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4. 8. 26.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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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 5:12-22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1.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보내는 첫 번째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반복한다.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13절 후반부) 사랑 안에서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 안에서 화목하라고 가르치신다. 

2. 왜냐하면 우리가 복음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복음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귀하여 여김을 받았고,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복음을 들은 자의 삶은 이전과는 같을 수 없다. 나 혼자 잘 사는 삶도 되어서도 안된다. 오직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야만 한다. 

3. 14-15절을 보면 이러한 점이 잘 나타난다.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삼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들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이제는 복음에 합당하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어야 한다. 

4. 21-22절은 한 번 더 반복한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우리는 이제 범사에 헤아려 보면서 좋은 것만 취하고, 악은 모양도 취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살아가셨고, 우리를 대하셨기 때문이다. 

5. 그러나 우리가 어찌 예수님의 성품을 나의 인격으로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 실마리는 16-18절 우리가 잘 아는 구절에서 나온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우리는 성령충만함의 증거로 우리 삶에 드러나는 것 같은 사도바울이 제시한 이 세 가지를 삶에서 호흡처럼 행해야만 한다. 

6.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선하시고 또한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고 선하시다는 사실을 온전하게 깨달아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선하신데 우리가 슬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선한 뜻으로 이끌어 가신다는데 우리가 감사하지 않을 수 없지 않겠는가? 

7. 쉬지 말고 기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기도에 신실하게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온전히 깨달아야 한다. 내가 그 분 안에, 그 분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을 때, 나의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를 주님께서 모두 들으시고, 아신다는 사실을 알 때에 가쉽을 멈추고, 쓸데 없는 말을 멈추고, 내가 하는 모든 말이 기도와 찬양이 될 것이다. 

8. 결국 주님을 더 깊이 아는 것, 복음을 더 깊이 깨닫는 것이 우리의 삶과 말과 행동을 바꾸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 복음을 전해서 듣고 깨달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마지막으로 그들의 삶이 복음에 합당해야 함을 권면하고 있다. 요즈음 아이들이 서로 다투기 때문에 또 요엘이의 원래 가지고 있던 어려움과 더불어 시작된 사춘기로 인해서 어려운 일들이 많다. 내 마음은 깨어지고, 상하고, 속상할 때가 많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다. 복음을 가진 자의 삶은 나의 자녀들의 삶을 사랑 안에서 귀히 여기고, 화목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마음에)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고,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아야 한다. 특별히 나의 아이들에게.. 

9. 복음을 가진 아빠의 모습 속에서 아이들이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기 원한다. 순간 순간 욱하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삶의 모습이 내 삶에서 한 절이라도 드러나길 원한다. 그렇게 오늘을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 나를 도와주세요. 

10. 오늘도 샬롬 

https://youtu.be/eoDsJr7LF-0?si=WGHG02KVe9NkNjc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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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4. 8. 22.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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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 2:13-20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자가 되자

1.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가장 큰 장점은 바울이 전한 메시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13절 전반부). 

2. 어쩌면 설교의 완성은 설교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청중들에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설교자가 아무리 설교를 잘해도 듣는 자의 마음이 닫혀 있고, 어디 한 번 나를 설득해봐!! 라는 표정으로 설교자를 쳐다보면서 설교를 평가만 하고 있다면 과연 그 설교에서 능력이 나타나겠는가? 바울의 감사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에게 들은 말씀을 바울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 

3. 그랬더니 그 결과는 말씀이 역사하게 된다.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13절 하반부) 말씀이 역사하기 위해서는 영성과 능력있는 설교자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말씀을 듣는 자의 마음과 태도가 어떠한지에 달려 있다. 

4. 내가 읽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가 듣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가 묵상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인가? 나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혹시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즉 말씀을 듣고 나서 내가 순종이나 불순종을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진 않은가? 내 마음에 드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말씀은 그저 무시해도 괜찮은 말씀으로 나 스스로가 결정하진 않는가?

