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22.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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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01:1-8 삶의 주어가 바뀌어야한다. 

이 시는 다윗의 시이다. 다윗이 ‘내가, 혹은 나’ 라는 화자로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것이 다윗일리 없는 시이다. 왜냐하면 1절에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는 것은 다윗이 아니라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적 혹은 메시아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이다. 인자와 정의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만나게 된다. 2절에서도 다윗은 완전한 길과 완전한 마음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그 어떠한 인간의 길도 완전함과는 거리가 멀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아담의 죄 이후 타락한 죄된 본성으로 날마다 살아가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정직과 공의를 따라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내 안에 있는 악한 마음들을 (3-5절),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이 마음들을 멈추게 할 수도 없다. 우리는 충성된 누군가를 구별할 수도 없다. 6절에 보면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 우리는 아부의 말이나 우리를 위하는 척 하는 그런 말에도 속고, 넘어지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이 완전한 길을, 완전한 마음은 결코 우리의 것일 수도 없고, 다윗의 것일 수도 없다.

다윗은 오실 그 아름다우신 그 완전한 길을 걸어가실, 완전한 마음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시를 통해서 노래한 것이 분명하다. 다윗이 내가, 나 라고 말했지만 이것은 예언적인 성격의 노래로 볼 수 밖에 없다. 다윗이 노래했듯이 우리의 삶에는 결코 완전한 길도, 완전한 마음도 없다. 우리는 그 완전한 길, 완전한 마음을 가지신 예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자들이다. 오늘 시의 화자가 다윗이지만 결코 다윗이 아니었던 것과 같이 내가 하려고 하는 모든 행동과 삶의 내용에서 ‘내가’라는 주어가 ‘그가, 혹은 예수님께서’라는 주어로 바뀌어야만 한다. 내가 사는 것 같지만 내가 사는 것이 아닌 삶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누리는 삶이다. 

삶의 주어가 바뀐다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이 아닌가? 아담 이후로 우리는 늘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하는 존재들 아닌가? 이러한 교만함을 내려놓고 내 삶의 주어를 바꾸어야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결코 완전한 길도 완전한 마음도 가질수 없는 사람이다. 내 삶의 주어가 바뀔 때 완전한 길과 완전한 마음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내 삶을 다스리시고, 내 삶을 이끌어 가실 것이다. 여전히 내가 붙들고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많다. 서류가 처리되고 있는 비자문제도 내가 붙들고 있다. 내가 원한 시점에 나오지 않으면 다시 타국으로 비자여행을 다녀와야 하는데 재정도, 상황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다. 지금 교회가 너무 힘든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타릭 교회도 내가 붙들고 있다. 하나님께 내어 드린다고 하면서도 붙들고 마음을 쓰며 답답해 하고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도 내가 붙들고 내가 힘들고, 내가, 내가, 내가를 하고 있다.  오늘 내 삶의 주어를 바꾸며 이 일들을 하나님께 올려 드린다. 어차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일들인데도 붙들고 있는 이 일 속에서… 오늘 시편의 저자 다윗이 메시아를 노래한 것 처럼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 이끌어 가시도록 내 삶의 어려움들과 모든 일들의 주권을 올려 드린다. 주님께서 이 모든 일을 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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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