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0. 29.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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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5:13-26 사랑으로의 초대

1. 우리를 부르신 것은 자유를 위함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13절 상반부) 이 본문이 말하고 있는 자유는 무엇일까? 이 자유는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살아가는 방종을 의미하는 단어는 분명히 아닐 것이다. 문맥을 살펴보았을 때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아마도 더이상 율법의 종 노릇 하지 않을 자유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율법에 순종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와 불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안에 있을 때에 자유를 얻게 된다. 마치 물고기가 물 속에서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과 같이 이 자유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만 우리에게 허락되는 자유이다. 이 자유를 어떻게 누려야 하는가?

3. 사도 바울은 13절 하반부에서 분명히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서로 사랑함으로 누릴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율법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4. 그래서 성령의 열매를 이야기 할 때에도 첫 번째 열매는 사랑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선과 온유와 절제니…” (22, 23절 초반부) 사랑의 열매가 없다면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전혀 맺지 못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희락도 화평도 뒤따라 올 수 없게 된다. 

5.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참된 자유는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사랑하고, 또한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자유이다. 그렇다면 사랑이 왜 성령의 첫 번째 열매인가? 육체를 따라 살아가게 되면 우리는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고 죄악된 나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나를 먼저 생각하는 상태에서는 결코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지도, 사랑하지도 못하게 된다. 

6. 결국 타인에게 무관심함, 즉 사랑없음에 도달하게 된다. 나의 욕심과 탐심과 이기심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겨낼 때 우리는 비로소 다른 이를 바라보고, 관심을 가지게 되며 사랑할 수 있게 된다.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결국 성령의 열매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7.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우리를 사랑으로 부르셨다. 이 사랑은 우리를 사랑 받는 자의 자리로, 사랑 하는 자의 자리로 부르셨다. 우리는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의 자리로 초대 받은 동시에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완전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자의 자리로 초대 받았다. 

8.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이 없다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고 내게 아무런 유익도 없다. 우리는 언제나 유의미한 존재가 되고 싶어하지 않는가? 인생에서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가 아닌가? 그렇다면 사랑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으로 부터) 사랑 받아야 하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들을) 사랑해야 한다. 

9.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기 위해 먼저 사랑받는 자로 서기 원한다. 내 안에 사랑 없음을 먼저 직시하고, 사랑 그 자체이신 분 안에 거해야 한다. 그래야 사랑하게 되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오늘 가장 먼저 내 아내, 내 아이들을 뜨겁게 사랑하기 원한다. 이들도 하나님으로부터 또 나로부터 사랑 받음을 통해 사랑하는 자로 세워지도록 기도해야겠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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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0. 24.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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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3:19-29 복음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1.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의 범법 때문이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19절 상반부).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죄인이 아니었다면 우리에게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 율법이었다. 율법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2. 그러나 율법은 믿음이 오기 전까지만 한시적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왜냐하면 율법은 우리를 능히 살게 할 수도 없고, 의가 오게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1절)

3. 우리는 삶에서 자주 좋은 것을 갈망한다. 때로는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을 때도 있지만, 보통은 더 좋은 것이 오면, 덜 좋은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된다. 믿음과 율법의 관계가 그렇다. 율법도 좋은 것이다. 율법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이 죄인지 무엇이 의인지를 깨닫게 된다. 또한 우리가 얼마나 의에서 먼 존재인지를 보게 된다. 그러나 율법은 거기까지이다.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만들지 못한다.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4. 그러나 그 모든 죄에서 자유로우신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을 완성하셨기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의를 얻게 된다. 내가 율법을 지켜서도 아니고, 내가 뭔가를 잘해서도 아니다. 그저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의의 우산이 되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구원을 얻게 된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복음이다. 