5. 나는 목사로, 선교사로 때로는 말씀을 전하기도 하고, 때로는 듣기도 한다. 그 때 마다 나는 누구의 말씀으로 전하고, 누구의 말씀으로 받는가? 나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처럼 누가 설교하든지, 어떤 말씀을 전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가? 

6. 데살로니가 교회가 칭찬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믿음의 태도 때문이었다. 나는 어떠한 믿음의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나는 어떠한 믿음으로 말씀을 듣고 전하는가? 나는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있기에 내 안에 그 말씀이 역사하고 있는가?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또 우리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도록 충분히 준비하여 잘 전달하고 있는가? 

7. 그러한 성도들은 자녀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랑의 면류관이 된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수쿰빛 언약교회 성도들이, 나의 믿음의 자녀들이 이러한 태도를 가지게 되어 나의 영광이고 기쁨이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이고 기쁨이 되길를 원한다. 

8.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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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4. 8. 22.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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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 2:1-12 하나님만 의식하고,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려는 삶

1.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복음을 전하였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사람에게 칭찬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 함이었다.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4절 하반부).

2. 바울은 정말로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간 사람이었다. 그의 삶에서의 내려졌던 결정이나 방향에서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한 적은 없었다. 오직 하나님을 의식했고, 그 분이 기뻐하시면 충분했다. 그렇기에 사람들의 말에도 휘둘리지 않았고 사람들의 평가에도 휘둘리지 않았다.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6절)

3. 하나님이 기쁘시면 충분했기에 그는 자신이 충분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사도로서의 권위도 주장하지 않았다 (7절).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해 주기를 기뻐하였다 (8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를 사랑하는 자 됨이라"

4. 하나님만 의식하고, 하나님의 인정만이 중요한 바울의 삶은 요동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평가는 우리가 오늘 뭔가 좀 더 잘했다고 해서 혹은 내일 좀 못한다고 해서 휙휙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평가는 그렇지 않다. 오늘은 환호하다가도 잠시 잠깐 후에 비판하고 비난하는게 사람이다. 흔들리는 갈대와 같다. 

5. 그러니 내가 삶을 살아가면서 또 사역을 하면서 누구를 의식하고 누구를 기쁘게 하려고 하는지는 나의 삶을 요동하게도 할 수 있고, 혹은 깊은 바다 처럼 고요하게도 할 수 있다. 나는 오늘 누구를 의식하며 또 누구를 기쁘게 하려고 살아가고 있는가? 

6. 안식년을 보내며 수쿰빛 언약교회와 나의 사역들을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나는 누구를 기쁘게 하려고 교회를 함께 개척하고 섬겼던 것인가? 나의 선교는 누구를 의식하면서 하고 있었던가? 혹시 태국의 영혼들을 너무 의식하였거나 혹은 한국에 있는 후원하는 교회들이나 후원자들을 의식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를 생각해보게 된다. 

7. 또 드는 한 가지 생각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오늘 나는 누구를 의식하고, 누구를 기쁘게 하려고 하고 있는가? 가족들과 함께 지내면서도 나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나의 시간과 마음을 드리고 있는가? 아니면 내 마음 가는대로, 내 감정이 느끼는대로 분노하거나 분을 쏟아내고는 있지 않은가? 바울이 하나님만 의식하며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려고 데살로니가 교회를 섬길 때의 목표는 딱 하나였다.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12절)

8. 그들이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하기 위해 바울은 정말 자신이 먼저 합당하게 살았다.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10절) 그들을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의식하고,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자에게는 굳이 하나님을 위해 합당하게 살아야 할 의무가 없다. 보이는데서만 잘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자는 보이지 않는 삶의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증인이고 또 우리 하나님께서 증인이시기 때문이다. 

