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4. 8. 17.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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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24:8-20 성경을 읽는 자만 변화된다

1. 여호야긴이 18세에 왕이 되었다. 그는 어느정도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18살에 왕이 되었다. 8세에 왕이된 요시야 왕과는 달랐다. 그러나 그는 요시야 왕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아버지의 악함을 따라 가는 삶을 선택했다. “여호야긴이 그의 아버지의 모든 행위를 따라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2. 요시야 왕이 했던 개혁의 흔적도, 요시야 왕 시대에 발견했던 하나님의 말씀 책이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요시야 왕의 길로 행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했던 악함을 쫓아 갔다. 왜일까? 

3. 그것은 아마도 인간의 본성이 죄 그 자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렸을 때 성선설, 성악설을 배웠을 때에는 성선설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나란 존재로 46년을 살아보니 인간은 결코 태어날 때 부터 선한 존재가 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뼈 속 깊이 깨닫게 된다. 교육이나 문화를 통해 아닌척 포장할 순 있지만 이기적인 욕망으로 가득차고, 세상에서 내가 가장 소중한 것이 바로 인간인 것이다.

4. 성경 전체는 이러한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의 모습에 대해 증언한다. 비단 특별한 성경구절을 찾지 않더라도 성경 어디를 봐도 인간의 죄가 너무나도 가득 차 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그렇기에 요시야 왕도, 여호야긴 왕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도 역시 동일하게 탐욕과 욕망이 가득 찬 존재들이었을 것이다.

5. 그러나 이 두 사람을 다른 길로 가게 만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었다. 요시야 왕은 발견한 하나님의 언약책을 읽었고, 묵상했고, 그대로 순종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의 언약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야긴 왕은 그 말씀을 읽지도 묵상하지도 순종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외부적인 도움 없이는 우리는 악한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6. “말씀을 읽었느냐” “그 말씀을 묵상했느냐" 그리고 “그 말씀으로 살아내려고 했느냐"가 요시야 왕과 여호야긴 왕의 삶을 갈랐다. 그리고 두 왕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도 극과 극으로 나누어졌다. 요시야 왕에 대한 평가는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긴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왕하 23:24) 그러나 여호야긴 왕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9절) 라고 평가 되고 있다. 

7. 하나님의 말씀 없이 우리는 결코 조금도 선한 방향으로 걸어갈 수 없는 자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도 나는 괜찮은 존재이고, 그래도 나는 어느정도 다른 사람보다는 나아 보인다는 그런 착각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태생부터 악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는 악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들이고, 우리에게는 그것을 막아 줄 브레이크가 필연적으로 필요하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8. 외부에서 들어오는 은혜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우리는 성경이 풍족한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다. 핸드폰에도, 태블릿에도, 컴퓨터에도 또 책으로도 성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호야긴 왕처럼 가지고만 있으면 무슨 소용인가? 성경을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영향력도 변화도 우리는 경험할 수 없다. 성경을 소유하고만 있다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할 수 밖에 없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살아내야 한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하나님의 자극, 내가 죄인이고, 구원은 하나님께 있음을 매일 읽으면서 다시 깨달아야 한다. 구원은, 은혜는 나로부터 나지 않는다. 거룩한 삶도 나로부터 나지 않는다. 오직 나의 삶의 푯대가 되고,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터이다. 읽어야 한다. 읽어야 산다. 읽어야 변화된다.

9. 선교사인 나는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있는가? 다른 책들을 보느라, 혹은 다른 것들에 집중하느라 정작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데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은가? 어제부터 태국어 성경을 쓰기로 하고 쓰고 있다. 매일 빠뜨리지 말고 읽고 쓰고, 묵상하며 주님의 길로 걸어가기를 힘쓰자. 주님 나를 붙드소서.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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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8. 15.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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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23:21-30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다. 

1. 요시아 왕의 개혁은 이제 유월절을 지키는 것으로 향한다. 유월절은 잘 아는 것 처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래서 유월절의 의미는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라는 것이다. 

2. 내가 나의 구원에 있어서 얼마나 무력한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유월절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유월절을 지키지 않았다. 언제부터 지키지 않았는지가 22절에 나타난다.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와 유다 여러 왕의 시대에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3.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그 때 부터 유월절을 지키지 않았다. 유월절을 잃어버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 소견에 옳다고 여기는 신들을 쫓아다니고,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행위들을 하게 되었다. 

