었는데, 언제나 렌트비가 문제이다. 그 렌트비 앞에서 자꾸만 타협하려고 하게 된다.

10. 예수님께서 알아보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제자들을 불러서 먹이시고, 그 식탁을 통해 위로하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 가정이 거주할 공간이 이런 아버지의 품, 아버지의 집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재정이 문제가 아니다. 아버지의 집을 세워가려는 마음이 문제이다. 그 마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소망하는 집을 하나님께서 하락하시길, 또 필요한 재정을 채워주시길 함께 기도해주시길 부탁드린다.

11.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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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5. 3. 13.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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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20:24-31 손가락을 그 성흔에 넣을 기회를 버릴 만큼 강렬한 만남

1.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함께 있지 않았다 (24절).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믿을 수 없었고, 그는 체험을 하면 믿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5절).

2. 도마의 이야기는 이해가 먼저되어야 믿음이 따라온다고 말하는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과 유사하다. 하나님과 성경을 이해하려고 하는 시도와 노력은 너무나도 멋진 것이다. 이해없이 그저 강요로 믿으라고만 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3. 그러나, 그런 도마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신다. 그 분은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과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닫힌 문 속에 나타나셔서 샬롬을 말씀하신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6절)

4. 그리고 도마에게 체험을 통해 이해할 수 있도록 초청하신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7절) 예수님의 초청은 매우 친절했다. 도마가 제자들에게 했던 말을 아시고, 그 말 그대로 해보라고 초청하신 것이다.

5. 도마에게는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지금 닫힌 문들 사이로 나타나신 그 분, 이미 열하루 전에 돌아가셨고, 여드레 전에 부활하신 그 분이 지금 내 앞에 서 계시고, 나의 믿음의 고민들을 아시고 그것을 확인해보고 나서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6. 그런데 도마는 그 손의 못 자국에, 옆구리의 창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보지 않았다. 혼돈과 카오스 중에 있는 그에게 샬롬을 주시는 분을 만났기 때문이다. 죽으셨지만 지금 부활하여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하고 나니 이성적인 고민과 이해되지 않는 모든 것들이 그 즉시로 해결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손가락을 넣어볼 기회를 거절한 것이다.

7. 이성과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은 매우 아름답다. 그 자체로도 매우 중요하다. 특별히 믿음을 강조하는 기존의 교회 분위기는 이성을 억압하였고, 무조건 '믿습니다' 만이 바른 믿음의 자세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의심은 믿음과 반대되는 감정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지성과 이성으로 탐구하고 알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일이다.

8.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방법은 기질과 성품에 따라 모든 사람이 다 다른 방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은 주로 묵상을 통해서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섬세하게 나에게 말씀하시는 그 분을 만난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예배이고, 어떤 사람은 기도이며,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드라마를 보는 것일 수도 있다. 수 많은 다른 방법들이 있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기독교에 대한 지적으로 탐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지적인 방법을 넘어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각 개인의 고유한 방법이 있어야만 우리는 손을 넣어볼 기회를 거절할 수도 있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믿는 자가 될 수 있다.

9. 도마는 아마도 그 이후 단 한 번도 '아, 그 때 손을 넣어볼걸' 이라며 후회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순교하기 까지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 분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잊을 수 없는 그 시간이 손을 넣어보는 경험보다도 더 강렬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바로 그 경험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10. 나는 오늘 그 경험을 하고 있는가? 단순히 이해되지 않고, 믿어지지 않는 차원이 아니라 손가락을 넣어볼 수도 있는 그 기회를 버릴 만큼의 강렬한 예수님과의 만남과 사귐이 있는가? 그런 만남이 있는 오늘 하루가 되기 원한다.

11.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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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5. 3. 12.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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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20:11-23 두려워 말라. 샬롬이다.

1.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마리아는 천사를 통해 듣게 되었다 (11-18절). 처음에는 마리아도 이것이 정말인지에 대한 의심이 있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마리아는 이제 확신이 생겼다. 그래서 그녀는 이제 "내가 주를 보았다"라고 담대하게 선포하게 된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18절).

2. 제자들은 자신들의 스승이 돌아가신 그 상황, 그리고 이제 앞으로 있을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인해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찾아오셨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19절).

3. 예수님께서는 별다른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 닫힌 문들 속에 기적적으로 나타나셔서 그저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을까? 스승님도 안계시고,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핍박하게 될 그 상황에 예수님께서는 '샬롬'을 이야기 하고 계신 것이다.

