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5. 3. 14. 10:48
반응형

# 요 21:1-14 예수님과의 식탁교제

1. 예수님께서 또 다시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1-2절)

2. 이미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 누구도 예수님이신 줄을 알아보지 못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인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4절)

3. 늘 이 부분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왜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그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동거동락했던 사이가 아니었는가? 예수님의 모습이 달라지기라도 했는가? 성경은 그에 대한 힌트를 주지 않는다. 다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못 알아본 것은 단지 이 본문만이 아니라 다른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4. 제자들이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못했던 예수님께서는 물고기를 밤새 잡지 못하던 전문가 어부들인 제자들에게 조언을 하신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6절 상반부) 그랬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잡혔다 (6절 하반부).

5. 그런데 물고기를 많이 잡고 나니 그제서야 제자들은 그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7절 상반부). 부활하신 주님을 이미 만났지만 알아보지 못하고, 평생 물고기를 잡았지만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이해되지 않는 일 투성이의 하루의 끝에 그제서야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 이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었다.

6. 예수님께서 우리의 상황 가운데 늘 동행하고, 함께 하시지만 우리는 잘 알아보지 못한다. 때로는 돕는 손길로, 때로는 보호하는 손길로 늘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우리는 알아보지 못한다. 오히려 그 주님을 외면하고, 멀리하고, 그러면서도 뭔가 내 뜻대로 잘 안풀리면 주님을 원망하기 시작한다. 내가 신경도 쓰지 않았고 알아보지도 못했던 그 주님을 말이다.

7. 물고기 잡는 일에 전문가였던 제자들처럼 우리 또한 내가 전문가인 것 처럼, 내가 이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처럼 하기 시작한다. 밤새 애쓴다. 아무런 성과가 없다. 그러면 또 주님을 원망한다. 그러다가 주님의 은혜로 그 일이 해결되고 나면 그제서야 항상 내 옆에 계시며, 나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알아보기 시작한다. 이것이 제자들이었고, 나의 모습이다.

8.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을(또 그런 나를) 꾸짖지 않으셨다. 오히려 함께 식사를 하자고 초청 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12절 상반부)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3절)" 예수님은 우리를 예수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식탁으로 초청하셔서 함께 식사를 나누신다. 꾸짖지도 나무라지도 않으신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충만한 이 자리가 바로 이 아버지의 품이요 아버지의 집이다.

9. 방콕에 다시 돌아가서 살 집을 계속 구하고 있는 중이다. 적당한 집을 찾으면서 고민이 많다. 가장 힘든 문제는 재정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 가정의 집이 계속 아버지 품, 아버지 집의 역할을 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우리 가정은 계속 집을 오픈하며 성도들을 식탁으로 초청하여 먹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다. 집이 단순한 우리 가정이 거주만 하는 공간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가족됨을 누리고, 태국의 믿음의 형제, 자매들에게 사랑을 나누고, 또 믿음이 없고 연약한 자들을 세워가는 장소로 사용해왔다. 그래서 좀 넓은 집을 구하고 싶었는데, 언제나 렌트비가 문제이다. 그 렌트비 앞에서 자꾸만 타협하려고 하게 된다.

10. 예수님께서 알아보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제자들을 불러서 먹이시고, 그 식탁을 통해 위로하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 가정이 거주할 공간이 이런 아버지의 품, 아버지의 집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재정이 문제가 아니다. 아버지의 집을 세워가려는 마음이 문제이다. 그 마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소망하는 집을 하나님께서 하락하시길, 또 필요한 재정을 채워주시길 함께 기도해주시길 부탁드린다.

11. 오늘도 샬롬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5. 3. 13. 15:33
반응형

# 요 20:24-31 손가락을 그 성흔에 넣을 기회를 버릴 만큼 강렬한 만남

1.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함께 있지 않았다 (24절).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믿을 수 없었고, 그는 체험을 하면 믿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5절).

