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4. 3. 28. 14:06
728x90
반응형

요 19:1-16 하나님 나라 

1.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왕이시다. 예수님도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왕이시고, 하나님께서 온 세상 만물을 그 분의 뜻 안에서 통치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다. 

2. 모세의 시대에 하나님은 왕이셨다. 모세를 통해서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다스리시며 이끌어 나가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들 처럼 눈에 보이는 사람인 왕을 원했다. 그래서 세워진 왕이 사울이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맘대로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그래도 유대인들은 좋았다. 자신들이 왕을 가지게 되었으니… 

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은 사울 왕을 버리고, 다윗 왕을 세우셨다. 다윗 왕이 진정한 유대인의 왕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왕은 여전히 하나님이셨다. 다윗은 자신의 뜻대로 결정하지 아니 했고,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움직였기 때문이다. 인간인 왕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왕은 여전히 하나님이셨다. 그렇기에 다윗의 자손들은 남유다의 왕으로 계속 세워졌고, 하나님은 다윗의 씨앗을 통해 이 유대인의 왕의 계보를 이어가셨다. 

4. 그러나 남유다가 망하면서 유대인은 이제 더 이상 왕을 가질 수 없는 로마의 속국이기에, 그들이 왕을 가진다는 것은 로마에 대한 반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왕이 없다는 유대인들의 말은 맞는 말이다.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15절).

5. 그러나 유대인의 말은 맞지만 또한 틀렸다. 그들의 왕은 가이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정체성에서 여전히 유대인의 왕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왕이신 하나님까지 부인하게 된다. 

6. 오히려 이방인인 빌라도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14절)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한 빌라도는 오히려 예수님의 생명을 살리려 하고, 자신들의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 아이러니의 극치이다. 

7. 결국은 예수를 어떤 분으로 보는지가 나의 오늘의 태도와 삶을 결정한다. 나는 예수님을 진정한 나의 유일하신 왕으로 보고 있는가? 그리하여 예수님의 통치가 내 삶 안에 나타나고 있는가? 예수로 살고 예수로 죽는가? 아니면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의 왕 되심을 부인하며, 내 뜻과 내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만약 내가 내 뜻과 내 생각대로 살아가려고 한다면 나는 나의 통치를 받고 있는 것이지 예수의 통치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내가 주인이고, 내가 왕인 나의 나라에 살아가는 것이다. 

8. 이 고난 주간에 누가 왕인지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내 삶의 주인이 정말 누구인가? 내 삶의 진정한 왕이 정말 누구인가?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나'인가? 사울은 자신이 왕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 듣지 않았다. 자신의 판단과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이 가장 중요했고 그것에 따라 행동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고, 다른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살아가도록 권면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내 삶의 왕이시라면 내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살아간다면 다윗의 삶과 같이 물어야 한다. 들어야 한다. 순종해야 한다. 

9.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선포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였다. 물론 나의 죄사함도 너무나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더 크고 중요한 개념이다. 그렇기에 내가 오늘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고난과 순종하심이 단순한 나의 죄 사함으로 축소되어 버리게 된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낼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내 뜻과 내 생각으로 살아가지 않고, 오직 주님께 묻고, 듣고, 순종하는 자로 오늘을 살아가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4. 3. 26. 13:01
728x90
반응형

요 18:12-27 얕고 가벼운 사랑을 가진 자 (중요 알림 맨 아래 있어요)

1. 예수를 반대하고, 예수를 죽이려던 무리들은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안나스에게로 끌고 간다. 안나스는 누구인가 하면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었다 (13절). 곰곰히 생각해보니 대제사장의 장인이 무슨 타이틀이며 권력의 일부분인가 싶다. 그는 예수님을 심문하거나 예수님에 대해 어떤 판결을 내릴 수도 없는 자였다. 