5. 26절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율법을 지킬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려고 애쓴다고 해도 우리가 얼마나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가? 잠시 잠깐은 율법을 지킬 수 있을지 모르나 우리의 성정은, 우리의 악한 본성은 율법을 범하고, 내 마음대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우리의 인생의 경험을 통해서 너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6. 하나님은 이런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오셨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먼 우리는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그러나 우리는 이 놀라운 은혜를 너무나도 자주 밀어낸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7. 사랑 받으려면 사랑 받을 만한 뭔가를 해야 한다. 용서 받으려면 용서 받을 짓을 해야 한다. 대가 없는 사랑과 선행이 어디에 있으며, 아무런 희생 없는 용서가 어디에 있는가? 이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치뤄야 할 대가와 희생을 예수께서 담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런 값을 치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미 지불되었다. 이미 치루어졌다.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으면 우리는 사랑받고, 용서 받고, 용납 받는 것이다. 

8. 율법은 대가를 치룬 사람이, 희생을 한 사람이 복을 받는 시스템이다. 복음은 대가를 치루지도, 희생을 하지도 않은 사람이 복을 받은 시스템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대가와 희생을 한 분이 모두 받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받는 은혜에는 어마어마한 대가가 치뤄졌다. 그럴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는 하나님 자신이 죽으신 것이다. 우리를 자녀 삼으시기 위해,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제 그 분과 한 몸을 이루어 살아가야 한다. 주님은 내 안에, 나는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과 피를 아낌없이 흘려주신 이유는 우리를 그 사랑의 관계 안으로 초청하시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를 그 관계로 나를 통해 초청하시기 위해서이다.

9.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그 분의 삶과 말씀을 기억하고 제대로 알 때에 우리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이제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분과 연합하고, 그 분과 사랑하기 위해 사랑의 법을 지키려고 하게 된다. 그렇기에 복음은 우리의 모든 존재와 생각과 삶을 바꾸게 된다.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가? 예수를 깊이 생각하자.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3:1)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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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0. 18.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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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1:1-10 바른 복음을 힘써 알자

1.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위해서 쓴 편지이다. 이 편지의 특징은 매우 급하다는 것이다. 1-5절의 짧은 인사를 한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그것도 책망의 내용으로 바로 들어간다. 왜냐하면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모든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2. 바울이 급하고 매섭게 책망한 내용은 바로 ‘다른 복음’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6절). 자신의 전부이며 모든 것 위에 모든 것 되신 그리스도를 떠나 다른 복음으로 가고 있는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해서 바울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3. 여기서 ‘다른 복음'이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건이 불충분하기 때문에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건 +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반쪽짜리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이 ‘다른 복음'이었다. 그러니 바울의 매우 급한 책망과 이를 이상히 여기는 마음이 충분이 이해가 된다. 

4. 바울은 분명히 선포하고 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 그리스도의 복음은 완전하고 충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다른 율법의 조문은 조금도 필요하지 않다. 율법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끄는 몽학선생일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인해 복음과 율법은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5. 즉, 이전에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율법이 더 이상 우리의 구원에 어떠한 힘도 행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율법을 폐하지 않으시고 완전하게 하셨다. 우리에게 ‘사랑의 법’ 만을 주셨다. 우리는 여전히 사랑의 법을 지켜야만 한다. 그러나 구원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6. 착하게 살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의 증거로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의 리더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축소하고 율법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하였기에 바울은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잘못된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들고, 우리의 구원을 불안하게 만들며, 그리스도의 놀라운 대속을 반쪽 짜리롤 만들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복음을 잘 알아야 한다. 바로 알아야 한다. 

7. 지금 우리 주변에도 얼마나 많은 이단들이 있는가? 왜 이단들에 속아 넘어가는가? 바로 복음을 정확하게 알지 못해서이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읽고 묵상하며 연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 자체는 분명히 쉽다. 그러나 그 복음으로 어떻게 성경을 읽고 적용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공부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성경이 쓰여진 시기와 문화, 컨텍스트가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8. 복음의 순수성과 정확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미움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할 수도 있다. 바울은 10절에서 말한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복음을 위해서 미움받을 각오를 하자. 아닌 것은 아닌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좋은 말을 하기 보다는 복음을 위해 옳은 말을 하자. 복음을 위해서 부지런히 연구하고, 공부하자. 그래야 내 안에서 바른 복음이 나온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자. 선교사는 죽을 때 까지 공부하고 노력해야 하는 사람이다. 오늘도 더 많이 읽고 묵상하고 배우자. 바른 복음이 없어서 바른 복음을 오해해서 교회를 떠나려고 하는 청년들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자.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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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0. 17.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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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14:1-9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우상숭배를 멈추게 한다