9. 나는 누구를 의식하며 누구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는가? 만약 하나님만 의식하고,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살아간다면 대충 살아서는 안될 것이다. 좀 더 치열하게 육신의 정욕과 싸워야 하고, 보이지 않는 어떤 자리에서든지 오직 하나님만 의식하며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오늘의 가정의 삶에서 그리고 돌아갈 태국에서의 삶에서 모두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식하고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려는 자로 살아가기 원한다. 그러기 위해 조금도 나태하거나 흐트러진 삶의 모습이 아니라 정돈되고, 성숙하며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10. 복음을 더 깊이 깨달은 자, 복음에 더 합당하게 살아가게 되리라,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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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4. 8. 19.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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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25:18-30 받은 은혜에 합당한 삶

1. 예루살렘은 느부갓네살 왕의 침공으로 인해 초토화 되었다. 아니 남유다 자체가 이 침공으로 인해 멸망했다. 8-17절을 보면 여호아의 성전과 왕궁이 불탔고, 귀인들의 집도 불탔다. 그리고 18-21절을 보면 유다 백성들이 사로잡혀 간다. 정말 소망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라의 힘이 약했다기 보다는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고 우상들을 섬긴 자신들의 죄악의 결과이기에 누구를 원망할 수도, 누구에게 화살을 돌릴 수도 없었다. 그저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2. 느부갓네살 왕이 살려준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가 새로 세워져서 유다 땅을 관할하게 되었다. “유다 땅에 머물러 있는 백성은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남긴 지라 왕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가 관할하게 하였더라" (22절)

3. 그러나 그는 유다의 자손이었으나 오히려 유다 백성들에게 당황스러운 것을 요구한다. “그달리야가 그들과 그를 따르는 군사들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너희는 갈대아 인을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살며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가 평안하리라 하니라" (24절) 그는 이스라엘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오히려 자신들을 망하게 한 사람들과 왕을 섬겨야 함을 말한다. 

4.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는 절망적이다. 자신들의 왕인 여호야긴은 잡혀 갔고, 성전과 궁궐은 불탔고, 똑똑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다 포로로 잡혀갔고, 남아 있는 지도자는 오히려 그들을 섬기라고 말하고 있는 시기였다. 이 시기가 얼마나 갈지도 모르고,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도 몰랐다. 소망이 보이지 않는 시간이었다. 

5. 그 소망이 보이지 않는 시간, 절망적인 시간이 하나님께서 다시 주권적인 은혜로 찾아오신다. 너희들이 신실하거나 혹은 행위가 선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여서가 아니라 내가(하나님 자신이) 아브라함에게, 다윗에게 한 약속에 신실하시기에, 내가 가장 선하신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절망속에서 불러내신다. 

6. “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왕 에윌므로닥이 즉위한 원년 십이월 그 달 이십칠일에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그에게 좋게 말하고 그의 지위를 바벨론에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지위보다 높이고 그 죄수의 의복을 벗게 하고 그의 일평생에 왕의 앞에서 양식을 먹게 하였고" (27-29절) 여호야긴이 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가 갑자기 옥에서 나올만한 무엇인가를 했는가? 그의 지위가 회복될 만한 무슨 일이 있었는가? 아무것도 없었다. 

7. 그저 하나님의 은혜였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신실하심이 여호야긴 왕을 구원하셨고, 아담에게 한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이 여전히 유효함을 확인시켜 주신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로 나를 불러 주셨고, 구원해 주셨고, 사랑해 주신 것이다. 나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이 복음이 항상 나를 붙드신다. 내 삶을 보면 절망적이다. 나의 자녀들에게도 선으로만 행하지 못하는 악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나를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자녀로 불러 주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양들을 먹이는 일에 불러 주셨다. 