2. 도마의 이야기는 이해가 먼저되어야 믿음이 따라온다고 말하는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과 유사하다. 하나님과 성경을 이해하려고 하는 시도와 노력은 너무나도 멋진 것이다. 이해없이 그저 강요로 믿으라고만 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3. 그러나, 그런 도마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신다. 그 분은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과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닫힌 문 속에 나타나셔서 샬롬을 말씀하신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6절)

4. 그리고 도마에게 체험을 통해 이해할 수 있도록 초청하신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7절) 예수님의 초청은 매우 친절했다. 도마가 제자들에게 했던 말을 아시고, 그 말 그대로 해보라고 초청하신 것이다.

5. 도마에게는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지금 닫힌 문들 사이로 나타나신 그 분, 이미 열하루 전에 돌아가셨고, 여드레 전에 부활하신 그 분이 지금 내 앞에 서 계시고, 나의 믿음의 고민들을 아시고 그것을 확인해보고 나서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6. 그런데 도마는 그 손의 못 자국에, 옆구리의 창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보지 않았다. 혼돈과 카오스 중에 있는 그에게 샬롬을 주시는 분을 만났기 때문이다. 죽으셨지만 지금 부활하여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하고 나니 이성적인 고민과 이해되지 않는 모든 것들이 그 즉시로 해결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손가락을 넣어볼 기회를 거절한 것이다.

7. 이성과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은 매우 아름답다. 그 자체로도 매우 중요하다. 특별히 믿음을 강조하는 기존의 교회 분위기는 이성을 억압하였고, 무조건 '믿습니다' 만이 바른 믿음의 자세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의심은 믿음과 반대되는 감정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지성과 이성으로 탐구하고 알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일이다.

8.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방법은 기질과 성품에 따라 모든 사람이 다 다른 방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은 주로 묵상을 통해서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섬세하게 나에게 말씀하시는 그 분을 만난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예배이고, 어떤 사람은 기도이며,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드라마를 보는 것일 수도 있다. 수 많은 다른 방법들이 있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기독교에 대한 지적으로 탐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지적인 방법을 넘어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각 개인의 고유한 방법이 있어야만 우리는 손을 넣어볼 기회를 거절할 수도 있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믿는 자가 될 수 있다.

9. 도마는 아마도 그 이후 단 한 번도 '아, 그 때 손을 넣어볼걸' 이라며 후회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순교하기 까지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 분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잊을 수 없는 그 시간이 손을 넣어보는 경험보다도 더 강렬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바로 그 경험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10. 나는 오늘 그 경험을 하고 있는가? 단순히 이해되지 않고, 믿어지지 않는 차원이 아니라 손가락을 넣어볼 수도 있는 그 기회를 버릴 만큼의 강렬한 예수님과의 만남과 사귐이 있는가? 그런 만남이 있는 오늘 하루가 되기 원한다.

11. 오늘도 샬롬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5. 3. 12. 15:31
반응형

# 요 20:11-23 두려워 말라. 샬롬이다.

1.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마리아는 천사를 통해 듣게 되었다 (11-18절). 처음에는 마리아도 이것이 정말인지에 대한 의심이 있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마리아는 이제 확신이 생겼다. 그래서 그녀는 이제 "내가 주를 보았다"라고 담대하게 선포하게 된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18절).

2. 제자들은 자신들의 스승이 돌아가신 그 상황, 그리고 이제 앞으로 있을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인해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찾아오셨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19절).

3. 예수님께서는 별다른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 닫힌 문들 속에 기적적으로 나타나셔서 그저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을까? 스승님도 안계시고,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핍박하게 될 그 상황에 예수님께서는 '샬롬'을 이야기 하고 계신 것이다.