2. 그저 호기심 때문이었든지, 아니면 사위를 등에 업은 권력자였든지 간에 그는 결박된 예수를 먼저 만났고, 예수를 심문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질문은 좀 이상하다.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19절) 그의 질문은 제자들에 대한 것이었고, 예수께서 무엇을 가르치셨는지를 물었다. 

3. 권력자들이 두려워하였던 것은 민란이었고, 그들은 예수께서 왕으로 오셔서 자신들의 권력을 빼앗기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아마도 예수께서 그정도 세력을 갖추고 계신 분인지, 또 그 분의 가르침 속에서 어떤 사회를 전복시킬만한 가르침이 있었는지를 물어보려고 했던 것 같다. 

4.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오히려 드러내놓고 세상에 이미 이야기를 했으니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하셨다.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한 안나스는 예수를 대제사장에게 보낸다.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24절). 

5. 안나스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먼저 떠올랐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대답에서와 같이 모든 것을 드러내서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20절) 예수님은 다 드러내놓고 말씀하셨고, 그 분의 말씀은 성경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6.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미 밝히 드러나 있음에도 그것을 들으려고도, 읽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관심과 소망 때문에 예수님을 자신의 의도대로 만나서 재단하려고 하거나 혹은 예수를 거절하려고 한다. 그리고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많은 사람들이 안나스와 같은 스탠스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무거운 점은 나도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7. 고난주간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고, 고난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게 너무나도 확실하다. 그런데 나는 어떤 태도로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가? 안나스와 같이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만나다가 아니다 싶으면 버리는 사람은 아닌가? 나의 소원을 예수님께 투영하여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무리는 아닌가? 예수님에 대한 나의 사랑과 태도를 이 고난주간에 점검하게 된다. 

8. 나는 안나스와 같지 않다고 너무 쉽게 자신하지 말고, 내가 진실로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내가 진실로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지, 내가 진실로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고난주간이 되기 원한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이야기도 나온다. 그도 진심으로 예수님을 생각했고, 사랑했다. 오죽했으면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가버렸지만 예수께서 심문받는 자리까지 쫓아오지 않았는가? 그러나 베드로의 부인은 베드로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우리는 그 누구라도 베드로처럼 주님을 부인할 수 있는 자들이다.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그 정도로 얕고 가벼울 수 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의 얕고 가벼움에도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붙들어주시는 예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9. 내가 얼마나 가벼운 사랑을 가진 사람인지를 진심으로 깨닫고,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신 그리스도를 만날 때에야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안나스와 같은 사람임을 잊지 말고, 안나스와 같은 나도 사랑해주신 주님을 기억하는 고난주간을 보내도록 하자. 

10. 오늘도 샬롬 

중요한 알림!
오늘 아침 예수향남교회 선교담당 목사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는데, 몇일 전에 예수향남교회의 한 권사님이 모르는 번호의 문자로 저의 새마을금고 계좌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교담당 목사님께서 계좌를 확인해보셨고, 보이스피싱으로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심지어 계좌의 예금주도 ‘심재우'로 뜬다고 합니다. 저는 새마을금고 계좌가 없습니다. 주의하시라고 당부를 드립니다. 잘 아시는 것 처럼 저희 가정은 기도편지에 후원계좌를 올려 놓지 않았고, 먼저 계좌를 보내면서 후원을 요청한 적도 없습니다. 다만 후원을 하시겠다고 연락을 주시는 분들에게만 계좌를 공유하고 있고, 국민은행이 주계좌입니다. 공식적으로 기도편지 이외에 후원요청을 한 일이 없으니,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니 그렇게 알고 주의해주시길 바랍니다. 늘 함께 걸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샬롬 

728x90
반응형

'생각(Thinking) > Meditat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 20:19-31 참 평안  (0) 2024.04.01
요 19:1-16 하나님 나라  (0) 2024.03.28
요 18:1-11 I am NOT  (1) 2024.03.25
요 17:1-8 영생의 신비  (2) 2024.03.22
요 16:1-15 그들 안의 성령님을 신뢰하는가?  (1) 2024.03.19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4. 3. 25. 18:37
728x90
반응형

요 18:1-11 I am NOT

1. 무리들이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왔다.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3절). 

