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4. 9. 10.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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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 6:1-14 두려움으로 부터 듣지 않으려면…

1. 성벽 공사가 아직 마무리 되지 않은 때이다. 1절 하반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때는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였더라" 느헤미야는 성벽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아마도 여러가지로 마음이 편하지 않은 때 였을 것이다. 그때 성벽공사를 방해하던 산발랏과 게셈이 느헤미야를 따로 만나자고 한다. 

2. 그들은 리더인 느헤미야만 죽는다면 이 성벽공사가 마무리 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느헤미야를 따로 만나 죽일 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알았던 느헤미야는 지금 성벽공사라는 큰 역사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못 만나겠다고 했고, 그들은 느헤미야를 4번이나 다시 청했다 (2-4절). 

3. 느헤미야가 거절하자 그들은 느헤미야가 왕이 되려고 한다는 식으로 모함하기 시작한다. “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고 가스무도 말하기를 너와 유다 사람들이 모반하려 하여 성벽을 건축한다 하나니 네가 그 말과 같이 왕이 되려 하는도다” (6절).

4. 산발랏과 게셈이 가지고 있던 전략은 요즈음 테러리스트들이나 정치가들이 하는 전략과 비슷하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살인의 공포나 유언비어를 통해서 두려움을 자극시켜서 한마음이 되지 못하게 하고, 두렵게 만들어서 더 이상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하게 만들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전략은 10-14절에서도 또다시 살인의 시도와 뇌물을 통한 유언비어를 유포하는데서도 나타난다. 

5. 두려움이란 감정은 매우 작은 크기에서 시작되지만 한 번 두렵다고 느끼기 시작하면 그 감정은 한없이 커지게 된다. 한 번 경험하고 나면 두려움이라는 메아리가 내 안에 계속 울리게 되고, 두려움은 계속 나를 붙들어 매어 나로 하여금 하나님보다 그 상황에 더 집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6. 이 두려움을 느헤미야는 어떻게 이겼는가? 그는 하나님께 기도한다. “내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선지 노아댜와 그 남은 선지자들 곧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들의 소행을 기억하옵소서 하였노라” (14절) 나를 모함하려고, 나를 죽이려고 드는 자들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 분께 나의 상황을 아뢸 때, 우리는 비로서 그들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보게 된다. 

7. 나를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나를 지키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두려움의 감정을 이겨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리더에게는 두려움으로 부터 듣지 않고 하나님으로 부터 듣기 위해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있는 용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8. 내 삶을 돌아보니 나도 많은 순간 두려움으로부터 듣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별히 자녀양육에서 그렇다. 요엘이가 마라를 계속해서 자극시키면서 안좋은 영향을 미칠 때, 아내는 무시하고 좋은 것으로 심어줘야 한다고 하지만 내 안에 두려움은 이렇게 뒀다가 큰일나겠으니 내가 지금 제지해야 한다고 내게 말한다. 그러면 나는 요엘이에게 화를 내며 큰 소리를 내고, 그러면 더 안 좋은 상황으로 가게 된다. 두려움으로부터 들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부터 들어야 한다. 성령의 열매를 맺은 아버지의 삶을 보여줘야 하지, 참지 못하고 순간 욱하여서 계속 혼내는 아버지의 삶을 보여줘서는 안된다. 

9. 느혜미야는 두려움으로 부터 듣지 않았다. 그것이 느헤미야로 하여금 성벽재건이라는 사명을 잘 마칠 수 있게 해주었다. 나는 오늘 누구로 부터 듣고 있는가? 두려움으로 부터 듣는 것은 너무나도 쉽고 자연스럽다. 그러나 두려움으로 부터 듣지 않으려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그 두려움보다 더 크신 하나님으로 인해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 나를 두렵게 하는 여러 소리들을 잠잠하게 하고 오직 주님께로부터 듣기를 원한다. 잠잠하게 기도하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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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 3:15-32 나에게 주신 구역

1. 오늘 본문을 보면 수많은 이름들이 나오고, 그 이름들이 책임졌던 부분들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분량의 성벽 중수를 책임지지 않았다. 각자의 상황과 환경에 맞게 사명이 주어졌다.

2. 특별히 문은 좀 더 힘이 있는 사람들이 책임졌다. “샘문은 미스바 지방을 다스리는 골호세의 아들 살룬이 중수하여 문을 세우고 덮었으며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고 또 왕의 동산 근처 셀라 못 가의 성벽을 중수하여 다윗 성에서 내려오는 층계까지 이르렀고” (15절). 