4. 지금의 어려움을 이길 힘이 없는 사람이 하는 말은 위로가 안된다. 1억 빚이 있는데, 무일푼의 사람이 와서 나에게 "아무 걱정마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라고 말한다고 해서 나에게 위로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채무를 갚아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수천억대의 부자가 찾아와서 "아무 걱정마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라고 말한다면 우리가 느끼는 위로와 안도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5. 마찬가지이다.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의 왕이시고, 바다도 잠잠케 하시는 분이시며, 이제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이기지 못했던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이다. 그런 놀라우신 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그 분이 주시는 평강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 (요 14:27)이다. 그러니 제자들이 받았을 위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6. 진정한 샬롬을 주실 수 있는 분이 찾아오셔서 두려워 떨고 있는 자들에게 샬롬을 이야기 하고 계신 상황인 것이다.

7.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샬롬이 없는 시대이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다. 정치적인 불안정, 고물가, 고환율, AI의 등장으로 인한 미래에 대한 염려, 불확신한 경제 등등의 모든 상황이 우리를 두려워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제자들처럼 문을 걸어잠그고 세상과는 분리되어 내 한 몸의 안전을 지키며 살아가고 싶어할 수도 있다.

8. 그런 우리에게 오늘 가장 크시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말씀하신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샬롬의 근원이신 분께서 그 샬롬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세상 보다 온 우주 보다 더 크신 분이, 나의 내일을 아시는 분이 오늘 우리를 찾아오셔서 샬롬을 말씀하신다. 여전히 내 생각을 의지하고, 내 지혜를 의지하며 '이런 상황에서 샬롬이 있을 수 있겠어?'라고 냉소적으로 반응할 것인가? 아니면 세상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샬롬에 나를 맡기고 샬롬을 누리며 살아갈 것인가?

9.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이유는 나의 능력이나 지혜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하시고 아름다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분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 주눅들지 말자. 두려워하지 말자. 세상보다 더 크신 분이 내 안에 계신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요일 4:4)

10. 그리스도의 샬롬을 누리는 오늘 하루가 되길, 오늘도 샬롬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5. 3. 11. 13:33
반응형

# 요 20:1-10 사랑이 오셨다

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나서 처음 맞이하는 안식일 이후 첫 날이다 (1절). 아직 어두움이 채 가시지 않았을 때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찾아왔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1절).

2. 마리아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들을 아직 다 이해하지 못하였다. 물론 마리아 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9절)

3. 그러나 마리아는 안식일 정결의식에 해당되지 않은 가장 빠른 시간으로 여겨지는 안식 후 첫날 아침 아주 일찍 예수님을 찾아왔다. 예수님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이성적인 이해를 뛰어넘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온 것은 그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 곁에 있고 싶었던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 그런데 마리아의 예수님을 향한 그 뜨거운 사랑이 종교적, 교리적, 이성적 경계를 뛰어 넘어 모든 인류에게 소망을 주시는 예수님의 부활의 첫 목격자가 되도록 만들었다. 그녀는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불리던 베드로와 요한 보다도 오히려 더 빨리 무덤으로 찾아왔다. 무덤의 돌문이 열린 것을 가장 처음 본 사람이 된 것이다.

5. 막달라 마리아가 누구인가? 그녀는 예수님께서 일곱 귀신으로 부터 해방을 시켜 준 여자였다 (눅 8:2). 그녀는 자신을 고쳐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따랐던 예수님의 제자였다. 그래서 그녀는 항상 예수님의 주변에서 멤돌았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도 대부분의 제자들은 도망쳤지만 그녀는 끝까지 남아서 예수님을 지켜보았다.

6. 그녀를 부활의 첫 증인이 되게 한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녀를 오늘 예수님의 무덤으로 가장 먼저 오게 만들었을까? 본문을 보면 그것은 사랑이었다. 예수님을 정말 구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메시아로 이해했는지, 믿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즉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교리적인 지식도 아니었고, 교회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 같은 믿음도 아니었다. 오직 사랑이었다.

7. 사랑이 없으면 교리도, 지식도, 이성도, 믿음도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사랑해야 순종하게 되고, 사랑해야 이해하게 되고, 사랑해야 믿을 수 있게 된다. 이전에 요한복음을 묵상하면서 적었던 제목 중에 '사랑해야 제자다', '사랑하지 않으면 사용하게 된다' 처럼, 사랑할 때 우리는 변화를 경험하게 되고, 예수님을 따라가게 되는 존재들이다.