2. 예수께서는 이 시간을 위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다. 그랬기에 지금은 어떠한 두려움도 없이 담대하게 이 시간을 맞이하고 계신다.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4절).

3. 그들이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말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대답하신다. “내가 그니라" (4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그니라"의 헬라어 표현은 그 유명한 “에고 에이미"이다. 영어로 표현하면 “I am…”이다. 

4.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진술하는데 사용된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6:35, 41, 48, 51), “나는 세상의 빛이다" (8:12), “나는 양의 문이다" (10:7, 9), “나는 선한 목자이다" (10:11, 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14:6), 그리고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 (15:1, 5)이다. 

5. 예수님께서 말한 “내가 그니라"라는 표현은 단순하게 그들에게 “내가 나사렛 예수다”라고 답하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이다"라고 대답하는 신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제 다가올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의 영광을 감당해야만 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신 대답이다. 물론 거기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6.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의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어버리지 않는가?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는 그 종의 이름음 말고라" (10절). 예수님의 놀랍도록 의연하고 당당하심은 베드로의 급하고, 섣부른 행동과 비교된다. 

7. 내가 누구인지 아는 ‘나의 정체성', 그리고 하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예수님을 이토록 당당하고, 고통과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고 자신의 부르심과 사명 앞으로 걸어가도록 만들었다. 

8. 물론 나는 예수님이 아니다. 나는 죄인이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아는지가, 그리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내 삶을 결정한다. 이 부분에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세례 요한이다.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와서 묻는다. 당신이 그리스도 입니까? 엘리야 입니까? 세례요한은 대답했다. “나는 아니라 (I am not)" (요 1:21중) 예수님의 대답과는 정 반대의 대답이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I am” 이라고 대답하실 수 있지만 우리는 언제나 “I am not”이라고 세레요한처럼 대답 해야만 한다. 나는 그가 아니다. 나는 안된다. 나는 불가능하다. 

9. 나는 나를 어떤 존재로 보는가?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 나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나는 하나님의 일에 조금도 도움이 안되는 악하고 게으른 종일 뿐이다. 이런 나를 사용해 주시는 주님 앞에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순종과 감사, 그리고 겸손이다. 조금도 나를 과대평가하지 말고, 조금도 나를 착각하지 말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무익한 종일 뿐이다. 무익한 종은 나의 해야할 일을 하면 된다. 무익한 종의 정체성으로 오늘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소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 어제 종려주일에 나뭇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함께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선포하며, 그리스도께서 태국의 진정한 왕이심을 선포 하였습니다. 이번 한 주 동안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사랑을 더 깊이 묵상하는 고난주간이 되게 하시고, 성금요일에 성찬을 통해 더 깊은 주님을 만나고 경험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4. 3. 22. 12:06
728x90
반응형

요 17:1-8 영생의 신비

1. 예수께서 자신의 때와 영화롭게 되심에 대해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소서" (1절).

2. 때가 이르렀다는 말과 영화롭게 하셨다는 말은 결국 한 가지 동일한 사건을 가르키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이다. 그 처절한 십자가를 우리 주님께서는 지금 ‘영화(glorify)롭게 하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3. 십자가는 모든 죄인들을 구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고, 예수님께서는 그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또한 예수께서 영화롭게 되시는 것임을 표현하신 것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부르심 대로 살아갈 때, 경험하게 되는 신비일 것이다. 

4. 그러기에 영생은 이 신비를 경험하는 매일의 삶일 것이다. 내 뜻대로, 내 맘대로, 내 생각대로, 내가 원하는대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아래에서 그 분을 알고, 그 분을 사랑하고, 그 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함으로 살아가는 삶, 매일의 삶에서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살아감을 경험하는 신비의 순간이 영생일 것이다. 