8. 복음을 먼저 들은 자로서 살아가기 원한다. 나는 사랑받았고, 나는 구원받았으니 거기서 땡 하는 사람이 아니라 받은 복음에 합당하게 오늘을 살아가기 원한다. 주일 예배 중에 들었던 찬양의 가사의 한 부분이다. “I was made to live for You” 나는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창조되었다. 자격없는 나를 불러주신 주님, 자격없는 나를 사랑하여주신 주님 앞에서 오늘을 살아가기 원한다. 여호야긴이 석방되었을 때 그가 느꼈던 그 은혜가 내 삶에도 가득하다. 은혜를 받아놓고도 모르는 자와 같이 살지 말고, 은혜를 받은 자로써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 원한다.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앞장서고, 불필요한 말과 행동을 줄이는 오늘이 되자. 

9. 오늘도 샬롬 

*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은 요즈음 제가 얼마나 은혜를 모르는 자인지를 깨닫습니다. 아빠로써 남편으로써 섬기고 사랑하기 보다는 자꾸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쉬이 기분이 상하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오늘 묵상 말씀처럼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사는 제가 될 수 있도록, 또 저희 가정이 함께 지내는 시간을 통해서 더 깎여지고 단단해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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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4. 8. 17.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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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24:8-20 성경을 읽는 자만 변화된다

1. 여호야긴이 18세에 왕이 되었다. 그는 어느정도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18살에 왕이 되었다. 8세에 왕이된 요시야 왕과는 달랐다. 그러나 그는 요시야 왕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아버지의 악함을 따라 가는 삶을 선택했다. “여호야긴이 그의 아버지의 모든 행위를 따라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2. 요시야 왕이 했던 개혁의 흔적도, 요시야 왕 시대에 발견했던 하나님의 말씀 책이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요시야 왕의 길로 행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했던 악함을 쫓아 갔다. 왜일까? 

3. 그것은 아마도 인간의 본성이 죄 그 자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렸을 때 성선설, 성악설을 배웠을 때에는 성선설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나란 존재로 46년을 살아보니 인간은 결코 태어날 때 부터 선한 존재가 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뼈 속 깊이 깨닫게 된다. 교육이나 문화를 통해 아닌척 포장할 순 있지만 이기적인 욕망으로 가득차고, 세상에서 내가 가장 소중한 것이 바로 인간인 것이다.

4. 성경 전체는 이러한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의 모습에 대해 증언한다. 비단 특별한 성경구절을 찾지 않더라도 성경 어디를 봐도 인간의 죄가 너무나도 가득 차 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그렇기에 요시야 왕도, 여호야긴 왕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도 역시 동일하게 탐욕과 욕망이 가득 찬 존재들이었을 것이다.

5. 그러나 이 두 사람을 다른 길로 가게 만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었다. 요시야 왕은 발견한 하나님의 언약책을 읽었고, 묵상했고, 그대로 순종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의 언약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야긴 왕은 그 말씀을 읽지도 묵상하지도 순종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외부적인 도움 없이는 우리는 악한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6. “말씀을 읽었느냐” “그 말씀을 묵상했느냐" 그리고 “그 말씀으로 살아내려고 했느냐"가 요시야 왕과 여호야긴 왕의 삶을 갈랐다. 그리고 두 왕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도 극과 극으로 나누어졌다. 요시야 왕에 대한 평가는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긴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왕하 23:24) 그러나 여호야긴 왕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9절) 라고 평가 되고 있다. 

7. 하나님의 말씀 없이 우리는 결코 조금도 선한 방향으로 걸어갈 수 없는 자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도 나는 괜찮은 존재이고, 그래도 나는 어느정도 다른 사람보다는 나아 보인다는 그런 착각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태생부터 악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는 악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들이고, 우리에게는 그것을 막아 줄 브레이크가 필연적으로 필요하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8. 외부에서 들어오는 은혜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우리는 성경이 풍족한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다. 핸드폰에도, 태블릿에도, 컴퓨터에도 또 책으로도 성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호야긴 왕처럼 가지고만 있으면 무슨 소용인가? 성경을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영향력도 변화도 우리는 경험할 수 없다. 성경을 소유하고만 있다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할 수 밖에 없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살아내야 한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하나님의 자극, 내가 죄인이고, 구원은 하나님께 있음을 매일 읽으면서 다시 깨달아야 한다. 구원은, 은혜는 나로부터 나지 않는다. 거룩한 삶도 나로부터 나지 않는다. 오직 나의 삶의 푯대가 되고,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터이다. 읽어야 한다. 읽어야 산다. 읽어야 변화된다.

