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4. 9. 24.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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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 11:22-36 질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

1. 본문은 성벽의 재건 후 사람들이 어디서 살아가며 어떠한 일을 담당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11장 1절을 보면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루살렘에 거주했고, 백성은 전체의 1/10만 예루살렘에 거주할 수 있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그 십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2. 그 때에 예루살렘은 내가 살고 싶다고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곳의 거주지는 한정적이었고, 예루살렘이 영적, 도시 행정적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만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해야만 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지도자들 외에 또 예루살렘 안에 거주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레위인들이었다. 

3. “노래하는 자들인 아삽 자손 중 미가의 현손 맛다냐의 증손 하사뱌의 손자 바니의 아들 웃시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레위 사람의 감독이 되어 하나님의 전 일을 맡아 다스렸으니 이는 왕의 명령대로 노래하는 자들에게 날마다 할 일을 정해 주었기 때문이며” (22-23절) 아삽의 자손들, 즉 예배를 담당했던 레위인들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전 일을 맡아 다스리고, 예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거주했다. 

4. 예루살렘 성벽이 왜 재건되었고, 왜 예루살렘 도시를 재건했는지를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 그 일을 시작한 이유를 잊어버리지 않고, 그 이유에 맞게 계속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다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게 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 되게 하기 위해서 성벽을 재건하였기에 그 중심에는 예배자들과 예배를 돕는 자들이 있어야 한다. 

5.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모든 것이 그 목적에 그 질서에 맞게 그 자리에 있다는 말이다. 레위인들이 예루살렘 도시 안에 거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돕는 일을 하는 것은 질서에 맞는 일이다. 우리를 지으신 목적대로 우리를 부르심 목적대로 살아가면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이다. 

6. 이 일을 진두 지휘한 느헤미야는 자신을 어려움 가운데서 은혜로 불러주셔서 이 일을 맡기신 하나님의 목적과 이유를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 부르심의 목적과 이유에 따라 중요한 것을 중요한 곳에 두고, 해야 할 것을 해 나간 것이다. 즉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한 것이다. 

7. 모든 것이 그 목적에 맞게 그 자리에 존재하면서 질서를 지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목적을 잃어버리고, 자리를 벗어나기 때문에 대부분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나는 나를 부르신 그 자리에 있는가? 나를 불러주신 목적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선교지에서 잠시 떨어져서 안식년을 보내면서 자주 드는 마음은 빨리 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다. 빨리 형제, 자매들을 만나고 싶고, 함께 교회를 다시 세워가고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계속 든다. 

8. 그러나 오늘 묵상을 하면서 이런 마음도 어쩌면 주님의 질서에 맞지 않는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13년 만에 첫 안식년으로 불러주셨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것은 여전히 태국과 수쿰빛 언약교회를 마음에 두고 생각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은 불러주신 이 자리에서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들을 누리고 쉬면서 지내는게 오히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님께서 너무나도 많은 분들의 헌신과 배려로 이런 기회를 허락해주셨고, 안식을 취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지 못하거나 그럴 수 없는 상황에 계신 분들과 남아 있는 성도들과 교회를 생각하며 여전히 마음이 불편한 내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9. 묵상중에 하나님께서 조금은 마음을 편하게 먹어도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주께서 허락하신 자리에서 조금은 누리라고 말씀해주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은 마음이 조금은 평안하다. 물론 내일은 또 마음이 불편할 수 있겠지만.. 질서에 맞게 오늘을 살아가기 원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으시도록 그 목적과 질서에 맞게 그 자리에 있기 원한다. 무거운 짐을 주님 앞에 내려 놓고 쉬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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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9. 20.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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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 10:1-31 리더의 자질

1. 이스라엘 백성들은 느 8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깨닫고, 9장에서 회개의 기도와 고백을 한 후에 10장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겠다는 적극적인 약속, 언약을 기록하고 그 곳에 자신의 이름을 써서 인봉하며 공식적으로 선언한다. 