1. 호세아의 마지막 장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올 것을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오라…" (1절 상반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이스라엘이 어떠하였든지 간에 여전히 사랑하시고, 여전히 인내하시고, 여전히 기다리신다. 이스라엘만 인내하고 사랑하신게 아니라 오늘 나에게도, 하나님을 거역하고 다른 길로 가고 있는 모든 영혼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2. 어떤 사람들은 왜 예수님께서 빨리 재림하시지 않느냐고 묻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이 더딘 이유는 한 영혼이라도 더 주님께 돌아오길 애타게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여전히 기다리시는 아버지 하나님으로 인해 예수님의 재림이 더디게 느껴지는 것이다. 주님께 돌아가서 우리가 할 일은 단 한 가지이다. 

3.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과 같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이라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출 20:3-5상반부)

4.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내 삶의 어떠한 우상들도 내 삶에서 이전과 같은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 우상이 나의 삶을 파괴하도록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삶의 주인의 자리에 오직 하나님만이 좌정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태도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 

5. 우상의 문제는 결국 삶의 주인의 문제이다. 내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그 존재가 누구냐는 것이다. 입으로만 부르는 주님이 아니라 내 삶으로, 내 태도로, 내 생각으로 진정으로 믿고 따라가는 존재가 누구냐는 것이다. 하나님인가? 아님 세상에 있는 우리에게 뭔가 그럴듯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존재인가? 때로는 그게 내 생각, 내 자아, 내 마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은 결정해야 한다. 그 한 분이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다른 것으로 대체할 것인가?

6. 하나님께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나의 삶의 주인이 되실 수 있을까? ‘습관이 영성이다'라는 책에서 저자 제임스 헌터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 내가 지금 사랑하고 예배하고 있는 존재가 바로 나를 규정하고 결정한다. 우상으로부터 돌아서고 싶다면 우상을 떨쳐내려고 애쓰고, 돌아서려고 단호하게 결정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 한 분만을 더 깊이 예배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즉, 하나님께 더 집중하고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7. 사랑하지 않는다고 결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결정만으로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러나 더 사랑하는 존재가 있을 때에는 이전의 것이 그다지 내 삶에 중요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아마 8절의 표현일 것이다.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이제 우상에 대해서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 뿐 아니라 관심도 없고 나와 상관도 없다. 왜냐하면 진정한 남편, 진정한 아버지, 진정한 친구이신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8. 오늘 나의 삶에서는 누구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죄의 달콤한 유혹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이시라고 고백하지만 여전히 내 삶의 주인의 자리에 내가 앉아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아이들의 진정한 아버지라고 고백하면서도 자녀들의 삶에 내가 개입하여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요소들을 즉시 바꾸려고 하고 있진 않은가? 입만 살아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지 말자. 사람들도 이렇게 입으로만 사랑하는 사람을 싫어하는데, 마음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더 싫으실까? 입술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기 원한다. 

9. 하나님을 진심으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로 오늘 하루를 살아가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수쿰빛언약교회의 여름 수련회를 잘 마쳤습니다. 이번 수련회에서 특별히 왓수형제와 똠 자매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수쿰빛언약교회를 통해 복음을 듣고 양육 받은 후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라 더 감사한 마음이 많습니다. 저희 가정이 안식년으로 자리를 비웠지만 교회에 감사한 소식들이 들려서 참으로 행복합니다. 왓수 형제마 똠 자매의 신앙이 견고하여 그리스도를 더욱 더 사랑하는 신자들일 되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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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0. 16.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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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13:1-16 헛된 시도는 피곤하게 만들 뿐이다