8.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없는 것은… 그것이 믿음이든, 소망이든, 교리이든, 이성이든, 교회이든지 간에…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사랑으로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분은 길로, 진리로, 생명으로 오시지 아니하시고, 사랑으로 오셨다.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참 사랑으로 오셨다.

9. 사랑이 없으면 모든 지식도, 모든 예언도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고전 13:1-2) 아무것도 아니면서 무엇인가를 가진 자 처럼 살아가지 말고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자.

10. 예수를 사랑하면 예수와 함께 걸어가고, 예수와 함께 살아가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우리의 이웃들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교회를 이야기하고, 믿음과 소망을 이야기 하며, 복음을 말할 수도 있다 (어쩌면 이게 우리와 우리가 섬기고 있는 교회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내 삶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원하며 더 뜨겁게, 예수님만을 사랑하는 자로 또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기 원한다.

11. 오늘도 샬롬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반응형

# 요 19:14-22 사랑하지 않으면 사용하게 된다

1. 오늘 본문은 참으로 아이러니 한 장면을 보여 준다. 메시아를 계속해서 기다렸던 유대인들은 그 메시아를 자신들의 왕으로 부르기를 거절하였지만, 유대인들 다스리던 (메시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빌라도는 그를 유대인의 왕이라 부른다.

2.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14절) 그러나 유대인들은 거절한다.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15절 하반부)

3. 오랫동안 메시아를 기다려왔던 유대인들에게는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지 못하는 모습의 메시아는 필요가 없었다. 정치적으로 자신들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존재여야만 했다. 그래서 그들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4. 반면에 빌라도는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부른다 (21-22절). 그러나 그가 예수를 유대인으로 왕으로 부른 것은 예수를 진정 유대인의 왕으로 믿었다고는 볼 수 없다. 예수가 죄가 없는 사람임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고, 유대인들에게 잘못을 돌리며 조롱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수를 왕으로 불렀다.

5. 결국 예수를 왕으로 부르지 않았던 유대인도, 예수를 왕으로 불렀던 빌라도도 자신들이 가졌던 생각과 목적으로 인해 예수를 왕으로,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6. 예수를 내 삶의 왕으로, 주님으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결국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 예수님을 이용해서 이루려고 하는 목적을 내려 놓아야 한다. 이러한 혹은 저러한 이유로 예수님을 나의 필요에 따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그 자체가 내 삶의 이유와 목적이 되어야만 그 분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수 있다.

7. 나의 삶에 예수님의 자리는 어디인가? 유대인들과 빌라도와 같이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예수님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님이 왕이 되셔야 하는 이유가 혹시 나의 이익과 만족 때문은 아닌가? 나는 그 분을 사랑하려고 하는가? 아니면 사용하려고 하는가?

8. 예수님을 내 삶에 어떤 부분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기 위해서는 뜨겁게 사랑해야만 한다. 사랑할 때에만 변화된다. 사랑할 때에만 그 사랑에 의해 내가 바뀌게 된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나의 유익을 위해서 희생시키면서까지 사용할 순 없지 않은가?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사용하려고 드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말씀 앞에 선다. 예수님의 크신 사랑 앞에 서면 내가 어찌 그 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을 사용하는 자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로 오늘도 살아내기 원한다.