3. 포로시기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어느 지역을 다스리는 권력이 있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큰 부분을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것을 ‘노블리스 오블리제’ 라고도 할 수 있겠다. 

4. 그리고 ‘그 다음은' 이라고 하면서 이제 보통 사람들은 성벽의 한 부분씩을 중수한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그 다음은' 이다. 왜냐하면 권력이나 재력을 가진 사람의 숫자는 적지만 오히려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도 자신에게 맡겨진 부분의 성벽을 중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5. 성벽 재건은 한 팀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보통 생각할 수 있는 스케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권력이나 재력을 가진 몇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정도의 일이 아니다. 모두가 한 팀이라는 같은 마음을 가지고, 나의 책임이 있는 부분을 성실하게 세워갈 때, 성벽이 온전하게 세워지게 된다. 

6. 내가 꼭 문을 세우는 유력한 가문의 소속이 아니라도 괜찮다. 나는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그 다음은' 다음에 나오는 우리가 묵상 본문을 읽었지만 쉬이 기억하지 못하는 가문에 속한 사람이어도 괜찮다. 나에게 맡겨주신 분량만큼 해 나간다면 성벽은 재건될 것이기 때문이다. 

7. 오늘 본문을 보면서 수쿰빛 언약교회와 태국선교가 생각이 났다. 방콕이라는 대도시에서 우리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그 다음은' 에 속하는 작은 일일 수도 있다. 아니 작은 일이다. 그러나 방콕에 있는 다른 교회들과 원 팀으로, 또 한국과 여러 나라들에서 살아가면서 태국 선교를 위해서 함께 마음을 모아 기도하고 후원하며 우리 가정과 함께 애쓰는 사람들과 원 팀으로 함께 맡겨주신 분량 만큼만 세워간다면 결국 하나님 나라는 확장될 것이다. 

8. 사역에 욕심을 내거나 내가 많은 것을 다 해내려고 하지 말자. 사역의 사이즈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부분을 내가 잘 세워가고 있느냐일 것이다. 내게 맡겨주신 영혼들, 내게 맡겨주신 사역들을 최선을 다해서 하며, 우리 가정과 원 팀으로 묶여진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다 보면 어느새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사역이라는 구역만 맡겨주신 것이 아니다. 가정도 나에게 맡겨 주신 사명이다. 만약 가정에 대해 소홀히 하면서 사역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시지 않을 것이다. 

9. 나에게 주신 구역들을 다시 한번 정리하는 시간을 갖자. 내가 섬겨야 할 사람들,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들, 내가 마음을 쏟아야 할 사람들, 그리고 또 가정과 사역의 밸런스를 맞출 수 있는 내가 되기 원한다. ‘원 팀'으로 함께 걸어갈 사람들을 기억하고 기도하자. 

10. 오늘도 샬롬 

*저를 위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지난 주에 아이들을 픽업해서 프리웨이를 빠져나가려고 속도를 낮추며 가던 중 뒤에서 저희 차를 추돌하는 사고를 겪었습니다. 후방추돌이기 때문에 제가 잘 못한 것은 없는데, 안그래도 허리가 안좋은데 허리와 목 등이 아파서 통증의학과에서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아이들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치료가 잘 진행되고 병원으로 오고가는 길(왕복 2시간)에 안전하게 다녀올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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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8. 26.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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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 5:12-22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1.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보내는 첫 번째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반복한다.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13절 후반부) 사랑 안에서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 안에서 화목하라고 가르치신다. 

2. 왜냐하면 우리가 복음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복음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귀하여 여김을 받았고,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복음을 들은 자의 삶은 이전과는 같을 수 없다. 나 혼자 잘 사는 삶도 되어서도 안된다. 오직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야만 한다. 

3. 14-15절을 보면 이러한 점이 잘 나타난다.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삼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들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이제는 복음에 합당하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어야 한다. 

4. 21-22절은 한 번 더 반복한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우리는 이제 범사에 헤아려 보면서 좋은 것만 취하고, 악은 모양도 취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살아가셨고, 우리를 대하셨기 때문이다. 

5. 그러나 우리가 어찌 예수님의 성품을 나의 인격으로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 실마리는 16-18절 우리가 잘 아는 구절에서 나온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우리는 성령충만함의 증거로 우리 삶에 드러나는 것 같은 사도바울이 제시한 이 세 가지를 삶에서 호흡처럼 행해야만 한다. 