1. 이스라엘의 범죄는 계속 된다. 아니 이스라엘을 비롯한 인간의 역사 자체가 범죄의 역사이다. 하나님을 버리고 내가 하나님 처럼 되려고 하는 그 욕구로 말미암아 우리는 계속 죄악 가운데 거한다. 1절에서 에브라임의 죄도 동일하다 “…그가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를 높이더니…” 

2.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는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낫다 혹은 다르다' 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들은 죄인일지라도 나는 아니며, 그들은 악할지라도 나는 아니며, 그들은 어리석을 지라도 나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신의 생각이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도 (신들도) 자신을 지지해주어야 한다. 즉 내가 믿는 신은 내가 죄인임이 드러나지 않도록 거룩하셔도 안되고, 내가 지혜로와야 하기 때문에 모든 것 위에 뛰어나서도 안된다. 

3. 살아 있을 필요도 없고, 신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지만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할 필요도 없다. 그저 나의 욕망을 채워주기만 하면 되고, 그저 내가 높아질 수 있도록 나를 서포트 하는 존재이면 된다. 그것이 바로 우상이다. 이스라엘은 그렇기에 우상을 만들어낸다. 참으로 거룩하시고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유는 결국 내가 높아지기 위해서이다. 2절 상반부는 이러한 이스라엘을 설명한다. “이제도 그들은 더욱 범죄하여 그 은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되 자기의 정교함을 따라 우상을 만들었으며…”

4.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도, 이러한 나도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4절). 우리는 높아지길 원해서 바벨탑을 세운다. 그 바벨탑이 무너지면 또 다른 것들을 동원하여 또 다른 무엇인가를 세우고, 또 계속해서 높아지려는 시도들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가 넘어져 있는 그 시간에, 즉 애굽에 있을 때에도 늘 우리와 함께 하신다. 

5. 우리가 높아지려는 시도를 멈추고, 내 자신을 정확하게 본다면, 내가 얼마나 죄인이고, 얼마나 무가치하며,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지를 보게 된다면, 우리는 “나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일 뿐이다. 내가 나를 정확하게 보지 못하고,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라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우리에게 결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은 필요없는 것들일 뿐이다. 

6. 높아지기 원하는 자들에게는 ‘무너짐’외에는 답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자들에게도 ‘넘어짐’ 외에는 답이 없다. 우리는 결코 높아질 수도 하나님 처럼 될 수 있는 자들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존재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그제서야 하나님이 보이고 은혜가 임한다. 

7. 나는 오늘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가? 혹시 높아지려고 하고 있진 않은가? 나는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오늘도 수고하고 있진 않은가? 그 수고는 헛될 뿐이라 우리를 피곤하게 만들며, 닿을 수 없는 기준이라 우리를 절망케 만들 뿐이다. 우리는 나의 절망을 깨달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만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모든 것을 가진 자들이다. 무명하나 유명한자들이다. 

8. 고후 6장에서 바울이 말한 구절이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2:6후반부-8) 높아지려는 시도를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려고 할 때, 하나님 처럼 되려고 하는 시도를 버리고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이러한 말도 안되는 것 같은 역설을 삶에서 경험하게 된다. 그리스도로 인한 이 역설은 우리를 살게 한다. 우리를 회복시킨다. 우리를 자유케 한다. 어떻게 살아갈지를 내가 선택할 수 있다. 높아지려고 할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하려고 할 것인가? 

9.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한 주가 되길 원한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1분 1초가 되기 원한다. 그리하여 높아지려는 피곤하며 불가능한 시도를 참된 안식이 있기 원한다. 참된 안식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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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0. 10.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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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8:1-14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 모든 악의 뿌리는 아담이 저지른 죄의 모양과 같다. 즉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선과 악을 결정하시는 절대적인 분으로 보지 않는 것, 우리의 삶의 주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내가 삶의 주인이 되려고 하는 그 시도들에서 악은 시작되고, 우상들이 생겨나고, 우리의 삶은 망가져간다. 