9. 태국에 비자를 연장하러 다녀오면서 수쿰빛 언약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할 수 있었다. 오랫만에 만나니 교회의 형제, 자매들을 만나니 너무 좋았다. 어서 돌아가서 함께 교회를 세워가고, 이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워가는 일을 계속해서 해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다음 사역의 모습이 너무 기대가 되었다. 그렇기에 그들 옆에서 예수님을 사용하려고 하는 자의 모습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로 서 있어야겠단 다짐을 다시 하게 된다. 예수님을 가장 뜨겁게 사랑하는 자로 태국인들을 섬기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사진은 금요일 케어그룹 사진입니다. 좁 형제가 계속해서 잘 섬겨주고 있습니다. 왓타텅 학생들이 많이 참석하고 있고, 인원이 늘어나서 감사했습니다. 
**기도해주신 덕분에 태국에 잘 다녀왔습니다. 1년을 체류할 비자도 잘 받았고, 수쿰빛 언약교회 형제, 자매들도 잘 만나고 교제하고 왔습니다. 수쿰빛 언약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말씀 안에서 계속 성장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특별히 피터 전도사님이 직장을 그만두고 풀타임으로 사역을 하기로 했는데, 교회가 사례비를 적절하게 드릴 수 있게 재정적으로 부족하지 않도록, 또 새로운 예배 장소를 위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늘 감사합니다. 샬롬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5. 2. 19. 14:34
반응형

# 요 13:31-38 사랑해야 제자다 (기도제목 아래에)

1. 예수님께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새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새 계명의 기록된 위치가 절묘하다. 요한은 아마도 의도적으로 고려하여 이 부분을 작성했음이 분명하다. 본문의 앞 부분은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 것을 서술하고 (21-30절), 본문의 뒷 부분은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서술하고 있다 (36-38절). 그리고 그 한 가운데에 사랑하라고 새 계명을 주신다.

2. 3년을 항상 함께 보내며 지냈던 한 제자는 자신을 팔 계획을 가지고 있음을 그에게 알리시고, 또 다른 한 제자는 자신을 부인할 것을 알리시는 그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4절)

3. 구약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명령을 받았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19:18). 그러나 오늘 주신 이 계명이 새 계명인 이유는 이 계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때문이다.

4. 구약의 계명은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명령이었지만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다. 이 계명 앞에서 마음이 아득해진다. 다른 이들을 사랑하되, 나를 사랑하는 것 처럼 사랑하기도 힘든데..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처럼 하라니…

5. 이웃을 사랑하는 척도는 더 이상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이 되어 버렸다. 쉽게 이야기 하면 '너희들도 이웃을 사랑하기를 죽기까지 하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적당히 하지 말고 제대로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안에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사랑도 없는데, 그들을 위해 어떻게 죽기까지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 이웃은 오늘 본문 아래 위에 나오는 것 처럼 나를 팔고, 또 나를 배신하는 자들이 아닌가? 사랑하기 쉽지 않은 자들이 아닌가?

6. 그러나 요한복음 13장의 시작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는 것에서 시작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셨고, 모범만 보여주신게 아니라 그 사랑을 우리에게 쏟아 주셨다.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우리에게 그 사랑이 어떻게 실제가 되는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7. 사랑은 내 안에서 조금도 나오지 않는다. 내 안에는 악함이 가득할 뿐이다. 바울은 말한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 7:18) 내 안에 선한 것이 없다. 사랑이 없다. 다른 이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밖으로부터 사랑이 내 안으로 먼저 들어와 채워져야 하고, 그 사랑이 흘러 넘쳐야만 하는 것이다.

8. 제자들이 3년간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그 사랑을 받은 것 처럼, 세족식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것 처럼 오늘도 예수님 안에 거하며 그 사랑을 먼저 받아야 한다. 내 안에 선한 것이 없음을 먼저 확실히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을 의지하게 된다. 내 안에 절망 밖에 없음을 깨달을때에야 비로서 구원자가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사랑의 원천되시는 예수님을 붙들어야 한다. 그 사랑이 내 안에 흘러 넘쳐 들어와야 나도 흘려 보낼 수 있는 것이다.