6.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선하시고 또한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고 선하시다는 사실을 온전하게 깨달아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선하신데 우리가 슬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선한 뜻으로 이끌어 가신다는데 우리가 감사하지 않을 수 없지 않겠는가? 

7. 쉬지 말고 기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기도에 신실하게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온전히 깨달아야 한다. 내가 그 분 안에, 그 분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을 때, 나의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를 주님께서 모두 들으시고, 아신다는 사실을 알 때에 가쉽을 멈추고, 쓸데 없는 말을 멈추고, 내가 하는 모든 말이 기도와 찬양이 될 것이다. 

8. 결국 주님을 더 깊이 아는 것, 복음을 더 깊이 깨닫는 것이 우리의 삶과 말과 행동을 바꾸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 복음을 전해서 듣고 깨달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마지막으로 그들의 삶이 복음에 합당해야 함을 권면하고 있다. 요즈음 아이들이 서로 다투기 때문에 또 요엘이의 원래 가지고 있던 어려움과 더불어 시작된 사춘기로 인해서 어려운 일들이 많다. 내 마음은 깨어지고, 상하고, 속상할 때가 많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다. 복음을 가진 자의 삶은 나의 자녀들의 삶을 사랑 안에서 귀히 여기고, 화목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마음에)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고,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아야 한다. 특별히 나의 아이들에게.. 

9. 복음을 가진 아빠의 모습 속에서 아이들이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기 원한다. 순간 순간 욱하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삶의 모습이 내 삶에서 한 절이라도 드러나길 원한다. 그렇게 오늘을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 나를 도와주세요. 

10. 오늘도 샬롬 

https://youtu.be/eoDsJr7LF-0?si=WGHG02KVe9NkNjc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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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8. 22.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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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 2:13-20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자가 되자

1.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가장 큰 장점은 바울이 전한 메시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13절 전반부). 

2. 어쩌면 설교의 완성은 설교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청중들에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설교자가 아무리 설교를 잘해도 듣는 자의 마음이 닫혀 있고, 어디 한 번 나를 설득해봐!! 라는 표정으로 설교자를 쳐다보면서 설교를 평가만 하고 있다면 과연 그 설교에서 능력이 나타나겠는가? 바울의 감사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에게 들은 말씀을 바울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 

3. 그랬더니 그 결과는 말씀이 역사하게 된다.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13절 하반부) 말씀이 역사하기 위해서는 영성과 능력있는 설교자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말씀을 듣는 자의 마음과 태도가 어떠한지에 달려 있다. 

4. 내가 읽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가 듣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가 묵상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인가? 나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혹시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즉 말씀을 듣고 나서 내가 순종이나 불순종을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진 않은가? 내 마음에 드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말씀은 그저 무시해도 괜찮은 말씀으로 나 스스로가 결정하진 않는가?

5. 나는 목사로, 선교사로 때로는 말씀을 전하기도 하고, 때로는 듣기도 한다. 그 때 마다 나는 누구의 말씀으로 전하고, 누구의 말씀으로 받는가? 나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처럼 누가 설교하든지, 어떤 말씀을 전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가? 

6. 데살로니가 교회가 칭찬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믿음의 태도 때문이었다. 나는 어떠한 믿음의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나는 어떠한 믿음으로 말씀을 듣고 전하는가? 나는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있기에 내 안에 그 말씀이 역사하고 있는가?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또 우리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도록 충분히 준비하여 잘 전달하고 있는가? 

7. 그러한 성도들은 자녀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랑의 면류관이 된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수쿰빛 언약교회 성도들이, 나의 믿음의 자녀들이 이러한 태도를 가지게 되어 나의 영광이고 기쁨이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이고 기쁨이 되길를 원한다. 

8.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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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8. 22.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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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 2:1-12 하나님만 의식하고,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려는 삶

1.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복음을 전하였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사람에게 칭찬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 함이었다.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4절 하반부).

