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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1:45-57 내가 중요한 사람들이 해야 할 고백

1. 나사로를 부활시킨 예수님의 기적을 본 유대인들은 두 부류로 나눠진다. 아이러니 하게도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는 자와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로 나눠진다. 

2. 왜 똑같은 기적을 보고서 두 그룹으로 나눠지는가? 두 부류는 각각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그리스도로 보았기 보다는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고 했다.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여 볼 때 어떤 것이 더 이익인지에 따라서 나눠졌다고 볼 수 있다. 

3. 믿은 자들은 아마도 예수님을 유대인들의 만의 메시아로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순수하게 믿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후의 본문들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어쨌든 그리스도를 구약 이사야의 예언대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받는 종으로 오시는 분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구원하여 주시는 유대인들 만의 메시아로 소망했던 것 같다. 

4. 반대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무리들은 로마로 부터 자신의 지위와 재산을 보호받았던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민란을 두려워했다.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48절) 민란이 발생하여 가진 것을 빼앗기고 싶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이 나대시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5. 이 두 그룹을 보면서 베드로에게 던졌던 예수님의 질문이 생각났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5) 나는 어떤 그룹에 속한 사람일까? 첫 번째 그룹처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지만 예수님은 반드시 나만의 하나님이셔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은 램프의 지니처럼 나를 위한 하나님이셔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잘 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지는 않은가? 

6. 아니라면 두 번째 그룹의 모습 처럼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은 희생하셔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그 분이 메시아이든 아니든 상관없고,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은 나의 권력과 자리일 뿐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잘 되는 것, 내가 편안하고, 행복한 것 이기에 예수를 이용하려고 하지 않는가?

7. 두 그룹 모두 그리스도 보다 내가 더 중요한 사람들 이었다. 내가 그리스도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내가 그 누구보다도 더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나의 욕망만이 중요하고, 나의 욕망이 채워져야 하고, 결국은 나의 욕망을 채워야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셔야만 한다. 나에게 이 두 그룹 속의 유대인들의 모습이 없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8. 이러한 우리의 존재의 가벼움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고백할 수 있게 된다. “Not I, but Christ” 내가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고백이다. 나의 욕망보다 그리스도께서 더 귀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위해 움직이게 된다. 이렇게 고백하기 위해서는 유대인 두 그룹이 예수님을 대했던 것과 같은 나의 태도에서 절망을 보아야만 한다. 나에게 이 두 그룹 속의 유대인들처럼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고 있었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있었음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우리를 위해 약속대로 죽어주셨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분의 크심을 발견해야 한다. 그래야만 나는 죽고 예수로 살 수 있다.  

9. 오늘 나는 어떤 욕망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 욕망을 뒤로 하고 “Not I, but Christ” 를 외치며 그리스도를 따라 한 걸음을 내딛기 원한다. 누구를 위한 사역이며, 누구를 위한 선교인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다 욕망일 뿐이다. 내 안에 사역을 잘 하는 선교사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만 사랑하고, 그리스도만 전하는 선교사이면 충분하다. 그래서 오늘도 “Not I, but Christ” 로 살아가기 원한다. 욕망이 아니라 복음이 나를 이끌어 가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붐 형제(어제 사진에 보셨던 테오 형제 동생)와 1:1 성경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한 달 즈음 전에 저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듣고 중요한 일을 결정하냐고 질문을 했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믿음은 있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알아야 할 것들을 거의 모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본인도 이야기 하기를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 한 번도 양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고 하여 1:1 성경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동안 힘든 일들도 많았고, 무엇인가를 잘해내야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줄 거라고 믿으면서 부담도 많이 컸던 것 같습니다. 양육을 통해 붐 형제가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참 자유와 평안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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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1:17-27 예수님을 보는 시선, 마리아 vs 마르다

1. 나사로가 죽었다. 11장 전반부에서 보면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죽은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 나사로는 예수님의 친구였다. 그러나 사랑하는 친구가 죽었음에도 예수님은 슬퍼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위한 다른 계획(그를 부활하게 하실)이 있으셨기 때문이다. 