5. 그래서 성경은 이야기 한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죽어서 가는 천국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땅에서 생명이 있는 동안에 유일하신 참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분과 관계를 맺고, 교제하고, 사랑하고, 묻고, 대화하고, 그 분께 듣고 걸어가는 삶이 더 놀라운 신비인 것이다. 

6. 죽어서 가는 천국 만이 전부라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히려 빨리 죽어서 천국에 가는게 더 좋은 것 아닌가? 그러나 지금의 우리의 삶은 의미와 이유가 있다. 우리의 삶은 이 땅에서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그 분과 매 순간을 교제하며 그 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어야만 한다. 

7. 그래서 우리 영생을 누리는 자의 삶은 반드시 달라야만 한다. 세상 사람들이 쫓아가는 기준과 기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의 기준과 뜻대로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8. 매일의 삶에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신비를 누리고 싶다. 나이가 들 수록 내 생각이 더 강해지고, 시야가 좁아지게 된다. 내 생각을 내려놓고, 넓은 시야와 안목을 가지려면 결국은 그리스도께 들어야만 한다. 다윗은 하나님께 항상 물었다. 묻고, 들은대로 그는 순종했다. 그는 날마다의 삶에서 영생의 신비를 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도 자신의 생각에 함몰되어 자신의 뜻대로 행동했던 때가 있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사건 때였다. 더 이상 하나님께 묻고 듣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생각과 욕망대로 행동했고, 죄를 범하였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험하던 그 모든 신비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나는 오늘 어떻게 살 것인가? 오늘의 삶에서 영생을 누릴 것인가? 오늘의 삶에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신비를 누릴 것인가? 아니면 욕망과 내 생각을 따라 살아갈 것인가? 

9. 오늘의 삶에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영생을 누리길 원한다. 오늘의 삶에서 욕망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살아가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수쿰빛언약교회를 위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교회가 부흥함에 따라 공간이 좁아져서 더 큰 공간을 위해 기도하고 알아보는 중입니다. 감사하게도 지난 주 가본 정부기관인 '과학교육센터'에 공간이 있어서 (BTS 에까마이 역 근처러 가깝습니다) 알아보는 중입니다. 감사하게도 주일만 렌트를 할 수 있고, 비용도 4시간에 3천바트 정도로 싼 편입니다. 다만 매주 예약을 해야 하고, 악기나 음향장비를 매번 옮겨야 하고, 식사를 함께 할 수 없다는 제약이 있습니다. 그러나 약 80명 가량 예배드릴 수 있는 공간이고, 지금 커피숍을 유지하면서 렌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잘 논의가 되어서 더 넓은 공간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예배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4. 3. 19. 12:02
728x90
반응형

요 16:1-15 그들 안의 성령님을 신뢰하는가? 

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다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 이유를 4절은 설명하고 있다.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경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 마치 마태복음 9:14-17에서 금식 논쟁이 있었을 때 하셨던 말씀과 비슷하다. 요한의 제자들이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이렇게 답하셨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마 9:15).

3. 신랑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오히려 더 기뻐하고, 그 분의 말씀을 더 깊이 듣고, 그 분과 사랑의 관계를 더 깊이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금식할 때가 찾아오고, 신랑 되신 예수께서 우리를 떠나가실 날이 분명히 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그 시간도 준비해주셨다. 

4.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7절).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사명을 감당하시고 아버지께 돌아가야 할 예수님을 대신해 우리 안에 내주하실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셨다. 

5.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 다 듣지 못하고, 다 깨닫지 못하고, 다 이해하지 못한 내용들을 이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치실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3절). 

6. 우리는 고아와 같이 홀로 남겨진 존재들이 아니다. 이 땅에서 혼자 분투하고, 홀로 애쓰면서 살아가고 있지도 않다.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며,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하고 계신 것이다. 