2. 바울은 정말로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간 사람이었다. 그의 삶에서의 내려졌던 결정이나 방향에서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한 적은 없었다. 오직 하나님을 의식했고, 그 분이 기뻐하시면 충분했다. 그렇기에 사람들의 말에도 휘둘리지 않았고 사람들의 평가에도 휘둘리지 않았다.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6절)

3. 하나님이 기쁘시면 충분했기에 그는 자신이 충분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사도로서의 권위도 주장하지 않았다 (7절).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해 주기를 기뻐하였다 (8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를 사랑하는 자 됨이라"

4. 하나님만 의식하고, 하나님의 인정만이 중요한 바울의 삶은 요동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평가는 우리가 오늘 뭔가 좀 더 잘했다고 해서 혹은 내일 좀 못한다고 해서 휙휙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평가는 그렇지 않다. 오늘은 환호하다가도 잠시 잠깐 후에 비판하고 비난하는게 사람이다. 흔들리는 갈대와 같다. 

5. 그러니 내가 삶을 살아가면서 또 사역을 하면서 누구를 의식하고 누구를 기쁘게 하려고 하는지는 나의 삶을 요동하게도 할 수 있고, 혹은 깊은 바다 처럼 고요하게도 할 수 있다. 나는 오늘 누구를 의식하며 또 누구를 기쁘게 하려고 살아가고 있는가? 

6. 안식년을 보내며 수쿰빛 언약교회와 나의 사역들을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나는 누구를 기쁘게 하려고 교회를 함께 개척하고 섬겼던 것인가? 나의 선교는 누구를 의식하면서 하고 있었던가? 혹시 태국의 영혼들을 너무 의식하였거나 혹은 한국에 있는 후원하는 교회들이나 후원자들을 의식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를 생각해보게 된다. 

7. 또 드는 한 가지 생각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오늘 나는 누구를 의식하고, 누구를 기쁘게 하려고 하고 있는가? 가족들과 함께 지내면서도 나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나의 시간과 마음을 드리고 있는가? 아니면 내 마음 가는대로, 내 감정이 느끼는대로 분노하거나 분을 쏟아내고는 있지 않은가? 바울이 하나님만 의식하며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려고 데살로니가 교회를 섬길 때의 목표는 딱 하나였다.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12절)

8. 그들이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하기 위해 바울은 정말 자신이 먼저 합당하게 살았다.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10절) 그들을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의식하고,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자에게는 굳이 하나님을 위해 합당하게 살아야 할 의무가 없다. 보이는데서만 잘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자는 보이지 않는 삶의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증인이고 또 우리 하나님께서 증인이시기 때문이다. 

9. 나는 누구를 의식하며 누구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는가? 만약 하나님만 의식하고,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살아간다면 대충 살아서는 안될 것이다. 좀 더 치열하게 육신의 정욕과 싸워야 하고, 보이지 않는 어떤 자리에서든지 오직 하나님만 의식하며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오늘의 가정의 삶에서 그리고 돌아갈 태국에서의 삶에서 모두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식하고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려는 자로 살아가기 원한다. 그러기 위해 조금도 나태하거나 흐트러진 삶의 모습이 아니라 정돈되고, 성숙하며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10. 복음을 더 깊이 깨달은 자, 복음에 더 합당하게 살아가게 되리라,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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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8. 19.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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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25:18-30 받은 은혜에 합당한 삶

1. 예루살렘은 느부갓네살 왕의 침공으로 인해 초토화 되었다. 아니 남유다 자체가 이 침공으로 인해 멸망했다. 8-17절을 보면 여호아의 성전과 왕궁이 불탔고, 귀인들의 집도 불탔다. 그리고 18-21절을 보면 유다 백성들이 사로잡혀 간다. 정말 소망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라의 힘이 약했다기 보다는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고 우상들을 섬긴 자신들의 죄악의 결과이기에 누구를 원망할 수도, 누구에게 화살을 돌릴 수도 없었다. 그저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2. 느부갓네살 왕이 살려준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가 새로 세워져서 유다 땅을 관할하게 되었다. “유다 땅에 머물러 있는 백성은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남긴 지라 왕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가 관할하게 하였더라" (22절)

3. 그러나 그는 유다의 자손이었으나 오히려 유다 백성들에게 당황스러운 것을 요구한다. “그달리야가 그들과 그를 따르는 군사들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너희는 갈대아 인을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살며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가 평안하리라 하니라" (24절) 그는 이스라엘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오히려 자신들을 망하게 한 사람들과 왕을 섬겨야 함을 말한다. 

4.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는 절망적이다. 자신들의 왕인 여호야긴은 잡혀 갔고, 성전과 궁궐은 불탔고, 똑똑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다 포로로 잡혀갔고, 남아 있는 지도자는 오히려 그들을 섬기라고 말하고 있는 시기였다. 이 시기가 얼마나 갈지도 모르고,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도 몰랐다. 소망이 보이지 않는 시간이었다. 