4. 본문에 따르면 다윗 왕의 시대에도 이 유월절을 지키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다윗이??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다른 본문과 충돌하는 부분도 있지만..).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요시아 왕은 그 누구보다도 더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지키려고 애쓴 사람임을 알 수 있다. 

5.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21절 말씀은 조금 묵상할 필요가 있다. “왕이 뭇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왜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우리를 위함이 아니고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함일까? 말씀을 지키는 것은 오히려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닌가? 

6. 묵상하다 보니 유월절을 지키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높아지시는 사건이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유월절의 사건은 복음과 동일하다. 우리 힘으로 우리 스스로를 어쩔 수 없는 죄인들에게 영광스러우신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행하여 주신 사건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조금도 없다. 

7. 그렇기에 유월절을 지키게 되면 하나님이 높아지시고,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게 되시고, 이 땅에 오직 주님 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기에 요시아 왕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해 유월절을 지키게 하매” 라고 말한 것이다. 

8.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든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이유는 내가 복을 받고, 내가 잘 되고, 내가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란 영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이유는 그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고, 내게 주신 말씀이 너무나도 영광스럽고 아름다우신 온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나의 순종이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순종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아지게 하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나의 삶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 다른 믿지 않는 자들에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9.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은 결국 하나님을 높이는 삶이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은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은 결국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삶이다. 그렇기에 오늘도 듣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기 원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정말 간단한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그 단순한 말씀에 내 삶을 걸기 원한다. 사랑하기 힘들고 어렵지만 그래도 내가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기에 순종하기 원한다. 요시아 왕과 같이 말씀의 순종에 삶을 거는 오늘이 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https://youtu.be/8szyv1G9h9w?si=pRVy7o33EkKrfHv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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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8. 13.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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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23:1-9 성경, 하나님의 말씀

1. 그간 묵상하면서 순종은 들음에서 나온다고 묵상 하였다. 그래서 청종은 순종함에 있어서도 그리고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도 너무나도 중요한 가치이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청종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내가 듣고 있는 그 말씀을 누구의 말씀으로 생각하느냐 인 것 같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모였다. 1절을 보면 “왕이 보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자기에게 모으고" 모두 모은 다음에 한 일은 청종하게 한 것이었다. 무엇을 청종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였다. “이에 왕이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노소를 막론하고 다 왕과 함께 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성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 (3절)

3.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에는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설사 내가 하나님의 제사를 맡고 있는 제사장이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들이라도 하더라도 반드시 들어야만 한다. 내가 나이가 많더라도, 혹은 나이가 어리더라도 상관없이 들어야 한다. 청종은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가치이다. 

4.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한 자들은 이제 순종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왕이 단 위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하매 백성이 다 그 언약을 따르기로 하니라" (3절)

5. 우리가 들은 말씀이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우리가 어찌 순종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순종하지 않을 때는 우리가 들은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지 않거나 내가 하나님보다 더 옳다고 여기는 바로 그 때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가 더 권위적으로 위에 서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순종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고민의 여지 없이 순종할 수 밖에 없게 된다. 

6. 지금 청종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잘하고 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청종하고 있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고 권위를 부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다. 만약 순종의 태도가 아니라면 나는 여전히 내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옳다고 여기고 있다는 것이고, 내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지혜롭게 여기고 있다는 증거이다.  

7. 오늘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읽은 그 하나님의 언약책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 그래서 그 말씀에 순종한다.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만든 모든 그릇들을 여호와의 성전에서 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밭에서 불사르고 그것들의 재를 벧엘로 가져가게 하고" (4절 후반부) “옛적에 유다 왕들이 세워서 유다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 주위의 산당들에서 분향하며 우상을 섬기게 한 제사장들을 폐하며 또 바알과 해와 달과 별떼와 하늘의 모든 별에게 분향하는 자들을 폐하고" (5절) 그 뿐만 아니라 아세라 상을 허물고 (6절), 성전 가운데 남창들의 집을 허물고 (7절), 모든 산당들을 허물어 버렸다 (8절). 