2. 인봉한 자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가장 먼저는 총독인 느헤미야의 이름부터 나온다. “그 인봉한 자는 하가랴의 아들 총독 느헤미야와 시드가야,” (1절). 그리고 2-8절 까지에는 제사장들의 이름이 나오며, 9절 부터는 레위 사람들의 이름이, 14절 부터는 백성들의 우두머리들의 이름이 나온다. 직분이 높은 사람에서 부터 낮은 사람들로 이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를 볼 때 개혁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있던 높은 자들에서 부터 아래로 진행되었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3. 28절을 보면 이 곳에는 이름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남은 백성들과 제사장들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 그리고 노래하는 사람들도 함께 결단했음을 알 수 있다. 그 결단은 일단 오늘 본문에서는 세 가지로 나타난다. 1) 이방인과 혼인 금지 2) 안식일 지키기 3) 7년마다 희년 지키기 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 이스라엘로 살아가기 위한 정체성을 지키는 위한 율법들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지키기로 결단하게 된다. 

4. 이러한 결과들을 보면서 리더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만약 느헤미야가 리더가 아니었다면.. 느헤미야가 자신이 가진 총독의 지위를 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했다면.. 느헤미야가 학사 에스라를 불러 말씀을 듣지 않았다면 과연 오늘의 결단은 있을 수 있었을까?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다윗의 길을 가지 않은 왕들로 인해 모든 공동체가 그 죄로 물들고, 죄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것을 얼마나 많이 보았는가? 

5. 리더의 자리는 얼마나 무거운 또 무서운 자리인가? 나로 인해 나 뿐만 아니라 나의 가족과 나의 공동체가 모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자리가 리더의 자리이기에 더 겸손해야 하고, 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하는 자리가 리더의 자리 아닌가? 한 대통령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비가 많이 와도 내 탓인것 같고, 비가 오지 않아도 내 탓인것 같다" 비가 오고 오지 않고가 어찌 대통령의 탓인가? 그러나 리더는 그정도의 무게감과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 자리이다. 

6. 목사는, 선교사는 사역지에서, 그리고 아빠는 가정에서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리더의 자리를 감당해야 하는 사람이다. 때로는 이 리더의 자리가 무겁고 버겁기 때문에 하지 않고 싶을 때도 많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리더의 자리로 세워주셨다면 우리가 (그 분의 도우심 안에서 감히) 감당할 수 있는 자리이며, 또 내가 눈물로 기도로 감당해야만 하는 자리이다. 

7. 떠나온 수쿰빛 언약교회를 생각해보고, 지금 우리 가정을 돌아보면서 나의 부족함을 많이 느끼게 된다. 쉬이 분노하고, 때로는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내 생각이나 내 뜻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 자신을 보게 된다. 그러나 오늘 이 결단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8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리더의 할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듣고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 성도들과 나의 가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또한 대하고 듣고 깨달을 수 있도록 인도하고 격려하는 것이다. 

8. 리더십은 내가 그 분 안에 있을 때에만 발휘되는 것이다. 내가 그 분 안에서 들을 때에만 발휘되는 것이다. 내가 그 분 안에서 다른 이들을 섬길 때에만 발휘되는 것이다. 그 분을 나의 진정한 리더로 모시고 따라갈 때에만 발휘되는 것이다. 리더인가? 말씀을 읽어라. 리더인가? 말씀을 들으라. 리더인가? 말씀을 깨달으라. 리더인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깨닫도록 초청하고 함께 하라. 그러면 내가 리더십을 발휘하지 않으려고 할지라도 리더십이 발휘될 것이다. 나는 교회에서 가정에서 어떤 리더인가? 어떤 리더로 살아가기 원하는가? 리더의 무게를 느낀다면 그 분 안에 머물라. 그 분의 말씀을 청종하라. 그러면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이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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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9. 19.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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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 9:32-38 누가 더 큰가? 

1.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음을 통하여 자신들의 어떠함과 상관없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하고 또 자신들의 추악한 죄악을 다시 한번 직면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이스라엘을 버리신 적이 없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단 한번도 꾸준히 자신들의 신실함을 지킨 적이 없었다. 

2. 어제 본문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고백한다. “주의 긍휼이 크시므로 저희를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31절)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은혜로우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항상 하나님을 거절하고, 하나님을 등지는 선택을 하였다. 

3. 그렇기에 그들의 고백은 자신들의 당한 고난 마저도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우리가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는 진실히 행하셨음이니이다" (33절).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공의로우심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있었기에 회개하게 된다. 