4. 지금의 어려움을 이길 힘이 없는 사람이 하는 말은 위로가 안된다. 1억 빚이 있는데, 무일푼의 사람이 와서 나에게 "아무 걱정마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라고 말한다고 해서 나에게 위로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채무를 갚아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수천억대의 부자가 찾아와서 "아무 걱정마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라고 말한다면 우리가 느끼는 위로와 안도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5. 마찬가지이다.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의 왕이시고, 바다도 잠잠케 하시는 분이시며, 이제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이기지 못했던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이다. 그런 놀라우신 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그 분이 주시는 평강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 (요 14:27)이다. 그러니 제자들이 받았을 위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6. 진정한 샬롬을 주실 수 있는 분이 찾아오셔서 두려워 떨고 있는 자들에게 샬롬을 이야기 하고 계신 상황인 것이다.

7.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샬롬이 없는 시대이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다. 정치적인 불안정, 고물가, 고환율, AI의 등장으로 인한 미래에 대한 염려, 불확신한 경제 등등의 모든 상황이 우리를 두려워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제자들처럼 문을 걸어잠그고 세상과는 분리되어 내 한 몸의 안전을 지키며 살아가고 싶어할 수도 있다.

8. 그런 우리에게 오늘 가장 크시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말씀하신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샬롬의 근원이신 분께서 그 샬롬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세상 보다 온 우주 보다 더 크신 분이, 나의 내일을 아시는 분이 오늘 우리를 찾아오셔서 샬롬을 말씀하신다. 여전히 내 생각을 의지하고, 내 지혜를 의지하며 '이런 상황에서 샬롬이 있을 수 있겠어?'라고 냉소적으로 반응할 것인가? 아니면 세상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샬롬에 나를 맡기고 샬롬을 누리며 살아갈 것인가?

9.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이유는 나의 능력이나 지혜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하시고 아름다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분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 주눅들지 말자. 두려워하지 말자. 세상보다 더 크신 분이 내 안에 계신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요일 4:4)

10. 그리스도의 샬롬을 누리는 오늘 하루가 되길,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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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5. 3. 11.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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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20:1-10 사랑이 오셨다

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나서 처음 맞이하는 안식일 이후 첫 날이다 (1절). 아직 어두움이 채 가시지 않았을 때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찾아왔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1절).

2. 마리아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들을 아직 다 이해하지 못하였다. 물론 마리아 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9절)

3. 그러나 마리아는 안식일 정결의식에 해당되지 않은 가장 빠른 시간으로 여겨지는 안식 후 첫날 아침 아주 일찍 예수님을 찾아왔다. 예수님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이성적인 이해를 뛰어넘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온 것은 그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 곁에 있고 싶었던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 그런데 마리아의 예수님을 향한 그 뜨거운 사랑이 종교적, 교리적, 이성적 경계를 뛰어 넘어 모든 인류에게 소망을 주시는 예수님의 부활의 첫 목격자가 되도록 만들었다. 그녀는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불리던 베드로와 요한 보다도 오히려 더 빨리 무덤으로 찾아왔다. 무덤의 돌문이 열린 것을 가장 처음 본 사람이 된 것이다.

5. 막달라 마리아가 누구인가? 그녀는 예수님께서 일곱 귀신으로 부터 해방을 시켜 준 여자였다 (눅 8:2). 그녀는 자신을 고쳐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따랐던 예수님의 제자였다. 그래서 그녀는 항상 예수님의 주변에서 멤돌았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도 대부분의 제자들은 도망쳤지만 그녀는 끝까지 남아서 예수님을 지켜보았다.

6. 그녀를 부활의 첫 증인이 되게 한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녀를 오늘 예수님의 무덤으로 가장 먼저 오게 만들었을까? 본문을 보면 그것은 사랑이었다. 예수님을 정말 구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메시아로 이해했는지, 믿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즉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교리적인 지식도 아니었고, 교회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 같은 믿음도 아니었다. 오직 사랑이었다.

7. 사랑이 없으면 교리도, 지식도, 이성도, 믿음도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사랑해야 순종하게 되고, 사랑해야 이해하게 되고, 사랑해야 믿을 수 있게 된다. 이전에 요한복음을 묵상하면서 적었던 제목 중에 '사랑해야 제자다', '사랑하지 않으면 사용하게 된다' 처럼, 사랑할 때 우리는 변화를 경험하게 되고, 예수님을 따라가게 되는 존재들이다.