8. 그들이 순종한 말씀은 분명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출 20:3) 였을 것이다. 그들은 들은 율법책의 내용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것에 토를 달거나 이유를 묻지 않고 순종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일 말씀을 들을 때, 묵상을 할 때, 성경을 읽을 때 나는 내가 듣고 있는 그 말씀을 누구의 것으로 여기는가? 혹시 여전히 나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기에 순종하기 보다는 내 생각을 따르려고 하고 있지는 않을까? 나는 순종인가? 아님 잡종인가? 

9. 사무엘의 태도가 너무 귀하다.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삼상 3:10 그는 청종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겼다. 그래서 청종하였고, 그대로 행하였다.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고 믿는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자세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고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기 원한다. 듣는다는 것은 순종하겠다는 의지이다. 청종하기 원한다. 순종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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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20:12-21 청종(4)

1. 어제의 본문 20절 초반부를 보면 히스기야 왕은 절제절명의 위기의 순간에서 하나님께 묻고 듣는 인물이었다. 2-3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

2. 그의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수명을 15년 연장해주셨다. 그의 인생에 묻고 듣던 그 절망의 순간에는 오히려 형통함이 있었다. 그는 왕이었지만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 앞에 서 있기를 중단한 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형통과 기도응답이 이루어진 때였다. 

3. 그가 병 들었단 소식을 들은 바벨론의 왕이 보낸 사신이 도착했을 때 그는 어쩌면 우쭐해졌던 것 같다. “변방의 왕인 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바벨론의 왕이 사신을 보냈다고?” 자신을 알아주는 큰 나라의 왕 때문에 그는 이제 묻고 듣기를 그친다. 그의 청종의 모습이 멈추었다. 

4. 12-13절을 보면 그의 모습이 좀 더 확실히 보인다.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의 왕 브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 들었다 함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그에게 보낸지라 히스기야의 사자들의 말을 듣고 자기 보물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의 군기고와 창고의 모든 것을 다 사자들에게 보였는데 왕궁과 그의 나라 안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히스기야가 그에게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더라"

5. 더 이상 묻지 않고, 더 이상 듣지 않고 그는 자기 맘대로 결정하고 맘대로 행동하였다. 그는 모든 나라의 것을 보여주었다. 지금 식으로 말한다면 아마 모든 나라의 기밀을 보여준 셈이다. 이제 바벨론은 이스라엘이 무엇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속속들이 파악하게 되었다. 

6. 형통의 순간은 참으로 감사하고 행복한 순간임에 틀림없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삶을 이끌어 나감이 내 눈에 보여진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그러나 그 형통의 순간이 사실은 또한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형통하기 때문에 교만하여지고, 그 교만이 우리를 더 이상 묻지 않고 듣지 않는 자리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히스기야가 특별한 혹은 모지란 사람이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본성이 본디 악하기 때문이다.  

7. 13년의 사역의 시간을 마치고 첫 안식년을 가지는 우리 가정의 모습이 히스기야와 오버랩 되는 부분이 있다. 지금이야 적응과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또 그와 동시에 어쩌면 지금이 가장 나태하기 쉽고, 가장 묻지 않고 듣기를 멈추기 쉬운 시기인 것 같다. 왜냐하면 나와 히스기야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8. 히스기야의 모습 속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배우기 원한다. 청종하기 원한다고, 안식년이 청종의 해가 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형통할 때, 특별한 이슈가 없을 때 더 듣기에 힘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본성적으로 본능적으로 듣기를 멈추고, 히스기야처럼 내 맘대로 내 뜻대로 행동할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청종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스스로를 깨워야 한다. 의지적으로 들어야 한다. 나는 자연스럽게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리로 나갈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듣기 원한다. 어제 묵상처럼 내가 누군지, 내가 어떤 존재인지 더 깊이 깨닫게 되기 원한다.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배우는 것이 청종의 시작이다. 안식년이라는 시간동안 날마다 스스로를 깨우고, 말씀 앞에 서는 자가 되기 원한다. 그러한 매일의 청종의 반복이 나의 안식년이 되기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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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19:29-37 겸손(내가 어떤 존재인지 깨닫게 되면 저절로 가지게 되는 마음)

1. 결국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전쟁이 닥치고, 더 힘있는 누군가가 우리를 치려고 다가올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기를 구하는 것 뿐이다. 