2. 나사로의 누이 두 사람이 등장한다. 우리가 잘 아는 마르다와 마리아이다.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도 예수님 발 앞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마리아는 나오지 않았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0절).

3. 뭔가 마리아답지 않은 모습이다. 아마도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해 실망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뭐 우리도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 실망해서 하나님께 말하고 싶지 않고, 그 앞에 나아가고 싶지 않을 때 말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다는 주님 앞으로 나아갔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2절) 

5. 또한 마르다는 예수님을 그저 자신의 사랑하는 오빠의 한 친구로 생각하지 않았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주 (주님, 주인)’라고 불렀다. 그녀가 그리스도를 부르는 호칭, 그녀가 그리스도께 구하는 22절의 내용을 보면 그녀는 예수님을 오빠를 사랑하는 한 친구로 대하고 있지 않다. 

6. 그녀는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그리스도로 대하고 있다. 마리아는 오빠가 이미 죽었기에 실망감에 예수님께서 오셔도 나와보지도 않았지만 마르다는 이미 늦었더라도 예수께서 하나님께 구하면 새로운 일들이 일어날 것을 믿었던 것이다. 마리아가 믿었던 예수님보다 마르다가 믿었던 예수님이 훨씬 더 크고 놀라우신 분이셨다. 

7. 우리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보고 있느냐를 두 자매의 반응을 통해 생각해보게 된다. 죽음은 모든 것을 끝내게 만든다. 죽음이 예수님보다 더 크다고 믿었던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러 나오지도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음보다도 더 크신 분으로 믿었던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넘어 오빠를 다시 살리시는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된다. 

8. 나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보고 있는가? 예수님이 정말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인가? 온 우주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하나님이신가? 나는 그 분을 작게 보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마리아와 같이 때로는 이미 ‘하나님은 못하실거야,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에는 관심이 없으셔'라고 전제하며 하나님을 배제하고 내 힘으로 하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믿고 있는 예수님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는 하나님을 내가 어디까지 신뢰하느냐의 문제이다. 부활을 믿으려면, 부활이 실제가 되려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분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셔야지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나는 마리아의 시선으로 주님을 보고 있는가? 마르다의 시선으로 주님을 보고 있는가? 

9. 예수님을 작게 보는 우를 범하지 않기 원한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다. 그 주님과 오늘 하루를 살아내기 원한다. 주님의 크심이, 주님의 광대하심이 나의 삶을 오늘도 이끌어가길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테오, 임 부부가 교회멤버로 등록했습니다. 남편 테오 형제는 10년을 넘게 베트남의 NIBC회사와 함께 일해오던 형제이고, 주로 우본에서 생활을 했었습니다. 아내 임 자매는 작년 말에 스위스에서 박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마히돈 대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1월 초에 결혼을 했고, 저희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기로 결정하고 식사 교제를 가졌습니다. 이 가정이 그리스도 안에서 잘 세워지길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특별히 저희 교회에 마히돈 대학 교수가 2명이 있게 되었는데 (그동안 기도해주신 좁 형제까지..) 하나님께서 뭔가 하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모든 과정을 잘 분별하고, 순종함으로 마히돈 대학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길 소망하고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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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2. 28.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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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22:1-20 나는 그리스도의 편지인가? 

1. 엘리바스가 욥에게 말하기 시작한다. 그 핵심 논지는 변하지 않는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2절 상반부) 그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다. 4-5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건함 때문이냐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

2. 사실 엘리바스의 말은 맞다. 우리 인생은 악하고, 또 악하다. 그 누가 하나님께 유익할 수 있으며 그 누가 하나님 앞에서 내가 경건하다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티끌이며,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일에 아무런 기여를 할 수 없는 악한자일 따름이다. 

3. 13-14절에 엘리바스는 다시 이야기 한다. ”그러나 네 말은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며 흑암 중에서 어찌 심판하실 수 있으랴 빽빽한 구름이 그를 가린즉 그가 보지 못하시고 둥근 하늘을 거니실 뿐이라 하는구나“ 우리는 우리의 행위도, 생각도, 마음의 의도도 조금도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없다. 모든 것이 그 분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자들이다. 