9. 선교사인 나는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있는가? 다른 책들을 보느라, 혹은 다른 것들에 집중하느라 정작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데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은가? 어제부터 태국어 성경을 쓰기로 하고 쓰고 있다. 매일 빠뜨리지 말고 읽고 쓰고, 묵상하며 주님의 길로 걸어가기를 힘쓰자. 주님 나를 붙드소서.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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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8. 15.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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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23:21-30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다. 

1. 요시아 왕의 개혁은 이제 유월절을 지키는 것으로 향한다. 유월절은 잘 아는 것 처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래서 유월절의 의미는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라는 것이다. 

2. 내가 나의 구원에 있어서 얼마나 무력한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유월절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유월절을 지키지 않았다. 언제부터 지키지 않았는지가 22절에 나타난다.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와 유다 여러 왕의 시대에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3.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그 때 부터 유월절을 지키지 않았다. 유월절을 잃어버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 소견에 옳다고 여기는 신들을 쫓아다니고,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행위들을 하게 되었다. 

4. 본문에 따르면 다윗 왕의 시대에도 이 유월절을 지키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다윗이??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다른 본문과 충돌하는 부분도 있지만..).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요시아 왕은 그 누구보다도 더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지키려고 애쓴 사람임을 알 수 있다. 

5.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21절 말씀은 조금 묵상할 필요가 있다. “왕이 뭇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왜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우리를 위함이 아니고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함일까? 말씀을 지키는 것은 오히려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닌가? 

6. 묵상하다 보니 유월절을 지키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높아지시는 사건이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유월절의 사건은 복음과 동일하다. 우리 힘으로 우리 스스로를 어쩔 수 없는 죄인들에게 영광스러우신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행하여 주신 사건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조금도 없다. 

7. 그렇기에 유월절을 지키게 되면 하나님이 높아지시고,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게 되시고, 이 땅에 오직 주님 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기에 요시아 왕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해 유월절을 지키게 하매” 라고 말한 것이다. 

8.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든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이유는 내가 복을 받고, 내가 잘 되고, 내가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란 영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이유는 그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고, 내게 주신 말씀이 너무나도 영광스럽고 아름다우신 온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나의 순종이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순종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아지게 하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나의 삶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 다른 믿지 않는 자들에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9.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은 결국 하나님을 높이는 삶이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은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은 결국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삶이다. 그렇기에 오늘도 듣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기 원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정말 간단한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그 단순한 말씀에 내 삶을 걸기 원한다. 사랑하기 힘들고 어렵지만 그래도 내가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기에 순종하기 원한다. 요시아 왕과 같이 말씀의 순종에 삶을 거는 오늘이 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https://youtu.be/8szyv1G9h9w?si=pRVy7o33EkKrfHv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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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8. 13.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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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23:1-9 성경, 하나님의 말씀

1. 그간 묵상하면서 순종은 들음에서 나온다고 묵상 하였다. 그래서 청종은 순종함에 있어서도 그리고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도 너무나도 중요한 가치이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청종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내가 듣고 있는 그 말씀을 누구의 말씀으로 생각하느냐 인 것 같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모였다. 1절을 보면 “왕이 보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자기에게 모으고" 모두 모은 다음에 한 일은 청종하게 한 것이었다. 무엇을 청종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였다. “이에 왕이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노소를 막론하고 다 왕과 함께 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성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 (3절)

3.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에는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설사 내가 하나님의 제사를 맡고 있는 제사장이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들이라도 하더라도 반드시 들어야만 한다. 내가 나이가 많더라도, 혹은 나이가 어리더라도 상관없이 들어야 한다. 청종은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가치이다. 