4. 그러나 우리는 많은 순간 어떠한 고난이 찾아오거나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을 만나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공의로우심을 찾기 보다는 나의 의를 앞세우게 된다. “하나님 내가 이렇게 주를 섬겼는데, 내가 이렇게 헌신 했는데, 내가 이렇게나 헌금 했는데…” 등등의 고백으로 대표되는 나의 행위를 하나님 앞에 강조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내게 어떻게 이러실 수 있으세요?” 

5. 성경 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언제나 공의로우시고, 언제나 신실하시고, 언제나 사랑이시다. 내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자꾸만 (앞세울 것도 없는 비루한) 나의 의를 앞세우고, 하나님을 나의 행위에 따라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이상한 분으로 만들어 버린다. 하나님은 그렇게 쪼잔하시고 작으신 하나님도 아니다. 

6. 오늘 본문 32절 전반부 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백하는 하나님을 보자. “우리 하나님이여 광대하시고 능하시고 두려우시며 언약과 인자를 지키시는 하나님이시여…” ESV에서는 Our God, the great 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 하나님이 그렇게 작고 쪼잔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너무나도 크고 광대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나의 작은 머리 속의 판단이나 계획이 결코 하나님 보다 더 클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은 하나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인 것이다. 

7.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작음과 죄악됨을 알고,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깨달으며 회개하게 되었고, 그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고자 한다. “우리가 이 모든 일을 인하여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을 치나이다 하였느니라" (38절). 

8. 오늘 누구를 크게 보고 있는가? 나인가? 아니면 하나님인가? 입으로는 하나님을 크신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 계획, 내 생각을 놓치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의 공로를, 나의 행위를 하나님 앞에 늘어놓으면서 하나님을 내 뜻대로 움직이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정말로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 무릎꿇지 않으면 언제나 ‘나' 중심으로 돌아가고, 하나님을 쪼잔한 분으로 만들어 내 마음대로 움직이려고 하게 된다. 내 삶에 언제나 하나님께서 진실하게 행하셨음을, 그러나 나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악하고 추악하였음을 잊지 말고, 은혜 앞으로 나아가자. 

9. 지금 상황에 대해서 감사하자. 나는 다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분은 내 길을 더 잘 아시니까.. 

10. 오늘도 샬롬

*요 몇일 허리 컨디션이 좋지 않더니 어제 저녁부터 심해져서 약을 먹고 쉬고 있습니다. 속히 회복되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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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9. 17.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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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 9:9-18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는 삶

1. 8장에서 학사 에스라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은 백성들의 반응은 회개였다. 9잘 1-2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 달 스무나흗 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 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2. 오늘 9절부터 18절까지의 본문은 바로 그들의 허물의 자복이다. 9-15절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압제 하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고통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 (9절). 그리고 애굽을 치셨다 (10절 상반부), 그리고 명예를 얻으셨다 (10절 마지막).

3.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 기둥으로 인도 하셨고 (12절), 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주시며 만나주셨고 (13-14절), 그들의 목마름을 아시고 물을 주셨으며, 그들에게 땅을 주리라 한 약속대로 땅을 주셨다 (15절). 그러나 15절 마지막은 “말씀하셨사오나"로 마쳐진다. 즉 우리에게 신실하게 좋은 일들을 행하신 하나님과는 다르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악하게 행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들의 회개의 이유였다. 

4. “그들과 우리 조상들이 교만하고 목을 굳게 하여 주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거역하며 주께서 그들 가운데에서 행하신 기사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패역하여 스스로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종 되었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나이다" (17절 상반부) 이것만이 아니다. “또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이르기를 이는 곧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한 신이라 하여 하나님을 크게 모독하였사오나" (18절). 

5.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반대로 이스라엘은 교만하였고, 목이 굳었고, 하나님을 기억하지 아니하였고,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세워 하나님이라고 하며 하나님을 모욕하였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적반하장도 유분수’인 놈들이었다. 은혜도 모르고, 앞뒤도 모르고, 감사도 모르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이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이러한 죄악들을 회개하였다. 