5. 그 소망이 보이지 않는 시간, 절망적인 시간이 하나님께서 다시 주권적인 은혜로 찾아오신다. 너희들이 신실하거나 혹은 행위가 선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여서가 아니라 내가(하나님 자신이) 아브라함에게, 다윗에게 한 약속에 신실하시기에, 내가 가장 선하신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절망속에서 불러내신다. 

6. “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왕 에윌므로닥이 즉위한 원년 십이월 그 달 이십칠일에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그에게 좋게 말하고 그의 지위를 바벨론에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지위보다 높이고 그 죄수의 의복을 벗게 하고 그의 일평생에 왕의 앞에서 양식을 먹게 하였고" (27-29절) 여호야긴이 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가 갑자기 옥에서 나올만한 무엇인가를 했는가? 그의 지위가 회복될 만한 무슨 일이 있었는가? 아무것도 없었다. 

7. 그저 하나님의 은혜였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신실하심이 여호야긴 왕을 구원하셨고, 아담에게 한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이 여전히 유효함을 확인시켜 주신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로 나를 불러 주셨고, 구원해 주셨고, 사랑해 주신 것이다. 나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이 복음이 항상 나를 붙드신다. 내 삶을 보면 절망적이다. 나의 자녀들에게도 선으로만 행하지 못하는 악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나를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자녀로 불러 주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양들을 먹이는 일에 불러 주셨다. 

8. 복음을 먼저 들은 자로서 살아가기 원한다. 나는 사랑받았고, 나는 구원받았으니 거기서 땡 하는 사람이 아니라 받은 복음에 합당하게 오늘을 살아가기 원한다. 주일 예배 중에 들었던 찬양의 가사의 한 부분이다. “I was made to live for You” 나는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창조되었다. 자격없는 나를 불러주신 주님, 자격없는 나를 사랑하여주신 주님 앞에서 오늘을 살아가기 원한다. 여호야긴이 석방되었을 때 그가 느꼈던 그 은혜가 내 삶에도 가득하다. 은혜를 받아놓고도 모르는 자와 같이 살지 말고, 은혜를 받은 자로써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 원한다.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앞장서고, 불필요한 말과 행동을 줄이는 오늘이 되자. 

9. 오늘도 샬롬 

*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은 요즈음 제가 얼마나 은혜를 모르는 자인지를 깨닫습니다. 아빠로써 남편으로써 섬기고 사랑하기 보다는 자꾸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쉬이 기분이 상하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오늘 묵상 말씀처럼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사는 제가 될 수 있도록, 또 저희 가정이 함께 지내는 시간을 통해서 더 깎여지고 단단해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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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4. 8. 17.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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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24:8-20 성경을 읽는 자만 변화된다

1. 여호야긴이 18세에 왕이 되었다. 그는 어느정도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18살에 왕이 되었다. 8세에 왕이된 요시야 왕과는 달랐다. 그러나 그는 요시야 왕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아버지의 악함을 따라 가는 삶을 선택했다. “여호야긴이 그의 아버지의 모든 행위를 따라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2. 요시야 왕이 했던 개혁의 흔적도, 요시야 왕 시대에 발견했던 하나님의 말씀 책이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요시야 왕의 길로 행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했던 악함을 쫓아 갔다. 왜일까? 

3. 그것은 아마도 인간의 본성이 죄 그 자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렸을 때 성선설, 성악설을 배웠을 때에는 성선설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나란 존재로 46년을 살아보니 인간은 결코 태어날 때 부터 선한 존재가 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뼈 속 깊이 깨닫게 된다. 교육이나 문화를 통해 아닌척 포장할 순 있지만 이기적인 욕망으로 가득차고, 세상에서 내가 가장 소중한 것이 바로 인간인 것이다.

4. 성경 전체는 이러한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의 모습에 대해 증언한다. 비단 특별한 성경구절을 찾지 않더라도 성경 어디를 봐도 인간의 죄가 너무나도 가득 차 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그렇기에 요시야 왕도, 여호야긴 왕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도 역시 동일하게 탐욕과 욕망이 가득 찬 존재들이었을 것이다.