7. 때로는 나의 자녀들이 염려가 될 때가 있다. 얘들이 잘 배우고 있는지, 잘 지내고 있는지, 믿음은 성장하고 있는지.. 그 때 마다 내 힘으로는 이 아이들을 조금도 잘 돌보거나 성장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들 안에 계신 성령님을 (나보다도 더 이 아이들을 잘 아시고 사랑하시는) 신뢰하기에 아이들과 늘 함께 하지 못하더라도 안심할 수 있다. 

8. 어제 오랜만에 링 자매를 만났다. 태국에 다시 돌아와서 처음으로 샬롬 기숙사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삶을 나누며 지속적으로 교제를 가졌던 친구들 중에 한 명이다. 이 친구는 나를 아버지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가끔 연락이 와서 만나는데, 이제 대학을 막 마쳤고, 고향인 치앙마이로 돌아가서 거기서 지내면서 일을 할 거라고 말을 하며 치앙마이로 가기 전에 만나고 싶다고 연락이 와서 어제 만나게 되었다. 어제 만나서 식사를 하며 이야기 하는데, 이 자매가 자신의 계획이 변경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방콕 영광교회(첫 텀과 교회 개척전까지 섬겼던 교회)에서 아이들 캠프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가르치신 부분이 있어서 방콕에서 일을 알아보고, 영광교회를 계속 섬기겠다고 말하였다. 너무나도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고향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께 묻고 들어서 스스로 결정하는 모습에서 이 자매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9. 그래도 그간 자매를 만나면서 함께 교제하고 멘토링 해줬던 시간들을 돌아았더니 정말 내가 한게 아무것도 없고, 성령님께서 링 자매 안에서 일하시고 계심을 느끼게 되었다. 그 누가 강요한다고 해서 이러한 결정이 될 수 있었을까? 선교사로써 태국 사람들을 보면서 조급해지거나, 불안한 이유는 ‘내가 그들 안에 계신 성령님을 충분히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디더라도, 돌아가더라도,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그들 안에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믿고 신뢰해야 한다는 확신이 오늘 말씀을 통해서 강하게 든다. 그게 동역이고, 그게 사랑이다. 간섭하고, 명령하고, 내 생각대로 이끌어 가려는 한 그들은 성장하지 못한다. 내 생각과 계획이 아니라 여전히 일하시고, 여전히 사랑하시는 성령님을 신뢰하는 선교사로 살아가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링 자매와 찍은 사진입니다. 링 자매가 교대과정을 마쳐서 방콕에서 초등학교 선생님 자리를 알아보고, 방콕 영광교회를 섬기겠다고 합니다. 그 동안 힘든 시간도 많았는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과 성장, 그리고 성숙이 계속 있도록, 또 적절한 학교와 교사 자리를 위해서도 기도 부탁드립니다.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4. 3. 15. 11:43
728x90
반응형

요 14:15-24 사랑에는 성령충만함이 요구된다

1. 오늘 본문은 진리의 영, 성령에 대한 본문이다. 평소에도 그렇게 묵상하고 읽었던 것 같다. 그러나 자세히 본문을 살피다 보니 오히려 예수께서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하고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일단 15절이 이렇게 시작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2. 예수님을 사랑하면 계명을 지키게 되고, 그 후에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구하여 우리를 돕는 또 다른 보혜사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죄인인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정결함을 입어야 하는데, 그것을 도우시는 분이 성령님이신 것이다. 

3. 그 분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우리 안에 거하신다. “…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7절 하반부) 그런데 성령님을 잠깐 이렇게 소개하고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번 계명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오늘 본문의 핵심이 성령에 대한 소개라기보다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명에 대해 강조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대목이다. 

4.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1절) 여기서 끝나지 않고 또 예수님은 강조하신다. 23절 하반부이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말씀하신다. 