2. 1절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심판에 대해 경고하신다. 왜? “그들이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1절 후반부) 언약을 어기고 율법을 범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이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율법과 언약보다 내가 더 옳다는 것이다. 내가 더 옳고, 내가 더 지혜롭고, 내가 주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대로가 아니라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언약과 율법을 버리고 이제는 내가 정해놓은 규칙, 내가 원하고 바라는대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도 면피하기 위해 이들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들이 장차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하리라"(2절) 이 말씀은 그들이 정말 주를 아는 것이  라기 보다는 주를 안다고 말하며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셀프사면권을 베푸는 것이다. 

4. 왜냐하면 진정으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안다면 내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헛된 시도는 계속해서 나온다. “선을 버렸으니" (3절), 왕들과 지도자들을 세웠으나 (4절),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4절). 심지어 그들은 셀프용서를 위해 제단도 많이 만든다. “에브라임은 죄를 위하여 제단을 많이 만들더니 그 제단이 그에게 범죄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절). 

5.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하는 모든 종교적 행위는 결국 우리의 죄를 쌓아가는 우상숭배적 행위이고, 복음에 적대적인 행위이다. 왜 셀프 용서 (가짜 회개)가 일어나는가? 하나님이 우리가 속이는 것에 속는 분이란 착각을 하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이렇게 하면 나의 죄가 용서 받을 수 있다는 거짓에 속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작게 보고, 나를 크게 보기에 생기는 일이다. 

6.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의 역사는 항상 그랬다. 하나님을 작게 보는 대신에 자신들을 크게 보고, 지혜롭게 여기고, 생명도 없는 우상을 하나님과 상대 할 수 있는 그 어떤 신 인양 크게 보기 때문에 죄악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질문하셨던 것 같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5 전반부

7.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는 동일하게 물으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나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여기고 있는가? 나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예수님을 작게 보고, 깔보고, 나를 크게 보고, 나를 지혜롭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진 않은가? 내 힘으로는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내딛지 못하면서도 나를 크게 여기고 있진 않은가? 

8. 내 안에도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었던 죄악의 뿌리가 견고한 것을 본다. 내가 결정하고, 내가 판단하고, 나 스스로를 옳다고 여긴다. 나는 모른다. 나는 옳지 않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단체의 이름이 그저 구호가 아니라 내 삶에 반드시 새겨야 하는 진리이다. Not I, but Christ.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끝나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 분이어야 한다. 그 분이 전부여야 한다. 그 분으로 인해서 변화되어야 한다. 

9. 매일의 삶 속에서 나를 부인해야 한다. 아니 순간 순간 나를 부인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분이 내 안에서 사시게 된다. 오늘 나는 나를 부인하고 있는가? 나를 낮게 여기고, 나를 틀렸다 하는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에 내 삶으로 대답하는 자가 되길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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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0. 8.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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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6:1-11 ’척'은 통하지 않는다

1.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길 원하신다. 그러나 돌아온다는 것은 그저 몸만 돌아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우상에게 가 있는데, 내 몸만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의 자리에 있다고 한들 그게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일까? 분명히 아닐 것이다. 그래서 1절의 ‘돌아가자’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요청하는 말일 것이다. 

2.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1절)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는 어려움을 겪어야 하지만 그 속에서 또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진다. 잘못한 자녀에게 매를 대었더라도, 그 상처가 덧날까봐 상처에 약을 바르고 애닳아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진다. 

3.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다가오신다. 지식적으로 나는 너희들의 아버지이고, 너희는 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우리의 잘못과 죄에 대해서는 따끔하게 훈계하시지만, 또한 그보다 넓은 사랑으로 우리를 여전히 품어주고 계신 것이다. 진리와 사랑이 함께 있는 아버지의 사랑이시다. 

4.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about) 지식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관계이다. 3절에서 여호와를 알자고 말하지만 이 ‘알자’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 언어에서 ‘알다’는 관계적 지식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3절)

5. 이 관계는 형식적인 관계가 아니다. 이 관계는 보여주기식도 아니다. 이 관계는 사랑 안에서 충분히 서로를 경험하고 이해하며, 말하지 않더라도 눈빛만 보더라도 서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깊은 관계이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6절). 