6. 그 회개의 시작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만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옳고 그름의 기준을 잃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것이 좋은 것이고, 내가 생각하기에 나쁜 것이 나쁜 것이었다. 기준이 없다면 내 마음대로 하게 된다. 이것을 성경 사사기는 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 21:25). 

7.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대는 다들 자신이 옳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진리가 없는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누구도 절대적인 진리에 대해서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은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 살아가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성을 붙들어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옳고 그름에 대해서 알고, 잘못된 길로 갔을 때에는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회개할 수가 있게 된다. 

8. 아담이 하나님 처럼 되려고 했던 것의 핵심도 바로 옳고 그름을 스스로 정하려고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줄로 재어준 구역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고, 왕이 되어서 내 마음대로 결정하고, 내 마음대로 옳고 그른 것을 정의하려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다. 그런 아담의 후손들인 우리들도 여전히 우리 마음에 내가 마음대로 하고 싶은 욕구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 처럼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하면 악으로, 죄로, 거짓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리 그 자체이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이 없이는 우리는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9. 오늘 무엇을 붙들고 있는가? 내 생각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인가? 무엇을 옳다고 믿는가? 내 생각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인가? 무엇이 내 삶을 이끌어 가고 있는가? 내 생각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인가? 하나님 말씀이 내 삶의 기준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을 거는 자가 되기 원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고 주님 뜻이 아니면 멈춰서는 자가 되기 원한다. 그러기 위해 오늘도 말씀을 펴고 읽으며, 묵상하는 자가 되자. 

10. 오늘도 샬롬

https://youtu.be/rBaNX_REjbA?si=sNxEcUhOobZtCRd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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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9. 11.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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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 6:15-7:4 무엇이 나를 드라이브 하고 있는가? 

1. 많은 방해 속에서도 두려움으로부터 듣지 않았던 느헤미야의 리더십을 통해 성벽 건축을 무사히 마치게 된다. “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15절). 

2. 느헤미야 자신도, 그리고 이 성벽재건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그리고 이를 방해했던 자들도 이 일이 느헤미야로 부터 말미암은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일임을 알았다.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16절). 

3. 이런 느헤미야를 도비야는 또 방해하고자 한다 (17-19절). 그러나 느헤미야의 리더십을 보면 이런 일에 동요하거나 성벽 건축의 완성에 도취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시 시작한다. 그것은 성벽의 문지기를 세우고, 예배하는 자들을 세우는 일이었다. “성벽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 (7장 1절)

4.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도, 자신이 해낸 성취도 그에겐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느헤미야를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 즉 성벽을 중수하는 것이었다. 성벽이 중수되고 나면, 이제 성벽 안으로 도시가 생기게 되고, 도시가 생기면서 다시 성전이 중수되고,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는 그런 그림을 그는 그리고 있었다. 1장 5절에 보면 그는 ‘언약'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5.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에 대한 소망이 그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예루살렘의 황폐화라는 눈에 보이는 엄청난 어려움도, 여러 번의 죽음의 위협도, 다양한 성벽재건의 방해 공작도 그를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를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었기 때문이다. 

6. 오늘 본문을 보면서 나를 드라이브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를 생각해보게 된다. 목사로, 선교사로 살아가고 있는 내 삶을 드라이브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도 느헤미야와 같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에 대한 소망이 정말로 나를 움직이고 있는 원동력일까? 나는 어린 양 되신 예수께서 이 모든 만물을 회복시킬 것을 소망하면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면 등떠밀려서 하기 싫은 일들을 억지로 하고 있진 않을까? 

7.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성벽 건축을 마친 후에 세운 사람들이 문지기를 제외하고는 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이었다. “노래 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로 대표되는 예배를 섬기고 주관하는 자들을 세운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들을 세워가고 있는가? 혹시 예배자를 세우기 보다는 교회의 일꾼들을 세우려고 하진 않았을까? 나의 자녀들이 예배자로 세워지기를 애쓰고 있었을까? 