4. 이런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는 중보자가 필요하다. 우리는 시시때때로 악하며 죄를 짓는 존재들이기에, 우리의 모든 허물과 연약함, 드러난 모든 죄를 감추어 주실 수 있는 분이 필요하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5.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이런 연약함을 아신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십자가에서 다 짊어지셨고, 우리를 모든 죄와 저주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 그리스도의 대속함이 없이는 우리는 결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으며, 결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6. 영원한 죄를 가지고 영원히 사는 것이 지옥이 아닌가? 그 죄를 멈출 수가 없고, 그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영원히 산다면 그것이 바로 절망의 끝일 것이다. 그러나 엘리바스가 고발한 그런 악독한 존재인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해 모든 것을 용서받고 모든 관계가 회복된 존재가 된 것이다. 

7. 그렇기에 복음은 우리의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밖에 없다. 모든 끊어진 관계, 모든 절망, 모든 연약함이 회복되는 지점이 바로 복음이다. 그래서 복음은 단순한 기독교라는 종교로 머물 수 없다. 복음은 삶이고, 복음은 변화이며, 복음은 나의 정체성이며 우리의 존재 그 자체가 된다. 

8. 나는 이런 놀라운 복음을 가진 사람이며, 이 놀라운 복음을 태국 사람들에게 전하러 온 사람이다. 복음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바로 나의 삶인 것이다. 그래서 내 삶은 바울이 이야기 한 것 처럼 ‘그리스도의 편지’ (고후3:3)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용납함이 내 삶을 통해서 읽혀지고, 전해져야 한다. 내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읽을 수 없다면 나의 모든 사역도 헛될 뿐이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리스도의 편지인가? 그리스도의 사랑인가? 아님 늘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며, 그저 바쁘게 밖으로 돌아다니는 아버지일 뿐인가? 그리스도의 편지로 오늘을 살아내는 내가 되길 원한다. 

9. 엘리바스가 욥에게 하는 말은 사실 틀린 말이다. 욥은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엘리바스가 나에게 하는 말은 맞는 말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그럼에도 나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늘도 그리스도의 편지로 살아내길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에게이로 클럽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결신하는 고등학교 형제, 자매들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진에도 아래쪽에 브이 하고 있는 아트 형제(관심자), 윗 줄에서는 가장 왼쪽 왓수 형제 (영접 후 교육중), 그리고 왼쪽에서 세 번째 아치 자매 (지난 주 영접) 가 계속 예배와 케어그룹 모임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일 예배에도 계속해서 고등학교 형제, 자매들이 오고 있습니다. 지혜롭게 에게이로 클럽을 운영하고, 계속 복음이 전해져서 더 많은 영혼들이 이 놀라운 자유와 회복을 경험하고, 저희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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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2. 22.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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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18:1-21 옳음을 증명하려 말하지 말고 영혼을 살리려는 말을 하자

1. 욥의 (뻔뻔한) 대답에 빌달이 화가 난 것 같다. 권선징악의 사상에 속해 있는 사람들에게 고통과 어려움의 시간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분명 욥의 삶에는 죄의 결과인 고통이 가득차 있는데, 욥은 여전히 자신에 대해서 변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2. 2절은 빌달의 화가 표현된다. “너희가 어느 때에 가서 말의 끝을 맺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 욥은 아직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약간 성내면서 말하고 있다. 

3. 그리고 그는 악인의 운명을 5-14절까지, 악인의 최후를 15-20절까지 말하고 있다. 5절을 보면 “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의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 라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5-20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권선징악의 표현대로 악인은 망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4. 빌달이 가지고 있는 사고에서는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다. 죄가 없는 자는 복을 누리고, 죄가 있는 자는 벌을 받는게 당연하다. 그의 말은 확신에 차 있었고, 그의 논리는 탄탄했다. 