9. 사랑해야 제자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35절). 즉 예수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은 자, 그래서 그 사랑을 흘려 보내는 자가 제자라는 것이다. 예수 안에 거하지 않는 자는 우리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에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고 싶은가? 먼저 그 분 안에 거하며 그 분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누리라. 그래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10. 오늘도 샬롬

*21일 금요일에 저 혼자 태국에 선교사 비자를 연장하러 다녀옵니다. 특별히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1. 선교사 비자가 특별한 문제 생기지 않고 잘 연장될 수 있도록 
2. 태국에서 처리해야 할 일들을 잘 마치고 돌아올 수 있도록
3. 수쿰빛언약교회 성도들과 좋은 교제를 나누고 3월 2일 주일 예배에 말씀 전할 때 주님께서 말씀하시도록
4. 남아 있는 김신애 선교사와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지낼 수 있도록
5.  트럼프 대통령 이후 출입국 문제가 어려워졌는데 캘리포니아로 돌아오는 길에 특별한 문제가 없을 수 있도록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5. 2. 14. 10:42
반응형

# 요12:20-36 예수님의 사랑의 확증의 방식

1.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용서에 대해서 동일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용서를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반드시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이러한 것을 더 깊이 생각해보게 된다. 때로는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 부모로서 그저 아이들을 용서해줄 때가 있다. 그러나 그냥 용서하고, 용서 받는 것 같은 그 상황에서도 누군가는 대가를 치룬다. 그게 아마 보통은 죄를 용서해주는 부모 쪽에서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

2. 물론 부모, 자식 간에 일어나는 상황인 만큼 그 상황을 대가를 지불한다는 식으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모양으로 표현되더라도 부모가 참아주고, 인내하고, 사랑하는 대가를 치루지 않고서는 아이들은 용서 받을 수 없다. 부모이기에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대가라고 생각하지 않을 따름이다.

3.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때에도 그 대가가 분명히 있었다. '희생제물'이라고 해서 우리가 흘려야 할 피를 대신 흘리는 짐승들이 대가로 치뤄졌다. 하나님께서 동물의 피 냄새를 좋아하셔서 제물을 드린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반드시 피가 흘러야 했고, 누군가는 죽어야 했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제물에 전가시키신 것이다.

4.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생명이 땅에 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4절) 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2절).

5. 자신의 생명으로 그 모든 죄의 대가에 대해 지불하시고,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겠다고 선언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들려서 대신 피를 흘리고, 대신 죽어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게 하시겠다고, 우리는 그 모든 혜택을 받아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6. 이것이 복음이다. 내가 나의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에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는 그 모든 혜택을 입는 그것이 바로 복음이다. 바울은 이를 롬 5:8 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7. 그리스도께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는 방식은 들려지는 것이고, 죽는 것이고, 낮아지는 것이고, 피흘리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래서 나음을 입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입으로만 사랑을 이야기 하는 것은 복음적인 삶의 모습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나의 사랑의 대가를 치루기 보다는 때로는 아이들의 연약함을 탓하고, 화를 내고, 짜증을 부렸다. 내가 대가를 지불했는데, 쟤는 왜 저러는지에 대해 본전 생각이 나고, 속이 상한다.

8.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나에 대한 사랑의 확증 방식은 본전을 이야기 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또 배신하고, 또 주님을 버리고, 또 주님과 상관없이 살 것을 아시면서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들리셨고, 피흘리셨고, 모욕당하셨고, 죽으셨다. 그 주님의 사랑의 방식을 오늘 다시 한번 묵상하며 내가 어떻게 복음으로 살아야 할지를 다짐하게 된다. 이렇게 사는 방식을 택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든다. 그러나 복음의 방식으로 살아야만 나도 아이들도 살 수 있음을 기억하고,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는 방식이 아닌 낮아지고, 피흘리고, 죽는 방식으로 오늘을 살아가기 원한다.

9. 이름만이 아니라 삶으로 NIBC(not i but Christ)가 실천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5. 2. 11. 10:36
반응형

# 요 11:45-57 HIS STORY

1.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한다.예수님께서 많은 기적과 표적을 보이셨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기적과 표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메시아를 열망한다고 말하였지만 사실 그들이 진실로 열망했던 것은 자신들의 독립이요, 지금 누리고 있는 권력이다.

2. 48절이 이를 설명한다.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기적과 표적을 행하는 사람이 왔지만 실질적으로 그들이 고민하고 있는 것은 하늘의 문제가 아니라 땅의 문제, 즉 자신들이 계속 권력을 누리고, 로마인들로부터 간섭받지 않아 독립하는 그것이었다.