8.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없는 것은… 그것이 믿음이든, 소망이든, 교리이든, 이성이든, 교회이든지 간에…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사랑으로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분은 길로, 진리로, 생명으로 오시지 아니하시고, 사랑으로 오셨다.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참 사랑으로 오셨다.

9. 사랑이 없으면 모든 지식도, 모든 예언도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고전 13:1-2) 아무것도 아니면서 무엇인가를 가진 자 처럼 살아가지 말고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자.

10. 예수를 사랑하면 예수와 함께 걸어가고, 예수와 함께 살아가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우리의 이웃들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교회를 이야기하고, 믿음과 소망을 이야기 하며, 복음을 말할 수도 있다 (어쩌면 이게 우리와 우리가 섬기고 있는 교회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내 삶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원하며 더 뜨겁게, 예수님만을 사랑하는 자로 또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기 원한다.

11.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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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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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19:14-22 사랑하지 않으면 사용하게 된다

1. 오늘 본문은 참으로 아이러니 한 장면을 보여 준다. 메시아를 계속해서 기다렸던 유대인들은 그 메시아를 자신들의 왕으로 부르기를 거절하였지만, 유대인들 다스리던 (메시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빌라도는 그를 유대인의 왕이라 부른다.

2.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14절) 그러나 유대인들은 거절한다.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15절 하반부)

3. 오랫동안 메시아를 기다려왔던 유대인들에게는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지 못하는 모습의 메시아는 필요가 없었다. 정치적으로 자신들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존재여야만 했다. 그래서 그들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4. 반면에 빌라도는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부른다 (21-22절). 그러나 그가 예수를 유대인으로 왕으로 부른 것은 예수를 진정 유대인의 왕으로 믿었다고는 볼 수 없다. 예수가 죄가 없는 사람임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고, 유대인들에게 잘못을 돌리며 조롱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수를 왕으로 불렀다.

5. 결국 예수를 왕으로 부르지 않았던 유대인도, 예수를 왕으로 불렀던 빌라도도 자신들이 가졌던 생각과 목적으로 인해 예수를 왕으로,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6. 예수를 내 삶의 왕으로, 주님으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결국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 예수님을 이용해서 이루려고 하는 목적을 내려 놓아야 한다. 이러한 혹은 저러한 이유로 예수님을 나의 필요에 따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그 자체가 내 삶의 이유와 목적이 되어야만 그 분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수 있다.

7. 나의 삶에 예수님의 자리는 어디인가? 유대인들과 빌라도와 같이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예수님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님이 왕이 되셔야 하는 이유가 혹시 나의 이익과 만족 때문은 아닌가? 나는 그 분을 사랑하려고 하는가? 아니면 사용하려고 하는가?

8. 예수님을 내 삶에 어떤 부분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기 위해서는 뜨겁게 사랑해야만 한다. 사랑할 때에만 변화된다. 사랑할 때에만 그 사랑에 의해 내가 바뀌게 된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나의 유익을 위해서 희생시키면서까지 사용할 순 없지 않은가?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사용하려고 드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말씀 앞에 선다. 예수님의 크신 사랑 앞에 서면 내가 어찌 그 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을 사용하는 자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로 오늘도 살아내기 원한다.

9. 태국에 비자를 연장하러 다녀오면서 수쿰빛 언약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할 수 있었다. 오랫만에 만나니 교회의 형제, 자매들을 만나니 너무 좋았다. 어서 돌아가서 함께 교회를 세워가고, 이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워가는 일을 계속해서 해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다음 사역의 모습이 너무 기대가 되었다. 그렇기에 그들 옆에서 예수님을 사용하려고 하는 자의 모습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로 서 있어야겠단 다짐을 다시 하게 된다. 예수님을 가장 뜨겁게 사랑하는 자로 태국인들을 섬기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사진은 금요일 케어그룹 사진입니다. 좁 형제가 계속해서 잘 섬겨주고 있습니다. 왓타텅 학생들이 많이 참석하고 있고, 인원이 늘어나서 감사했습니다. 
**기도해주신 덕분에 태국에 잘 다녀왔습니다. 1년을 체류할 비자도 잘 받았고, 수쿰빛 언약교회 형제, 자매들도 잘 만나고 교제하고 왔습니다. 수쿰빛 언약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말씀 안에서 계속 성장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특별히 피터 전도사님이 직장을 그만두고 풀타임으로 사역을 하기로 했는데, 교회가 사례비를 적절하게 드릴 수 있게 재정적으로 부족하지 않도록, 또 새로운 예배 장소를 위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늘 감사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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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