6. 형식적인 관계라면 제사를 원했을 것이다. 내가 당신을 예배하고 있습니다란 보여주기식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관계이고, 그 관계의 핵심은 우리의 마음이다. 나의 마음에 지금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지, 누가 내 마음의 주인인지, 내가 지금 누구를 가장 사랑하고 있는지, 그 질문들의 대답을 원하신다. 

7. 형식적인 관계는 오히려 쉬울 수 있다. 척하면 되기 때문이다. 존중하는 척, 사랑하는 척, 염려하는 척 하면 된다. 그러나 그 척에서는 아무런 관계도 생기지 않는다. 우상에는 척만 해도 충분하다. 왜냐하면 우상은 죽어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 까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는 척은 통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척, 예배하는 척, 기도하는 척은 통하지 않는다. 

8. 나는 오늘 내 마음을 아시고, 내 마음의 깊은 곳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는가? 혹시 ‘척'하고 있진 않은가? ‘척'하면서도 얼마든지 사람은 속일 수가 있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의 마음을 속일 순 없다. ‘척'하면서 예배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적 지식을 쌓아가는 오늘 하루가 되기 원한다. 입만 살아서 사랑한다고 말하며 마음은 우상에게 가 있는 자가 아니라 입도 마음도 하나님께만 향한 자가 되기 원한다. 형식만 남은 사랑이 아니라 형식도 갖춘 사랑을 하는 자가 되기 원한다. 삶의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분만 사랑하며, 그 분의 길을 따라가는 오늘 하루가 되기 원한다. 

9. 특별히 몸이 좀 좋지 않은 아내와 말을 잘 듣지 않는 아이들에게도 아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드러나길 원한다. 가벼운 엉덩이, 사랑과 존중의 말로 오늘을 내 몸이, 내 입이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심을 선포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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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0. 5.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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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4:1-10 모르니까 망하는 것이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멜의 음란의 행위로 대표되는 것 처럼 하나님을 배반하고 또 배반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붙잡으시고, 또 사랑하시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2. 먼저 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서 고발하신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1절) ESV번역으로 찾아보면 진실과 인애는 faithfulness와 steadfast love이다. 

3. 이 두 가지 단어, 신실함 혹은 진리로 사용되는 에메트라는 단어, 그리고 자비, 끝없는 사랑의 의미로 사용되는 헤세드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주요하게 사용되는 단어들로 주로 하나님의 성품에 관계된 단어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자들로서 죄로 인해 완벽하지는 못하더라도 부분적으로 이 단어들의 의미가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야만 한다. 

4.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의 모습 속에는 아무런 신실함도, 진리도, 자비도, 사랑도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리이신 하나님이 그들의 삶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1절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니 우리의 모든 도덕적 기준도 어그러진다. 

5. 2절에서는 그러한 모습을 묘사한다.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임음이라" 절대 선이신 절대 진리이신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목적도 없어진다. 착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이 질문 이전에 먼저 생각해야 한다. 무엇이 착한 것일까?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좋은 것인지 기준이 없기 때문에 남을 돕고, 배려하고, 사랑해야 할 이유도 없거니와 이런 행위가 좋다고 어떻게 판단할 수도 없다. 

6. 6절 말씀이 사실이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하 럯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모르면 망하게 된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만나야 한다. 이 구절의 대답으로 호세아는 6:3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7.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상숭배를 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악을 행하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것이 내 삶이 더 거룩해지고, 그 분의 통치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나는 힘써 여호와를 알려고 하고 있는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있는가?