5.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23절 상반부). 예수님의 말씀은 계속해서 계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계신다. 예수님의 계명은 우리가 잘 아는데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결국 이 계명의 핵심은 사랑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이 주신 계명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또 반대로 21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다. 계명이 순환되고 있고, 이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라는 것이다. 

6. 사랑할 수 없는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도우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시고, 거룩하지 못한 나 같은 사람을 거룩함을 쫓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이 분은 우리를 고아처럼 두시지 아니하시고 계속 내 안에,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이다. 

7. 즉, 사랑은 내 힘으로 할 수 없고, 내 노력만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랑함에 있어서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에 있어서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에 있어서든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와 함께 계신 성령의 도움이 너무나도 필요한 연약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가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랑하는 자들이 바로 제자들인 것이다. 

8. 그 동안 사랑하려고, 용서하려고, 이해하려고 많은 노력들을 해왔었다. 그런데 그 노력만으로는 안되는 것들을 많이 경험했다. 계속해서 내 안에서 분노가 올라오거나 억울한 마음이 올라오는 경험들이 있었다. 내 힘으로 사랑 하려고 할 때 느껴지는 한계들이었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가 다른 이들을 사랑하려는 노력을 포기 하라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우리가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성령 하나님께 계속해서 구해야 함을 배우게 된다. 내 안에 사랑이 없는 것을 늘 발견하게 된다. 그렇기에 성령 하나님께서 나의 사랑 없음을 도우시길 기도해야만 한다. 사랑 그 자체이신 영이 내 안에 거하시기에 내 안에 사랑이 흘러 나오도록 구해야 한다. 사랑이 내 안에서 나올 거라는 착각을 버리고, 내 힘과 노력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환상에서 빠져 나오자. 사랑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성령충만함을 더 구하자. 

9. 오늘 저녁에도 형제, 자매들과 에게이로 케어그룹 모임이 있다. 입에만 발린 사랑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으로 인해 진정한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되길 간구한다. 

10.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4. 3. 13. 14:50
728x90
반응형

요 13:31-38 사랑=제자

1. 가롯 유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가 나간 후에…” (31절) 가롯 유다에게 애찬을 행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사랑 그 자체이다. 자신을 배신할 것을 알았지만 그를 다른 제자들과 다르게 대하지 않으셨다. 여전히 사랑하셨고, 여전히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2.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에 ‘가롯 유다는 배신할 놈이니 발을 씻지 말아야겠다’ 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과 행동은 항상 일치하셨기 때문이다. 그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3.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4절)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삶으로 모범을 보여 주셨다. 우리에게 그저 너희들이 열심을 다해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내가 가롯 유다를 끝까지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 뿐만 아니라 너희를 미워하고 배신하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4. 제자는 스승을 카피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스승이 한 말을 그대로 따라서 하고, 스승이 한 행동을 그대로 따라서 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는 헬라어 단어의 영어 단어는 imitate이다. 

5. 우리는 현대의 컨텍스트에서는 이 ‘이미테이션’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쓰는데, 한국어로는 곧잘 짝퉁이라고 표현한다. 명품제품들을 모방하여 아주 똑같이 만들어 파는 것을 우리는 이미테이션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부정적인 사용 용법과 상관없이 이 단어가 주는 의미는 선명하다. 제자는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는 것을 우리는 모방해야만 한다. 

6. 주님께서 사랑하셨으면 우리도 사랑해야 한다. 주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셨으면, 죽기까지 사랑하셨으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이다. 예수님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35절)

7. 세상 사람들이 내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가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성경책을 들고 다닌다고 우리를 제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무시하고 비난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결국 제자란 예수께서 하신 말, 예수께서 하신 행동을 모방하는 자이고, 예수로 살아가면 사람들의 눈에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8. 결국 다시 34절 말씀으로 돌아가게 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랑은 쉽지 않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오죽 하겠는가?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사랑 받은 자라면,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그래도 사랑해야 한다. 쉽지 않아도 사랑을 선택해야 하고, 힘들어도 사랑의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을 바꾸는 일은 칼과 총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한동대학교의 슬로건이 있다. Why not change the world? 그러나 우리가 무엇으로 세상을 바꾸며, 무엇으로 세상이 하나님을 보도록 만들 수 있겠는가? 오직 사랑 뿐이다. NIBC의 정신도 그래서 사랑인 것이다. 