8. 결국 지금 일어나는 또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은 지금 내가 누구를 믿고 사랑하고 소망하느냐에 달려 있다. 내 관점이, 내 생각이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다면, 온 천하 만물들이 회복될 마지막 날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면 두려움이 나를 드라이브 하게 될 것이다. 염려가 나를 드라이브 하게 될 것이다. 때로는 조금의 성취에도 자만하게 되거나 조금의 어려움에도 낙망하게 될 것이다. 내가 바라고 소망해야 할 오직 한 분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삶이 되기를 원한다. 모든 민족과 족속과 방언이 한 목소리로 어린 양을 예배하게 될 그 날을 소망하기 때문에 오늘을 살아가기 원한다. 

9. 다시 한 번 내 삶을 점검하자. 나의 시선이 어디를 향해 있느지, 나의 소망이 어디에 있는지..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시 73:25를 계속해서 고백하는 오늘이 되길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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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9. 10.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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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 6:1-14 두려움으로 부터 듣지 않으려면…

1. 성벽 공사가 아직 마무리 되지 않은 때이다. 1절 하반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때는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였더라" 느헤미야는 성벽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아마도 여러가지로 마음이 편하지 않은 때 였을 것이다. 그때 성벽공사를 방해하던 산발랏과 게셈이 느헤미야를 따로 만나자고 한다. 

2. 그들은 리더인 느헤미야만 죽는다면 이 성벽공사가 마무리 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느헤미야를 따로 만나 죽일 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알았던 느헤미야는 지금 성벽공사라는 큰 역사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못 만나겠다고 했고, 그들은 느헤미야를 4번이나 다시 청했다 (2-4절). 

3. 느헤미야가 거절하자 그들은 느헤미야가 왕이 되려고 한다는 식으로 모함하기 시작한다. “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고 가스무도 말하기를 너와 유다 사람들이 모반하려 하여 성벽을 건축한다 하나니 네가 그 말과 같이 왕이 되려 하는도다” (6절).

4. 산발랏과 게셈이 가지고 있던 전략은 요즈음 테러리스트들이나 정치가들이 하는 전략과 비슷하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살인의 공포나 유언비어를 통해서 두려움을 자극시켜서 한마음이 되지 못하게 하고, 두렵게 만들어서 더 이상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하게 만들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전략은 10-14절에서도 또다시 살인의 시도와 뇌물을 통한 유언비어를 유포하는데서도 나타난다. 

5. 두려움이란 감정은 매우 작은 크기에서 시작되지만 한 번 두렵다고 느끼기 시작하면 그 감정은 한없이 커지게 된다. 한 번 경험하고 나면 두려움이라는 메아리가 내 안에 계속 울리게 되고, 두려움은 계속 나를 붙들어 매어 나로 하여금 하나님보다 그 상황에 더 집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6. 이 두려움을 느헤미야는 어떻게 이겼는가? 그는 하나님께 기도한다. “내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선지 노아댜와 그 남은 선지자들 곧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들의 소행을 기억하옵소서 하였노라” (14절) 나를 모함하려고, 나를 죽이려고 드는 자들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 분께 나의 상황을 아뢸 때, 우리는 비로서 그들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보게 된다. 

7. 나를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나를 지키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두려움의 감정을 이겨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리더에게는 두려움으로 부터 듣지 않고 하나님으로 부터 듣기 위해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있는 용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8. 내 삶을 돌아보니 나도 많은 순간 두려움으로부터 듣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별히 자녀양육에서 그렇다. 요엘이가 마라를 계속해서 자극시키면서 안좋은 영향을 미칠 때, 아내는 무시하고 좋은 것으로 심어줘야 한다고 하지만 내 안에 두려움은 이렇게 뒀다가 큰일나겠으니 내가 지금 제지해야 한다고 내게 말한다. 그러면 나는 요엘이에게 화를 내며 큰 소리를 내고, 그러면 더 안 좋은 상황으로 가게 된다. 두려움으로부터 들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부터 들어야 한다. 성령의 열매를 맺은 아버지의 삶을 보여줘야 하지, 참지 못하고 순간 욱하여서 계속 혼내는 아버지의 삶을 보여줘서는 안된다. 