5. 그러나 그의 옳은 말은 욥의 마음을 비수같이 찔렀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욥의 고통을 이해하고 함께 하기 보다는 욥의 마음을 난도질 하고 있었고, 너의 고통은 너의 죄의 결과일 뿐이니 회개하라고 말한다. 

6. 어떤 말을 하느냐는 참으로 중요하다. 물론 우리는 옳은 말을 해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해야 한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조금만 지혜롭게 말을 하면 같은 옳은 말을 하더라도 상대방이 좀 더 받아들일 수 있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7. 나의 옳음을 주장하거나 증명하기 위해 하는 옳은 말은 결코 다른 사람을 살리지 못한다. 그저 나의 옳음만 남을 뿐이다. 그러나 조금 돌아가더라도, 혹 나의 옳음이 증명되지 않더라도 사람을 살리는 말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8. 최근에 아내로부터 종종 듣는 말이 “오빠 말 좀 이쁘게 해"였다. 나의 말투가 문제인 것 같다. 악의가 없어도, 나쁜 의도가 없어도 말투가 뭔가 공격적이거나 혹은 아내가 듣기에 불편하게 말한 것이 틀림이 없다. 그럼 곧바로 대답한다. “나는 그런 의도가 없었어"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면서 또 오늘 묵상을 하면서 생각하게 된다. 나는 혹시 나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오히려 해야 할 것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말이 아닌가? 나의 말 끝에 나의 옳음만 남는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생명이 남아야 하고 그리스도께서 남아야 하지 않겠는가? 다시 한번 마음을 잡는다. 정신줄 잡고 말하기, 나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말하지 않기, 살리는 말을 하자. 

9. 빌달 같은 사람이 되지 않기 원한다. 정신줄 놓으면 사실 금방 다시 말을 통해서 나의 옳음을 증명하려고 한다. 중요한 것은 나의 의로움이 아니다. 내가 얼마나 의롭겠는가?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보다 낫겠는가?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고, 영혼이다. 사랑이다. 살리는 말을 하는 사람이 되자. 

10. 오늘도 샬롬

*에게로 클럽이 재정비가 되고 있습니다. 사역자 회의를 통해서 어떻게 왓타텅 학생들을 섬길지 나누고, 알파코스를 통해서 접촉점을 늘려가기로 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가 있기를, 그리고 지금 주일 예배에, 에게로 클롭 모임에 나오는 모든 학생들의 마음에 복음의 씨앗이 잘 심기워지길 기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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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2. 13.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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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10:1-22 다 알기 때문에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선하심을 믿기 때문에 걸어가는 것이다

1.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대해서 우리는 원인이나 이유를 잘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께 내 인생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하나님께 항변하게 된다. 

2. 하나님께 항변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이다. ‘내가 이런 일을 당할 만큼 나쁘게 살지 않았다’ 혹은 ‘이런 일을 당하게 되는 것은 불공평 하다’는 논지일 것이다. 욥도 원인 모를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중이고, 그의 세 친구들이 위로해 주기 위해 찾아왔으나 위로는 커녕 오히려 정죄의 말만 쏟아내고 있다.

3. 8장에서 빌닷의 말을 들은 욥의 반응이다. 욥의 반응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도 왜 이런 고통이 자신에게 찾아 왔는지에 대해 궁금해한다. 그래서 2절에서 이렇게 외친다.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 "

4. 욥은 정말로 알고 싶었다. 우리가 욥의 인생을 알지만 그가 이런 어려움을 당할만한 까닭이 있었는가? 그는 당대의 의로운 사람으로 그와 같은 사람은 없었다. 하나님도 인정하시는 의로운 자가 욥 아니었는가? 그러니 이유를 알고 싶은 그의 반응은 당연하다. 

5. 그리고 그는 9절에서 외친다. “기억하옵소서" 자신의 삶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기억하시기를 간구한다. 억울하고 또 억울하다. 그러나 욥은 그 이유에 대해서 결코 듣지 못한다. 