8. 최근 유튜브 채널 삼프로tv라는 경제 채널에서 ‘더 릴리전’ 이라는 주제로 기독교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을 들었다. 잘잘법에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신 연세대 김학철 교수님이 나와서 해박한 지식과 지혜로 예수님과 복음에 대해 MC들의 짖굳은 질문에도 자세히 설명해주신다. 분명히 이 채널에서는 흥미로, 조회수를 위해 시작한 영상들인데 예수님에 대해 듣고 이해를 하면서 MC들의 태도가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본다. 처음에 MC분들은 예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어디서 들은 지식들로 기독교에 대해 선입견,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질문에 대한 설명과 되어진 상황을 들으면서 이해를 하게 되고, 예수님에 대해 관심도 가지게 된다. 하나님을 알되 제대로 알아야 하는 이유이다. 

9. 세상 사람들도 하나님을 알고자 이런 노력을 하는데, 우리 믿는 자는 더욱 그래야만 한다. 알되 제대로 알아야 한다. 아는 것에서 끝나서도 안된다. 그 분의 성품이 내 삶에 반영되어야 한다. 그러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오늘 그 분을 조금 더 알아가기 위해 말씀을 펴고, 묵상을 하기 원한다. 어제 보다 조금 더 그 분을 알아가는 하루가 되길…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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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0. 4.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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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3:1-5 낭비된 사랑

1. 호세아의 사랑을 받았던 고멜은 호세아를 다시 떠나 음란을 저지른다. 고멜이 왜 이렇게 까지 했어야만 했는지 잘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으로 만족할 수 없었고, 다시 남편을 떠나 다른 남자에게로 간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로 하여금 고멜을 값을 치르고 사 오라고 하신다. 

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찌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시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1절) 호세아는 내키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마음을 정하셨다. 그녀가 어떻든지, 어떠한 상황이든지 그녀를 사랑하기로 결정하셨다. 

3. 호세아는 그녀를 위해 은 열 다섯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의 값을 치르고 그녀를 데리고 온다. 찾아보니 보통 노예의 평균 가격이 은 30이었다고 하니 그녀를 세상이 어느정도로 가치를 매기고 있는지 얼마나 그녀를 낮게 보았는지 알 수 있다. 

4. 사실 그녀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인권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다 해서 우리 스스로를 무척이나 과대평가 하고 있다. 우리의 존재가 엄청나게 높고, 뛰어나며 우리는 이런 좋은 대우를 당연히 받아야만 하는 존재로 여길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이 고멜과 전혀 다를게 없다. 

5.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내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였고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였고, 호세아와 같이 우리를 여러번 찾아오신 하나님을 거절하고, 하나님과 같이 있지만 여전히 다른 남자들(우상들)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자들이었다. 우리의 가치가 은 열 다섯개 정도 되는 (현재 돈으로 약 30만원 정도) 존재들이었다. 

6. 그런데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다. 사랑하셔서 우리가 돌아서도 거역해도 배반해도 계속 우리를 찾아오신다. 사랑하신다. 호세아를 통해 보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우리의 가치는 은 15개 밖에 안되는데, 우리를 영원히 사랑하시고,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삼으시기 위해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쏟아 부으셨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이다. 

7. 이런 말도 안되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30만원으로 사면 되는 존재에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고, 통치하시는 왕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다니…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다. 그러나 이 낭비적인 사랑이 우리를 살리신 것이다. 팀 켈러의 책의 제목 처럼 the Prodigal God이 우리 하나님이신 것이다. 

8. 이 낭비적일 만큼 무모하고 엄청난 사랑을 받은 나는 고멜과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다르다고 말하기에는 참으로 부끄럽다. 나 또한 고멜처럼 내 삶에 존재하는 우상들을 사랑하고, 우상들에게 내 삶이 매이는 적이 얼마나 자주인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다고 말하지만 또 다시 우상을 찾아 나가기를 얼마나 반복하고 있는가? 그런데도 이 낭비적인 사랑이 또 나를 찾아오고, 또 나를 붙드시고, 또 나를 인도하셔서 그 분의 품으로 인도하시지 않는가? 이 낭비의 사랑이 없다면 내가 존재할 수도 없다. 