9. 느혜미야는 두려움으로 부터 듣지 않았다. 그것이 느헤미야로 하여금 성벽재건이라는 사명을 잘 마칠 수 있게 해주었다. 나는 오늘 누구로 부터 듣고 있는가? 두려움으로 부터 듣는 것은 너무나도 쉽고 자연스럽다. 그러나 두려움으로 부터 듣지 않으려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그 두려움보다 더 크신 하나님으로 인해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 나를 두렵게 하는 여러 소리들을 잠잠하게 하고 오직 주님께로부터 듣기를 원한다. 잠잠하게 기도하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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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 3:15-32 나에게 주신 구역

1. 오늘 본문을 보면 수많은 이름들이 나오고, 그 이름들이 책임졌던 부분들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분량의 성벽 중수를 책임지지 않았다. 각자의 상황과 환경에 맞게 사명이 주어졌다.

2. 특별히 문은 좀 더 힘이 있는 사람들이 책임졌다. “샘문은 미스바 지방을 다스리는 골호세의 아들 살룬이 중수하여 문을 세우고 덮었으며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고 또 왕의 동산 근처 셀라 못 가의 성벽을 중수하여 다윗 성에서 내려오는 층계까지 이르렀고” (15절). 

3. 포로시기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어느 지역을 다스리는 권력이 있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큰 부분을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것을 ‘노블리스 오블리제’ 라고도 할 수 있겠다. 

4. 그리고 ‘그 다음은' 이라고 하면서 이제 보통 사람들은 성벽의 한 부분씩을 중수한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그 다음은' 이다. 왜냐하면 권력이나 재력을 가진 사람의 숫자는 적지만 오히려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도 자신에게 맡겨진 부분의 성벽을 중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5. 성벽 재건은 한 팀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보통 생각할 수 있는 스케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권력이나 재력을 가진 몇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정도의 일이 아니다. 모두가 한 팀이라는 같은 마음을 가지고, 나의 책임이 있는 부분을 성실하게 세워갈 때, 성벽이 온전하게 세워지게 된다. 

6. 내가 꼭 문을 세우는 유력한 가문의 소속이 아니라도 괜찮다. 나는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그 다음은' 다음에 나오는 우리가 묵상 본문을 읽었지만 쉬이 기억하지 못하는 가문에 속한 사람이어도 괜찮다. 나에게 맡겨주신 분량만큼 해 나간다면 성벽은 재건될 것이기 때문이다. 

7. 오늘 본문을 보면서 수쿰빛 언약교회와 태국선교가 생각이 났다. 방콕이라는 대도시에서 우리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그 다음은' 에 속하는 작은 일일 수도 있다. 아니 작은 일이다. 그러나 방콕에 있는 다른 교회들과 원 팀으로, 또 한국과 여러 나라들에서 살아가면서 태국 선교를 위해서 함께 마음을 모아 기도하고 후원하며 우리 가정과 함께 애쓰는 사람들과 원 팀으로 함께 맡겨주신 분량 만큼만 세워간다면 결국 하나님 나라는 확장될 것이다. 

8. 사역에 욕심을 내거나 내가 많은 것을 다 해내려고 하지 말자. 사역의 사이즈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부분을 내가 잘 세워가고 있느냐일 것이다. 내게 맡겨주신 영혼들, 내게 맡겨주신 사역들을 최선을 다해서 하며, 우리 가정과 원 팀으로 묶여진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다 보면 어느새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사역이라는 구역만 맡겨주신 것이 아니다. 가정도 나에게 맡겨 주신 사명이다. 만약 가정에 대해 소홀히 하면서 사역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시지 않을 것이다. 

9. 나에게 주신 구역들을 다시 한번 정리하는 시간을 갖자. 내가 섬겨야 할 사람들,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들, 내가 마음을 쏟아야 할 사람들, 그리고 또 가정과 사역의 밸런스를 맞출 수 있는 내가 되기 원한다. ‘원 팀'으로 함께 걸어갈 사람들을 기억하고 기도하자. 

10. 오늘도 샬롬 

*저를 위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지난 주에 아이들을 픽업해서 프리웨이를 빠져나가려고 속도를 낮추며 가던 중 뒤에서 저희 차를 추돌하는 사고를 겪었습니다. 후방추돌이기 때문에 제가 잘 못한 것은 없는데, 안그래도 허리가 안좋은데 허리와 목 등이 아파서 통증의학과에서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아이들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치료가 잘 진행되고 병원으로 오고가는 길(왕복 2시간)에 안전하게 다녀올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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