3. 예수께서 오신 이유는 모든 사람들에게 죄에서 해방되는 구원을 선포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써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데, 그나마 예수를 듣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얻고자 하여 그 기적에만 집중하고, 예수를 듣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에만 집중하고 있다.

4.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신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많음에도 허락하신 12제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계신다. 여기까지 보면 사람들의 이기심이, 사람들의 욕망이 역사를 움직이는 것 같다. 하나님의 아들 조차도 사람들의 욕망에 휘둘리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어둡고,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시간에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다.

5.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고백한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50절). 그는 아마도 예수 한 사람을죽여서 자신들은 계속 권력을 누리고, 유대인들 또한 망하지 않게 되는 시나리오를 그렸을 것이다. 사람들의 이기심과 욕망으로 대표되는 그림이었을 것이다.

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러한 이기적이고, 욕망적인 계획을 온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을 준비하는 것으로 사용하신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라" (51-52절)

7. 우리의 이기심에도, 우리의 욕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일하신다. 지금의 한국사회나 미국, 심지어 태국 사회를 돌아보면 정말로 답답하고, 암담하기 그지 없는 상황들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도대체 왜 저렇게 하는지, 도대체 얼마나 욕망에 눈이 멀면 저렇게 하는지 화가 날 정도이다.

8.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과 같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기심과 욕망을 넘어 일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일하고 계신다. 여전히 그 분의 계획은 확실하고, 그 분은 신실하시며, 그 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열심을 멈추지 않으신다. 불의하고 무도한 세상에서 여전히 내가 정의를 실천하려고 하고, 정직하게 살려고 애쓰는 것은 보이지 않아도 더딘 것 같아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것 같아 답답하고, 화가 날지라도 우리는 선하게 살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하고, 영혼구원에 대한 열심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도 말씀하신다. 요 5: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9. 아버지께서도, 예수께서도 일하시니 나도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나의 최선이 조금도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을 것 같아 무력하게 느껴지더라도, 나 또한 그들과 별반 다를 것 없게 느껴져서 절망스러울지라도 오늘 하루를 정성껏 살아간다. 왜냐하면 역사를 움직이시는 분이 여전히 하나님 이시고, 그 하나님께서 여전히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10. 오늘도 샬롬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반응형

# 요 10:32-42 내 삶의 궤적이 내 말과 행동과 설교를 증명하게 된다

1.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32절)

2. 유대인들은 선한 일 때문이 아니라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했기 때문에 돌로 치려고 하는 것이라 대답한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33절) 만약 유대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예수께서는 돌을 맞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사람으로서 하나님이라 스스로를 칭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예수께서는 그런 유대인들에게 오히려 성경을 가지고 말씀하신다. 성경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시 82:6을 인용하신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성경이 이렇게 증언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어찌 나를 신성모독이라고 하느냐?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34-36절).

4. 그리고 하신 말씀은 나의 삶의 궤적과 열매를 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38절)

5. 성경을 읽다가 보면 해석에 대한 다툼들이 있다. 이것이 정말 무슨 의미인지 고민하고, 또 같은 구절을 놓고 서로 다르게 해석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마다 드는 생각은 정말로 성경이 말하고 싶은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6. 이럴 때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분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그럴싸 해보이는 말을 할지라도 아무리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말을 할지라도 그 사람의 삶의 궤적이 그 말과 맞지 않고, 그 사람의 삶에 그 열매가 없다면 그 사람의 말에 대한 신뢰를 가지기 쉽지 않다. 아직 어린 20대라면 모르겠지만 30대가 되고, 40대가 되면 내 삶에 내가 걸어온 흔적들이 있고, 그렇게 살아온 내 삶의 궤적이 나의 말에 신뢰를 더하게 되는 것이다.