4.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한 자들은 이제 순종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왕이 단 위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하매 백성이 다 그 언약을 따르기로 하니라" (3절)

5. 우리가 들은 말씀이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우리가 어찌 순종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순종하지 않을 때는 우리가 들은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지 않거나 내가 하나님보다 더 옳다고 여기는 바로 그 때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가 더 권위적으로 위에 서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순종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고민의 여지 없이 순종할 수 밖에 없게 된다. 

6. 지금 청종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잘하고 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청종하고 있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고 권위를 부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다. 만약 순종의 태도가 아니라면 나는 여전히 내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옳다고 여기고 있다는 것이고, 내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지혜롭게 여기고 있다는 증거이다.  

7. 오늘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읽은 그 하나님의 언약책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 그래서 그 말씀에 순종한다.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만든 모든 그릇들을 여호와의 성전에서 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밭에서 불사르고 그것들의 재를 벧엘로 가져가게 하고" (4절 후반부) “옛적에 유다 왕들이 세워서 유다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 주위의 산당들에서 분향하며 우상을 섬기게 한 제사장들을 폐하며 또 바알과 해와 달과 별떼와 하늘의 모든 별에게 분향하는 자들을 폐하고" (5절) 그 뿐만 아니라 아세라 상을 허물고 (6절), 성전 가운데 남창들의 집을 허물고 (7절), 모든 산당들을 허물어 버렸다 (8절). 

8. 그들이 순종한 말씀은 분명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출 20:3) 였을 것이다. 그들은 들은 율법책의 내용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것에 토를 달거나 이유를 묻지 않고 순종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일 말씀을 들을 때, 묵상을 할 때, 성경을 읽을 때 나는 내가 듣고 있는 그 말씀을 누구의 것으로 여기는가? 혹시 여전히 나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기에 순종하기 보다는 내 생각을 따르려고 하고 있지는 않을까? 나는 순종인가? 아님 잡종인가? 

9. 사무엘의 태도가 너무 귀하다.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삼상 3:10 그는 청종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겼다. 그래서 청종하였고, 그대로 행하였다.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고 믿는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자세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고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기 원한다. 듣는다는 것은 순종하겠다는 의지이다. 청종하기 원한다. 순종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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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20:12-21 청종(4)

1. 어제의 본문 20절 초반부를 보면 히스기야 왕은 절제절명의 위기의 순간에서 하나님께 묻고 듣는 인물이었다. 2-3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

2. 그의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수명을 15년 연장해주셨다. 그의 인생에 묻고 듣던 그 절망의 순간에는 오히려 형통함이 있었다. 그는 왕이었지만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 앞에 서 있기를 중단한 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형통과 기도응답이 이루어진 때였다. 

3. 그가 병 들었단 소식을 들은 바벨론의 왕이 보낸 사신이 도착했을 때 그는 어쩌면 우쭐해졌던 것 같다. “변방의 왕인 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바벨론의 왕이 사신을 보냈다고?” 자신을 알아주는 큰 나라의 왕 때문에 그는 이제 묻고 듣기를 그친다. 그의 청종의 모습이 멈추었다. 

4. 12-13절을 보면 그의 모습이 좀 더 확실히 보인다.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의 왕 브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 들었다 함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그에게 보낸지라 히스기야의 사자들의 말을 듣고 자기 보물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의 군기고와 창고의 모든 것을 다 사자들에게 보였는데 왕궁과 그의 나라 안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히스기야가 그에게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더라"

5. 더 이상 묻지 않고, 더 이상 듣지 않고 그는 자기 맘대로 결정하고 맘대로 행동하였다. 그는 모든 나라의 것을 보여주었다. 지금 식으로 말한다면 아마 모든 나라의 기밀을 보여준 셈이다. 이제 바벨론은 이스라엘이 무엇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속속들이 파악하게 되었다. 