2. 그런데 환난의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때로는 우리가 그정도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착각하기 쉽다. ‘내가 하나님께 어떻게 했는데,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왔는데…’ 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채무가 있는 것 처럼 말하고 행동하기 쉽다. 

3.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어떠한 채무도 지워드릴 수 없는 존재들이고, 우리를 구원함도, 우리를 사랑함도, 우리를 도우심도 우리로 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증언한다. “남은 자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 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31절)

4.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진리는 ‘여호와의 열심' 때문이다. 내가 (일상의 삶에서도, 선교지에서도)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쓴다 하더라도 열매를 보장할 수는 없다. 열매를 거두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다. 

5. 내가 잘나서도, 내가 뛰어나서도, 내가 그럴만해서도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합당하신 영광을 위한 열심을 가지고 계시고,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시고, 도우시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우리가 하등한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너무도 크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하는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6.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면서 나를 너무 크게 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나는 구원받을 만한 그 어떤 것도, 사랑받을 만한 그 어떤 것도, 도우심을 받을만한 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존재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 합당하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15:10)

7. 나의 모든 삶은, 나의 모든 성취는, 나의 모든 것은 오직 주의 은혜로 된 것이다. 나의 공로를 주장할 수도 없고, 나의 열심을 주장할 수도 없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121:1-2)

8. 34절은 다시 한번 이러한 진리를 확증하고 있다.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였더라" 내가 잘해서가 아니다. 내가 뛰어나서도 아니다. 내가 열심히 해서도 아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으로 오늘도 일하시기 때문이다. 선교사로 살아온 13년의 시간들을 반추해보면 정말로 확실하다. 내가 어떻게 해서 얻은 열매는 전혀 없다. 오로지 주의 은혜이고, 오로지 주의 열심이다. 그 놀라우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13년동안 가장 앞에서 볼 수 있었음이, 가장 최전선에서 경험할 수 있었음이 내게 복이다. 그렇기에 조금도 교만하거나 자만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나는 그저 그 분께 무익한 종일 뿐이기 때문이다. 

9. 그동안의 사역을 정리하고 또한 다시 태국으로 돌아가길 준비하면서 가장 가져야 할 마음과 태도는 ‘겸손’임을 오늘 말씀을 통해 듣게 된다. 무익한 종으로서 사역을 잘 정리하고 또 준비하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눅17:10) 모든 영광을 주님께만 돌려드린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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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18:26-37 청종하는 자 (3)

1. 앗수르의 신하 랍사게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협한다. 그는 아람말 뿐 아니라 유다말도 할 수 있는 자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유다 말로 협박하기 시작한다 (27절). 

2. 그의 말을 요약하면 “너희들 지금 하나님이 도우실거라는 히스기야가 한 말 믿고 까부는 것 같은데 히스기야 말 듣지 말고 믿지 마, 항복하면 살려줄께"였다 (28-32절). 32절 마지막은 이렇게 말한다. “히스기야에게 듣지 말라"

3. 히스기야로 부터 듣는다는 것은 히스기야의 말을 듣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히스기야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히스기야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방 장수 랍사게는 그것을 하지 못하게 권유하고 있다. 마치 세상이 우리에게 속삭이며 속이려는 것과 비슷하다. 

4. “너희들 하나님 말씀 듣지 마. 하나님이 어딨어? 차라리 너희 생각과 지식을 믿어!” 사실 이러한 꼬임에 쉬이 넘어간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너무나도 멀어보이고, 악인은 득세하는 것 같아 보이며, 나의 지혜와 힘을 믿는 것이 좀 더 쉬워 보이기 때문이다.

5. 그러나 백성들은 히스기야의 말, 즉 히스기야에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였다. “그러나 백성이 잠잠하고 한 마디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니 이는 왕이 명령하여 대답하지 말라 하였음이라" (36절)

6. 이스라엘 백성들은 히스기야의 말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순종하였다. 얼마나 항변하고 싶었겠는가? 이방인 장수의 조롱 앞에서 얼마나 너는 틀렸고, 우리 하나님이 옳으시다고 외치고 싶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순종하였다. 

7. 청종은 듣는데서 시작되지만 청종은 순종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듣기만 하는 것은 반쪽이다. 들었으면 순종해야 한다. 들었는데 순종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한다면 그것은 들은 것이 아니다. 순종이 제사 보다 낫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15:22) 청종과 순종은 한 세트이며 가장 나은 길이다. 