9. 오늘도 이 사랑을 묵상하며, 이 사랑에 잠기기 원한다. 세상 사랑들이 낭비라고 다 손가락질 하고 화를 내어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해 충분하다고 말씀하신다. 전혀 아깝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이 사랑을 더 깊이 알아가기 원한다. 계산적으로 보기에는 낭비적인 사랑이지만, 나에겐 너무나도 충분한 사랑을 배워가기 원한다. 그리고 내 삶에 그 사랑으로 인해 변화된 삶으로, 또 그 사랑을 내 삶으로 드러내는 삶으로 변화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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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4. 9. 24.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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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 11:22-36 질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

1. 본문은 성벽의 재건 후 사람들이 어디서 살아가며 어떠한 일을 담당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11장 1절을 보면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루살렘에 거주했고, 백성은 전체의 1/10만 예루살렘에 거주할 수 있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그 십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2. 그 때에 예루살렘은 내가 살고 싶다고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곳의 거주지는 한정적이었고, 예루살렘이 영적, 도시 행정적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만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해야만 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지도자들 외에 또 예루살렘 안에 거주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레위인들이었다. 

3. “노래하는 자들인 아삽 자손 중 미가의 현손 맛다냐의 증손 하사뱌의 손자 바니의 아들 웃시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레위 사람의 감독이 되어 하나님의 전 일을 맡아 다스렸으니 이는 왕의 명령대로 노래하는 자들에게 날마다 할 일을 정해 주었기 때문이며” (22-23절) 아삽의 자손들, 즉 예배를 담당했던 레위인들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전 일을 맡아 다스리고, 예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거주했다. 

4. 예루살렘 성벽이 왜 재건되었고, 왜 예루살렘 도시를 재건했는지를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 그 일을 시작한 이유를 잊어버리지 않고, 그 이유에 맞게 계속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다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게 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 되게 하기 위해서 성벽을 재건하였기에 그 중심에는 예배자들과 예배를 돕는 자들이 있어야 한다. 

5.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모든 것이 그 목적에 그 질서에 맞게 그 자리에 있다는 말이다. 레위인들이 예루살렘 도시 안에 거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돕는 일을 하는 것은 질서에 맞는 일이다. 우리를 지으신 목적대로 우리를 부르심 목적대로 살아가면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이다. 

6. 이 일을 진두 지휘한 느헤미야는 자신을 어려움 가운데서 은혜로 불러주셔서 이 일을 맡기신 하나님의 목적과 이유를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 부르심의 목적과 이유에 따라 중요한 것을 중요한 곳에 두고, 해야 할 것을 해 나간 것이다. 즉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한 것이다. 

7. 모든 것이 그 목적에 맞게 그 자리에 존재하면서 질서를 지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목적을 잃어버리고, 자리를 벗어나기 때문에 대부분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나는 나를 부르신 그 자리에 있는가? 나를 불러주신 목적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선교지에서 잠시 떨어져서 안식년을 보내면서 자주 드는 마음은 빨리 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다. 빨리 형제, 자매들을 만나고 싶고, 함께 교회를 다시 세워가고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계속 든다. 

8. 그러나 오늘 묵상을 하면서 이런 마음도 어쩌면 주님의 질서에 맞지 않는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13년 만에 첫 안식년으로 불러주셨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것은 여전히 태국과 수쿰빛 언약교회를 마음에 두고 생각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은 불러주신 이 자리에서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들을 누리고 쉬면서 지내는게 오히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님께서 너무나도 많은 분들의 헌신과 배려로 이런 기회를 허락해주셨고, 안식을 취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지 못하거나 그럴 수 없는 상황에 계신 분들과 남아 있는 성도들과 교회를 생각하며 여전히 마음이 불편한 내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9. 묵상중에 하나님께서 조금은 마음을 편하게 먹어도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주께서 허락하신 자리에서 조금은 누리라고 말씀해주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은 마음이 조금은 평안하다. 물론 내일은 또 마음이 불편할 수 있겠지만.. 질서에 맞게 오늘을 살아가기 원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으시도록 그 목적과 질서에 맞게 그 자리에 있기 원한다. 무거운 짐을 주님 앞에 내려 놓고 쉬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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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