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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20:12-21 청종(4)

1. 어제의 본문 20절 초반부를 보면 히스기야 왕은 절제절명의 위기의 순간에서 하나님께 묻고 듣는 인물이었다. 2-3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

2. 그의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수명을 15년 연장해주셨다. 그의 인생에 묻고 듣던 그 절망의 순간에는 오히려 형통함이 있었다. 그는 왕이었지만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 앞에 서 있기를 중단한 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형통과 기도응답이 이루어진 때였다. 

3. 그가 병 들었단 소식을 들은 바벨론의 왕이 보낸 사신이 도착했을 때 그는 어쩌면 우쭐해졌던 것 같다. “변방의 왕인 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바벨론의 왕이 사신을 보냈다고?” 자신을 알아주는 큰 나라의 왕 때문에 그는 이제 묻고 듣기를 그친다. 그의 청종의 모습이 멈추었다. 

4. 12-13절을 보면 그의 모습이 좀 더 확실히 보인다.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의 왕 브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 들었다 함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그에게 보낸지라 히스기야의 사자들의 말을 듣고 자기 보물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의 군기고와 창고의 모든 것을 다 사자들에게 보였는데 왕궁과 그의 나라 안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히스기야가 그에게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더라"

5. 더 이상 묻지 않고, 더 이상 듣지 않고 그는 자기 맘대로 결정하고 맘대로 행동하였다. 그는 모든 나라의 것을 보여주었다. 지금 식으로 말한다면 아마 모든 나라의 기밀을 보여준 셈이다. 이제 바벨론은 이스라엘이 무엇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속속들이 파악하게 되었다. 

6. 형통의 순간은 참으로 감사하고 행복한 순간임에 틀림없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삶을 이끌어 나감이 내 눈에 보여진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그러나 그 형통의 순간이 사실은 또한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형통하기 때문에 교만하여지고, 그 교만이 우리를 더 이상 묻지 않고 듣지 않는 자리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히스기야가 특별한 혹은 모지란 사람이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본성이 본디 악하기 때문이다.  

7. 13년의 사역의 시간을 마치고 첫 안식년을 가지는 우리 가정의 모습이 히스기야와 오버랩 되는 부분이 있다. 지금이야 적응과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또 그와 동시에 어쩌면 지금이 가장 나태하기 쉽고, 가장 묻지 않고 듣기를 멈추기 쉬운 시기인 것 같다. 왜냐하면 나와 히스기야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8. 히스기야의 모습 속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배우기 원한다. 청종하기 원한다고, 안식년이 청종의 해가 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형통할 때, 특별한 이슈가 없을 때 더 듣기에 힘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본성적으로 본능적으로 듣기를 멈추고, 히스기야처럼 내 맘대로 내 뜻대로 행동할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청종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스스로를 깨워야 한다. 의지적으로 들어야 한다. 나는 자연스럽게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리로 나갈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듣기 원한다. 어제 묵상처럼 내가 누군지, 내가 어떤 존재인지 더 깊이 깨닫게 되기 원한다.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배우는 것이 청종의 시작이다. 안식년이라는 시간동안 날마다 스스로를 깨우고, 말씀 앞에 서는 자가 되기 원한다. 그러한 매일의 청종의 반복이 나의 안식년이 되기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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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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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19:29-37 겸손(내가 어떤 존재인지 깨닫게 되면 저절로 가지게 되는 마음)

1. 결국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전쟁이 닥치고, 더 힘있는 누군가가 우리를 치려고 다가올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기를 구하는 것 뿐이다. 

2. 그런데 환난의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때로는 우리가 그정도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착각하기 쉽다. ‘내가 하나님께 어떻게 했는데,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왔는데…’ 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채무가 있는 것 처럼 말하고 행동하기 쉽다. 

3.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어떠한 채무도 지워드릴 수 없는 존재들이고, 우리를 구원함도, 우리를 사랑함도, 우리를 도우심도 우리로 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증언한다. “남은 자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 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31절)

4.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진리는 ‘여호와의 열심' 때문이다. 내가 (일상의 삶에서도, 선교지에서도)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쓴다 하더라도 열매를 보장할 수는 없다. 열매를 거두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다. 

5. 내가 잘나서도, 내가 뛰어나서도, 내가 그럴만해서도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합당하신 영광을 위한 열심을 가지고 계시고,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시고, 도우시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우리가 하등한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너무도 크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하는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6.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면서 나를 너무 크게 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나는 구원받을 만한 그 어떤 것도, 사랑받을 만한 그 어떤 것도, 도우심을 받을만한 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존재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 합당하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15:10)

7. 나의 모든 삶은, 나의 모든 성취는, 나의 모든 것은 오직 주의 은혜로 된 것이다. 나의 공로를 주장할 수도 없고, 나의 열심을 주장할 수도 없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121:1-2)

8. 34절은 다시 한번 이러한 진리를 확증하고 있다.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였더라" 내가 잘해서가 아니다. 내가 뛰어나서도 아니다. 내가 열심히 해서도 아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으로 오늘도 일하시기 때문이다. 선교사로 살아온 13년의 시간들을 반추해보면 정말로 확실하다. 내가 어떻게 해서 얻은 열매는 전혀 없다. 오로지 주의 은혜이고, 오로지 주의 열심이다. 그 놀라우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13년동안 가장 앞에서 볼 수 있었음이, 가장 최전선에서 경험할 수 있었음이 내게 복이다. 그렇기에 조금도 교만하거나 자만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나는 그저 그 분께 무익한 종일 뿐이기 때문이다. 

9. 그동안의 사역을 정리하고 또한 다시 태국으로 돌아가길 준비하면서 가장 가져야 할 마음과 태도는 ‘겸손’임을 오늘 말씀을 통해 듣게 된다. 무익한 종으로서 사역을 잘 정리하고 또 준비하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눅17:10) 모든 영광을 주님께만 돌려드린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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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