6. ‘권선징악’으로 대표되는 우리 인간의 생각 속에서 의인의 고통은 쉽지 않은 일이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아야 하고, 나쁘게 살면 벌을 받아야 한다. 물론 우리가 착하게 살았을 전제 하에서나 성립되는 공식이다. 우리가 ‘권선’의 영역이 아니라 ‘징악’의 영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7.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한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9) 우리가 ‘권선’의 영역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언제나 이유가 필요하다. 억울하다. 물론 우리는 선하게 살려고 애쓰고, 사랑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죄인일 뿐이다 (롬 3:23). 

8. 어찌보면 억울하다. 어찌보면 화가 난다. 욥의 모든 반응이 이해가 된다. 나로 알게 하시고, 나를 기억하시라는 그의 고백이 다 나의 고백이다. 그러나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딱 하나이다. 나는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왜 내 삶에 이런 어려움이 찾아오는지, 이런 고통이 찾아오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선한 존재가 아니며 오직 피조물일 뿐이며 하나님이 아니란 것이다. 그러나 내가 믿는 그 하나님이 이 고통의 순간에도, 어려운 시간에도 선하시다는 것이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시 103:8)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06:1)

9. 하나님의 변치 않는 선하심을 믿으며 이 땅에서는 다 모르지만 다 이해되지 않지만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것이다. 다 알기 때문에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선하심을 믿기 때문에 걸어가는 것이다. 오늘도 그 분의 선하심을 믿음으로 한 걸음 내딛기 원한다. 여전히 이해되지 않고, 묻고 싶고, 항변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지만… 나는 믿는다.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0. 오늘도 샬롬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에게이로 클럽(Egeiro Club)이 너무 활성화가 잘 되고 있어서 감사합니다. 기도를 부탁드리는 것은 아이들이 너무 많이 오는데 비해서 저희가 함께 섬길 사람들이 부족하여서 좀 분주한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에게로 클럽을 섬기는 모두에게 지혜를 주시길.. 그리고 그 친구들 중에 주일 예배를 참석하는 그룹, 주일 예배에 밥만 먹으러 오는 그룹, 또 예배 이후의 체육활동만 오는 그룹 등으로 나눠져서 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오든지 문제는 없지만 딱 하나의 문제는 저희 교회 예배당이 좁아서 다 너무 분주하다는데 있습니다. 이 그룹들을 효율적으로 잘 인도해서 주일 예배가 분주하지 않도록, 또 관계가 잘 세워지고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해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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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1:1-12 인과관계가 다른 하나님의 사랑

1. 욥은 요즘말로 말하면 사기캐(스펙이 너무 뛰어난 말도 안되는 캐릭터) 이다. 엄청난 부자라는 것에 더하여 그에 대한 평가는 더욱 더 엄청나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1절)

2. 이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는 또 나온다.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3절 하반부). 이런 평가를 받는 사람이 성경 어디에 있는가? 성경의 평가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 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평가도 엄청 후하다.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여 악에서 따는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8절)

3. 이 사람은 심지어 자신들이 아이들이 하나님께 범죄할까봐 제사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그것도 가끔도 아니고 항상 그랬다. 

4. 이런 욥에 대해 사탄은 참소한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9절) 사탄에게는 사랑이란 조건적이다. 흔히 말하는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의 결과이다. 하나님이 잘 해주니까, 부자로 만들어 주시고, 자녀도 많고 등등등 감사의 이유가 있으니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5. 사탄이 이해할 수 없는게 당연하다. 하나님께 반역하고, 하나님 대신 자신이 모든 피조물로 부터 경배받기 위해 사탄은 처음부터 하와에게 거래하지 않았는가? “너 안죽어, 너 지혜롭게 될거야, 너 하나님 처럼 될꺼야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 따위에 순종하지 말고 선악과 먹어도 괜찮아!!”