6. 형통의 순간은 참으로 감사하고 행복한 순간임에 틀림없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삶을 이끌어 나감이 내 눈에 보여진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그러나 그 형통의 순간이 사실은 또한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형통하기 때문에 교만하여지고, 그 교만이 우리를 더 이상 묻지 않고 듣지 않는 자리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히스기야가 특별한 혹은 모지란 사람이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본성이 본디 악하기 때문이다.  

7. 13년의 사역의 시간을 마치고 첫 안식년을 가지는 우리 가정의 모습이 히스기야와 오버랩 되는 부분이 있다. 지금이야 적응과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또 그와 동시에 어쩌면 지금이 가장 나태하기 쉽고, 가장 묻지 않고 듣기를 멈추기 쉬운 시기인 것 같다. 왜냐하면 나와 히스기야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8. 히스기야의 모습 속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배우기 원한다. 청종하기 원한다고, 안식년이 청종의 해가 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형통할 때, 특별한 이슈가 없을 때 더 듣기에 힘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본성적으로 본능적으로 듣기를 멈추고, 히스기야처럼 내 맘대로 내 뜻대로 행동할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청종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스스로를 깨워야 한다. 의지적으로 들어야 한다. 나는 자연스럽게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리로 나갈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듣기 원한다. 어제 묵상처럼 내가 누군지, 내가 어떤 존재인지 더 깊이 깨닫게 되기 원한다.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배우는 것이 청종의 시작이다. 안식년이라는 시간동안 날마다 스스로를 깨우고, 말씀 앞에 서는 자가 되기 원한다. 그러한 매일의 청종의 반복이 나의 안식년이 되기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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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19:29-37 겸손(내가 어떤 존재인지 깨닫게 되면 저절로 가지게 되는 마음)

1. 결국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전쟁이 닥치고, 더 힘있는 누군가가 우리를 치려고 다가올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기를 구하는 것 뿐이다. 

2. 그런데 환난의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때로는 우리가 그정도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착각하기 쉽다. ‘내가 하나님께 어떻게 했는데,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왔는데…’ 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채무가 있는 것 처럼 말하고 행동하기 쉽다. 

3.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어떠한 채무도 지워드릴 수 없는 존재들이고, 우리를 구원함도, 우리를 사랑함도, 우리를 도우심도 우리로 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증언한다. “남은 자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 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31절)

4.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진리는 ‘여호와의 열심' 때문이다. 내가 (일상의 삶에서도, 선교지에서도)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쓴다 하더라도 열매를 보장할 수는 없다. 열매를 거두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다. 

5. 내가 잘나서도, 내가 뛰어나서도, 내가 그럴만해서도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합당하신 영광을 위한 열심을 가지고 계시고,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시고, 도우시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우리가 하등한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너무도 크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하는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6.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면서 나를 너무 크게 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나는 구원받을 만한 그 어떤 것도, 사랑받을 만한 그 어떤 것도, 도우심을 받을만한 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존재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 합당하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15:10)

7. 나의 모든 삶은, 나의 모든 성취는, 나의 모든 것은 오직 주의 은혜로 된 것이다. 나의 공로를 주장할 수도 없고, 나의 열심을 주장할 수도 없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121:1-2)

8. 34절은 다시 한번 이러한 진리를 확증하고 있다.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였더라" 내가 잘해서가 아니다. 내가 뛰어나서도 아니다. 내가 열심히 해서도 아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으로 오늘도 일하시기 때문이다. 선교사로 살아온 13년의 시간들을 반추해보면 정말로 확실하다. 내가 어떻게 해서 얻은 열매는 전혀 없다. 오로지 주의 은혜이고, 오로지 주의 열심이다. 그 놀라우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13년동안 가장 앞에서 볼 수 있었음이, 가장 최전선에서 경험할 수 있었음이 내게 복이다. 그렇기에 조금도 교만하거나 자만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나는 그저 그 분께 무익한 종일 뿐이기 때문이다. 