8. 이번 안식년의 모토를 ‘청종의 해'로 정했다. ‘청종의 해'는 또한 당연히 ‘순종의 해'이어야만 한다. 순종하지 않는 청종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청종하려고 할 때 랍사게가 말한 것 처럼 많은 유혹과 두려움이 나를 미혹하려고 할 것이다.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하나님보다 잘 보이고, 우리 눈 앞에서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우리를 유혹할 것이다. 그럴 수록 더욱 청종해야 한다. 듣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시작이다.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의 시작이다. 그래서 셰마 이스라엘로 유명한 구절인 신명기 6:4 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강하게 들으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9. 청종하는 자가 되기 원한다. 때로는 내 마음에 내 마음대로 하고 싶고, 내 뜻대로 행동하고 싶더라도 순종하는 자가 되기 원한다. 순종하기 위해서 가장 잘 듣는 자가 되기 원한다.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내 마음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한다. 예전 NIBC를 처음 시작하신 김학철 교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순종이 아니면 잡종이다" 순종하기 위해 청종하는 자로 오늘을 살아내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저희 가정의 8월 기도편지를 보내드립니다. 보시고 수쿰빛 언약교회와 에게로 클럽을 위해서 기도해주시고, 저희 가정을 위해서도 계속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늘 함께 걸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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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7. 31.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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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17:34-41 청종하는 자(2)

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세우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옛적에 여호와께서 야곱의 자손에게 언약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다른 신을 경외하지 말며 그를 경배하지 말며 그를 섬기지 말며 그에게 제사하지 말고" (35절)

2.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하였다. “또 내가 너희와 세운 언약을 잊지 말며 다른 신들을 경외하지 말고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만 경외하라 그가 너희를 모든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리라 하셨으나 그러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오히려 이전 풍속대로 행하였느니라" (38-39절)

3. 하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신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우리의 귀에 들리도록, 말씀을 통해, 환경을 통해, 우리 옆에 그 누군가를 통해 계속해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39절 말씀처럼 문제는 우리다. “그러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4. 듣지 아니하는 백성에게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다. 듣지 아니하는 백성들에게는 순종이 없다. 그렇기에 듣지 아니하는 백성들에게는 미래가 없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은 절망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듣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5. 듣지 아니하기에 그들은 이전 풍속대로 행한다. 이전 풍속대로 행한다는 말은 무엇이 옳은지, 무엇인 그른지 분별하지 못하기에 죄의 관성을 따라 계속해서 죄를 짓는 삶을 말한다. 죄의 관성을 이길 수 있는 임팩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니 죄의 관성을 따라 사는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가 그렇게 죄로 살았기에 그의 아버지도 역시 죄로 살았고, 그의 자녀 역시 죄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6. 듣지 아니하는 것은 자녀들을 망하게 하는 가장 지름길이다. 부모로서 듣지 않으면 나의 자녀들은 나의 죄된 모습을 따라 살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죄의 관성이다. 부모로서 자녀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 중에 하나는 ‘듣는 것' 청종이다. 청종하는 부모가 되는 것이 바로 내가 할 일이다. 

7. 아이들이 분주하고 어수선한 생활을 오래했다. 태국 집 정리부터 시작하니 거의 두 달을 뭔가 정돈되지 못하고 어수선 하게 지냈다. 그랬더니 아이들의 생활이 엉망이다. 태도도 엉망이다. 그런데 그런 아이들을 보며 화가 난다. 그러나 과연 아이들의 흐트러짐이 어수선한 생활 때문만인 것일까? 혹시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듣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8. 나에게 청종이 없다면 우리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삶을 보여줄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부터 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10:17) 들음이 모든 것의 시작이다. 믿음의 시작이고, 자녀 양육의 시작이고, 좋은 남편이 되는 시작이고 선교와 사역의 시작이다. 듣지 아니하는 죄를 범하지 않기를 원한다. 청종하지 않는 죄를 범하지 않기 원한다. 잠잠히 듣고, 잠잠히 그 분 안에 거하기 원한다. 아이들의 연약함을 탓하지 말고 듣지 않았던 나를 탓하며 듣는 자가 되자. 내가 들을 때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변하게 될 것이다. 