9. 오늘도 사랑하기 원한다. 사랑하기 힘든,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도 사랑하기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더욱 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만나고 알아야 한다. 나를 변화시킨 사랑 안에 더 깊이 거할 때, 그 사랑의 넓이와 깊이를 깨달을 때,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주님 나를 도우소서

10.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4. 3. 12. 11:30
728x90
반응형

요 13:21-30 가롯 유다만 죄인인가? 

1. 유다는 예수님을 팔 모든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실제로 아직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을 만나서 돈을 받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의 마음은 죄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마치 브레이크가 터진 자동차 처럼 말이다. 

2.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에 너무 괴로워하고 계셨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21절) 죄로 향해 달려가는 유다의 마음은 예수님의 이 긍휼한 말씀도 들리지 않았다. 

3. 자칭 예수께서 사랑하신 제자 요한이 묻는다. “주여 누구이니이까?” (25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26절) 본문의 내용을 통해 유추하자면 유다는 이 대화를 듣지 못했던 것 같다. 

4. 그러나 이 때 유다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하고 두근거렸을까? 한 때 자신이 사랑했던 주님을 배반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이미 마음은 예수를 죽이려는 죄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떡을 포도주에 찍어서 주신다. 어디서 본듯 한 장면이 아닌가? 교회에서 하는 애찬식의 모습이다. 즉 애찬의 떡을 떼어서 자신에게 먹으라고 주신 것이다. 

5. 자신은 예수를 증오하고, 예수의 효용가치가 없어졌다고 생각하여 예수를 죽이려는 결정을 하고 있는 바로 그 시점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애찬의 떡을 주시며 자신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 계신 것이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슬프게도 가롯 유다에게서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6. 어릴 때 성경을 보면서는 늘 가롯 유다의 어리석음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 중에 누가 나는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가롯 유다와 같지 않다고, 예수님이 회개의 기회를 주실 때 나는 죄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리스도만 사랑했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유다라고 그리스도를 항상 배신하려고만 했겠는가? 그도 한 때는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했었던 제자 아니었던가? 

7. 죄를 사랑하는 마음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항상 공존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보다는 죄를 사랑하여 넘어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가롯 유다도 사랑하셨다. 사랑하셨을 뿐만 아니라 끝까지 사랑하셨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

8. 나는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나를 혹시 의롭다고, 괜찮다고, 선교사니까, 목사니까, 사역하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나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내가 가롯 유다 보다 조금도 나은 것이 없다는 것이고, 그리스도만 사랑하는 자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죄도 사랑하고, 예수님을 배신하고 나의 이익을 찾는 나같은 사람도 주님이 여전히 사랑하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끝까지 사랑하신다. 그러기에 우리가 계속해서 믿고, 따라가야 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내가 지금 부끄럽지만 부족하지만 내 삶은 여전히 죄로 가득차 있더라도 주의 은혜로 목사로 선교사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9. 가롯 유다의 배신은 우리의 죄성의 모델이다. 그만 특별히 악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 중 누구라도 그와 같이 그리스도를 버리고, 배신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 여전히 애찬의 떡을 주시고, 사랑해주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우리에게 여전히 애찬의 떡을 주시고 사랑을 넘치도록 부어주시고 계신다. 그러기에 오늘을 은혜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내 삶으로 조금이라도 그 사랑에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한다. 삶의 한 절이라도 그 분을 닮길 원하며, 삶의 한 모퉁이라도 그 분을 드러낼 수 있는 삶을 살아내길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