6. 사탄과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은 인과관계가 다르다. 사탄은 사랑을 받으려면, 무엇인가 좋은 것을 얻으려면 네가 무엇인가를 하라고 내 놓으라고 말한다. 종교적인 행위의 모습이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착하게 살아야하고,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내 말과 행동이 사랑받을 만해야 한다. 거래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얻어내기 위해서 순종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먼저 사랑하신다. 죄인 된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고, 먼저 사랑하시고, 우리가 죽어달라고 요청하시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우리가 사랑스럽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떠하든지 우리를 사랑하신다. 사탄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이유를 묻는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께 왜 나를 사랑하시는지를 묻는 것 처럼 말이다. 

8. 욥을 향한 사탄의 참소 속에서 나의 모습을 본다. 왜 하나님께서 악한 세상을 여전히 그냥 두시는지 (내 삶도 여전히 악하지만…), 왜 하나님께서 나를 힘들게 한 그 인간을 망하게 하시지 않는지, 왜 하나님께서 저 사람들을 그냥 두시는지 까닭을 묻는다. 죄인 된 나를 향한 일방적이고, 완전한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서 계속 묻는다. “하나님 왜 그러세요?” 그 까닭이 꼭 내가 이해가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오래참으심이 꼭 내가 이해되는 이유로 설명이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잘해주시니까 그 인간들이 여전히 그렇잖아요?” 이런 나의 참소가 사탄의 욥을 향한 참소와 무엇이 다른가? 

9. 하나님과 거래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죄인 된 나는 나 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은 존재일 뿐임을 깨달아야 한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8:4의 경이가 삶에 있어야 한다. 거래하려고 하지 말고 사랑해야 한다. 판단하지 말고 사랑해야 한다. 세상의 방식과 인과관계가 다른 하나님의 사랑이 내 삶을 가득 채우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태국 사람들을 위한, 또 내 주변의 가족들과 이웃을 위한 사랑, 그 좁은 길로 가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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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4년도 벌써 한 달이 다 지났습니다. 
방콕의 수쿰빛 언약교회와 저희가정과 늘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희 가정의 2024년 첫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기도의 제목을 나눠주시면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샬롬

 

February, 202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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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 30.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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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9:13-23 사랑하는 자의 자리

1. 율법은 항상 율법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모 아니면 도 이다. 지키면 복을 받고, 지키지 못하면 벌을 받는다. 율법의 정신은 사람에게 향해 있었지만 사람은 온데간데 없고 율법 그 자체만 남았기 때문이다. 

2. 오늘 본문에서도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정신은 놓치고 율법 그 자체만 말하고 있다.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16절)

3. 안식일 계명을 범하였으니 사람을 구하였더라도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논리에 따르면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는 사람을 구하기 보다는 율법을 지켜야 하는 자였다. 

4.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의 안식일의 정신은 지키셨지만 안식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맹인을 안식일에 고치셨다. 복음은 항상 사람이 우선이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 우선이어야만 한다. 예수님은 판단하는 자의 자리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리에 서 계셨다. 

5. 바리새인들의 컨셉, 즉 판단하는 자의 자리는 쉽다. 어떤 상황도 관계없고, 어떤 예외도 없다. 생명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율법 그 자체일 뿐이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도 율법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율법이 사람보다 귀한가?

6. 그럴 수 없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한 사람보다 귀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율법은 사람을 위한 것이지 사람이 율법을 위한 것일 수 없다. 그 우선순위를 잊어버리면 우리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율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위해 사람을 희생하게 만들게 된다. 

7. 올해 여러가지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계속 사람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가? 사랑하고 있는가? 사랑하되 나의 몸과 나의 지체와 같이 사랑하고 있는가? 혹시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사랑하는 자의 자리에 있는가? 아님 판단하는 자의 자리에 있는가? 

8. 2024년의 1월이 벌써 마무리 되어 간다. 2024년이 처음 시작될 때 가졌던 그 마음들을 잘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길 원한다.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자가 되기 원한다.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지 말자.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내가 판단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는 헛된 시도일 뿐이다. 판단하려 하지 말고 사랑하려 하자. 이것이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2024년에 내가 많은 것들을 하더라도 결국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했던 일들만 남을 것이다. 사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의 자리에 서 있자.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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