9. 그동안의 사역을 정리하고 또한 다시 태국으로 돌아가길 준비하면서 가장 가져야 할 마음과 태도는 ‘겸손’임을 오늘 말씀을 통해 듣게 된다. 무익한 종으로서 사역을 잘 정리하고 또 준비하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눅17:10) 모든 영광을 주님께만 돌려드린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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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18:26-37 청종하는 자 (3)

1. 앗수르의 신하 랍사게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협한다. 그는 아람말 뿐 아니라 유다말도 할 수 있는 자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유다 말로 협박하기 시작한다 (27절). 

2. 그의 말을 요약하면 “너희들 지금 하나님이 도우실거라는 히스기야가 한 말 믿고 까부는 것 같은데 히스기야 말 듣지 말고 믿지 마, 항복하면 살려줄께"였다 (28-32절). 32절 마지막은 이렇게 말한다. “히스기야에게 듣지 말라"

3. 히스기야로 부터 듣는다는 것은 히스기야의 말을 듣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히스기야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히스기야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방 장수 랍사게는 그것을 하지 못하게 권유하고 있다. 마치 세상이 우리에게 속삭이며 속이려는 것과 비슷하다. 

4. “너희들 하나님 말씀 듣지 마. 하나님이 어딨어? 차라리 너희 생각과 지식을 믿어!” 사실 이러한 꼬임에 쉬이 넘어간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너무나도 멀어보이고, 악인은 득세하는 것 같아 보이며, 나의 지혜와 힘을 믿는 것이 좀 더 쉬워 보이기 때문이다.

5. 그러나 백성들은 히스기야의 말, 즉 히스기야에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였다. “그러나 백성이 잠잠하고 한 마디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니 이는 왕이 명령하여 대답하지 말라 하였음이라" (36절)

6. 이스라엘 백성들은 히스기야의 말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순종하였다. 얼마나 항변하고 싶었겠는가? 이방인 장수의 조롱 앞에서 얼마나 너는 틀렸고, 우리 하나님이 옳으시다고 외치고 싶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순종하였다. 

7. 청종은 듣는데서 시작되지만 청종은 순종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듣기만 하는 것은 반쪽이다. 들었으면 순종해야 한다. 들었는데 순종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한다면 그것은 들은 것이 아니다. 순종이 제사 보다 낫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15:22) 청종과 순종은 한 세트이며 가장 나은 길이다. 

8. 이번 안식년의 모토를 ‘청종의 해'로 정했다. ‘청종의 해'는 또한 당연히 ‘순종의 해'이어야만 한다. 순종하지 않는 청종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청종하려고 할 때 랍사게가 말한 것 처럼 많은 유혹과 두려움이 나를 미혹하려고 할 것이다.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하나님보다 잘 보이고, 우리 눈 앞에서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우리를 유혹할 것이다. 그럴 수록 더욱 청종해야 한다. 듣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시작이다.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의 시작이다. 그래서 셰마 이스라엘로 유명한 구절인 신명기 6:4 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강하게 들으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9. 청종하는 자가 되기 원한다. 때로는 내 마음에 내 마음대로 하고 싶고, 내 뜻대로 행동하고 싶더라도 순종하는 자가 되기 원한다. 순종하기 위해서 가장 잘 듣는 자가 되기 원한다.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내 마음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한다. 예전 NIBC를 처음 시작하신 김학철 교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순종이 아니면 잡종이다" 순종하기 위해 청종하는 자로 오늘을 살아내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저희 가정의 8월 기도편지를 보내드립니다. 보시고 수쿰빛 언약교회와 에게로 클럽을 위해서 기도해주시고, 저희 가정을 위해서도 계속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늘 함께 걸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August, 2024 (optimized).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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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