7.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합당하게 말씀하셨고, 하나님의 아들로 합당하게 행동하셨으며 본인이 회당에서 뽑아서 읽으신 이사야 61:1-3절까지의 내용처럼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셨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셨다. 예수님의 모든 삶의 흔적이 예수께서 자칭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메시아 임을 강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8.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나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나의 삶의 궤적은 어떠한가? 내가 말한대로, 내가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하는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40대 중반을 넘어가는 나의 삶의 궤적이 나의 지금의 말과 행동을 증명하고 있는가? 예수를 복음을 말하며 살아가는 선교사로 내 삶은 예수님의 말씀과 복음에 합당한가? 나는 오늘을 정말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내고 있는가? 부끄럽고, 죄송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가 말한대로, 성경을 해석한대로, 설교하는대로 살아가기를 결정한다.

9. 내 힘으로는 부족하다. 그렇게 살아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신뢰하고, 사랑하고, 그 분 안에 거할 때에만 가능하다. 예수께 내 짐을 내려놓고, 예수께 내 삶을 의탁하다보면 어느순간 내 삶의 궤적이 내 말과 행동과 설교를 증명해줄 것이다. 오늘도 예수 안에서 말하고, 행동하자.

10. 오늘도 샬롬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반응형

# 요 10:11-21 선한 목자가 되려면

1.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 하신다. 선한 목자가 되는 조건은 자신의 양을 잘 알아야 하고, 또한 자신의 양들도 목자를 자신의 목자로 잘 아는 '관계적 앎'이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4절)

2. 이러한 '관계적 앎'이 중요한 이유는 모든 관계의 출발점이신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삼위 안에서 이러한 관계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 그리스도와 성령을 가장 잘 아시고, 가장 깊은 사랑의 관계 속에서 서로를 알고 서로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3. 따라서 우리가 따라야 할 모든 관계의 아름다운 모습은 삼위일체의 관계가 그 모범이 될 수 밖에 없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그리스도를 가장 잘 아시는 것 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잘 아시고 우리는 또한 아들 그리스도를 잘 알아갈 때에, 우리는 비로소 그 분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할 수 있고, 그 분은 우리의 선한 목자가, 우리는 그 분의 양이 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14절 상반부)

4.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이나 선한 목자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이야기 하신다. 선한 목자는 자신의 양을 알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한다. 예수님은 짧은 본문에서 3번이나 강조해서 말씀하신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거니와" (11절),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5절) "내가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7절)

5. 예수께서 목숨을 버리시는 이유는 내 양들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관계적 앎 속에서 양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양들이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있다. 양들은 죄악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그들에게는 그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드려서라도 이 양들을 살리길 원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선한 목자이시기 때문이다.

6. 선한 목자는 양들의 필요를 알고, 그 필요에 따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다. 나의 필요를 따라 양들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양들의 필요를 따라 양들을 섬기는 사람이다.

7. 지금 이 시대에는 나의 필요를 따라 양들을 이용하는 삯꾼들이 많은 것 같다. 타이틀은 목사이고, 선교사이지만 그들은 양들의 필요와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양들을 이용해서 자신의 잇속을 차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며, 심지어 자신을 위해 양들을 희생시킨다.

8. 늘 아내와 말하는 것은 어느 누군가를 선한 목자인지 삯꾼인지 판단하려고 하지 말고 우리가 선한 목자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다. 좌고우면하지 말고 오로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양들을 위해 살아가는 자가 되자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것과 같이 선한 마음을 가진 목자인가? 양들을 위해 내 삶을 내려놓으려고 하는가?

9. 조금만 방심하면,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삯꾼 목자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양들을 위해 살아가는 선교사가 되고 싶다. 그러나 혼자서는 쉽지 않다. 함께 이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좋은 친구들이 필요하다. 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가 반지를 파괴하는 여행을 혼자 해낼 수는 없었다. 함께 끝까지 걸어갔던 샘이란 친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선한 목자로의 애씀이 있는 분들과 함께 이 길을 격려하며 걸어가고 싶다.

10. 이 길을 함께 격려하며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샬롬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