5. 그러나 이 두 사람을 다른 길로 가게 만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었다. 요시야 왕은 발견한 하나님의 언약책을 읽었고, 묵상했고, 그대로 순종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의 언약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야긴 왕은 그 말씀을 읽지도 묵상하지도 순종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외부적인 도움 없이는 우리는 악한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6. “말씀을 읽었느냐” “그 말씀을 묵상했느냐" 그리고 “그 말씀으로 살아내려고 했느냐"가 요시야 왕과 여호야긴 왕의 삶을 갈랐다. 그리고 두 왕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도 극과 극으로 나누어졌다. 요시야 왕에 대한 평가는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긴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왕하 23:24) 그러나 여호야긴 왕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9절) 라고 평가 되고 있다. 

7. 하나님의 말씀 없이 우리는 결코 조금도 선한 방향으로 걸어갈 수 없는 자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도 나는 괜찮은 존재이고, 그래도 나는 어느정도 다른 사람보다는 나아 보인다는 그런 착각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태생부터 악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는 악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들이고, 우리에게는 그것을 막아 줄 브레이크가 필연적으로 필요하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8. 외부에서 들어오는 은혜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우리는 성경이 풍족한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다. 핸드폰에도, 태블릿에도, 컴퓨터에도 또 책으로도 성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호야긴 왕처럼 가지고만 있으면 무슨 소용인가? 성경을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영향력도 변화도 우리는 경험할 수 없다. 성경을 소유하고만 있다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할 수 밖에 없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살아내야 한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하나님의 자극, 내가 죄인이고, 구원은 하나님께 있음을 매일 읽으면서 다시 깨달아야 한다. 구원은, 은혜는 나로부터 나지 않는다. 거룩한 삶도 나로부터 나지 않는다. 오직 나의 삶의 푯대가 되고,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터이다. 읽어야 한다. 읽어야 산다. 읽어야 변화된다.

9. 선교사인 나는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있는가? 다른 책들을 보느라, 혹은 다른 것들에 집중하느라 정작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데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은가? 어제부터 태국어 성경을 쓰기로 하고 쓰고 있다. 매일 빠뜨리지 말고 읽고 쓰고, 묵상하며 주님의 길로 걸어가기를 힘쓰자. 주님 나를 붙드소서.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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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8. 15.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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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23:21-30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다. 

1. 요시아 왕의 개혁은 이제 유월절을 지키는 것으로 향한다. 유월절은 잘 아는 것 처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래서 유월절의 의미는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라는 것이다. 

2. 내가 나의 구원에 있어서 얼마나 무력한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유월절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유월절을 지키지 않았다. 언제부터 지키지 않았는지가 22절에 나타난다.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와 유다 여러 왕의 시대에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3.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그 때 부터 유월절을 지키지 않았다. 유월절을 잃어버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 소견에 옳다고 여기는 신들을 쫓아다니고,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행위들을 하게 되었다. 

4. 본문에 따르면 다윗 왕의 시대에도 이 유월절을 지키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다윗이??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다른 본문과 충돌하는 부분도 있지만..).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요시아 왕은 그 누구보다도 더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지키려고 애쓴 사람임을 알 수 있다. 

5.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21절 말씀은 조금 묵상할 필요가 있다. “왕이 뭇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왜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우리를 위함이 아니고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함일까? 말씀을 지키는 것은 오히려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닌가? 

6. 묵상하다 보니 유월절을 지키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높아지시는 사건이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유월절의 사건은 복음과 동일하다. 우리 힘으로 우리 스스로를 어쩔 수 없는 죄인들에게 영광스러우신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행하여 주신 사건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조금도 없다. 

7. 그렇기에 유월절을 지키게 되면 하나님이 높아지시고,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게 되시고, 이 땅에 오직 주님 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기에 요시아 왕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해 유월절을 지키게 하매” 라고 말한 것이다. 

8.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든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이유는 내가 복을 받고, 내가 잘 되고, 내가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란 영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이유는 그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고, 내게 주신 말씀이 너무나도 영광스럽고 아름다우신 온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나의 순종이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순종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아지게 하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나의 삶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 다른 믿지 않는 자들에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9.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은 결국 하나님을 높이는 삶이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은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은 결국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삶이다. 그렇기에 오늘도 듣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기 원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정말 간단한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그 단순한 말씀에 내 삶을 걸기 원한다. 사랑하기 힘들고 어렵지만 그래도 내가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기에 순종하기 원한다. 요시아 왕과 같이 말씀의 순종에 삶을 거는 오늘이 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https://youtu.be/8szyv1G9h9w?si=pRVy7o33EkKrfHv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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