9. 오늘도 듣기 원한다. 청종하는 자로 하루를 살아내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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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7. 30.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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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17:13-23 청종하는 자

1. 어제 본문에서 말하고 있기를 이스라엘 왕 호세아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던 왕이었다.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다만 그 전 이스라엘 여러 왕들과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더라" (2절)

2. 왕의 악함은 결국 왕국 전체를 악함으로 몰아 넣는다. 그들은 우상을 섬겼고 (12절), 여호와께서 조상들과 세웠던 언약과 경계를 버리고 (15절),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일월 성신을 경배하며 바알을 섬겼다 (16절). 

3. 왕국시대의 이스라엘의 패턴은 결국 리더의 문제였다. 왕이 바로서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살면 왕국이 바로 서고, 왕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면 여지없이 우상숭배와 악한 길로 왕국 전체가 빠져들었다. 

4. 전체 본문에서 가장 무서운 말은 14절이었다.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의 목을 곧게 하기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던 그들 조상의 목 같이 하여" 그들은 누구로 부터도 듣지 않았다. 하나님으로부터도, 다른 선지자나 사람들로부터도 듣지 않았다. 그리고 목을 곧게 하여 나의 생각, 나의 신념이 옳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었다. 

5. 듣는 것이 중요하다. 듣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다른 본문이 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 (삼상15:22) 

6. 듣는 것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누구로부터 듣느냐이다. 삼상 15:22에서도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이라고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들어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들어야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우리도 조상들의 목이 곧더라도 우리의 목을 곧게 하지 않을 수 있다. 목이 곧아지는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듣지 않고 내 안의 목소리를 듣기 때문일 것이다. 

7. 내 안의 목소리를 들으면 나의 전제, 나의 생각, 나의 신념이 너무나도 옳아 보이고, 너무나도 중요해 보인다. 내 안에 함몰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부터 들으면 우리는 겸손해지고, 넓어지고, 온유해지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 

8. 그간 안식년 준비로 너무 바빴다. 태국에서 짐을 빼서 정리하고, 그 짐 중 일부를 보관하고, 일부는 한국으로 가져오고, 한국에 와서는 설교하고, 인사하러 다니고, 미국에 와서는 또 살아가기 위해 너무 바쁘다. 그래서 묵상을 생각보다 잘 못하게 되었고, 나누지도 못하게 되었다. 다행히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 묵상을 보내주면 좋겠다고 메시지를 보내주기도 하며 나의 게으르고 나태한 마음을 깨웠고, 겨우 말씀을 묵상하며 정리하였다. 그런 와중에 들은 말씀이 결국 하나님으로 부터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9. 듣는 자가 되기 원한다. 청종하는 자가 되기 원한다. 세상의 소리가 아니라 내 마음의 소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터 듣기를 원한다. 말씀이 내 삶을 움직이고, 말씀이 나의 안식년을 움직이고, 말씀이 나의 사역과 선교를 움직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 듣는 자가 되기 원한다. 안식년의 모토가 청종이 되길…

10. 오늘도 샬롬 

*저희 가정 미국에 잘 도착해서 서바이벌 중입니다. 생각보다 준비할 것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은 것 같습니다. 잘 적응하고 지내면서 계속 청종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첫 번째 안식년을 보내며 지난 13년간의 사역을 잘 정리하고 다음 사역을 또 준비할 수 있도록 저희 가정을 위해서 또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늘 감사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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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2:1-5 예수가 해답이다

1. 골로새 교회 성도들과 라오디게아에 있는 성도들은 지금 어려움 중에 있었던 것 같다. 신앙에 따른 핍박과 그로 부터 파생되는 여러가지 어려움들이 성도들의 삶을 힘겹게 만들었다. 우리의 삶은 늘 어려운 것 같다. 

2. 그러한 어려움 중에 있는 골로새 교회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성도들에 대해 사도 바울은 진심이었다. 영적인 아비의 마음이요 목회자의 마음이다.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얼마나 힘썼는지를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1절)

3.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의 마음과 사랑을 전한다. 자신이 그들을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기도하고 있는지를 전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위로는 자신의 인간적인 위로나 사랑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고난 중에 힘겨움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위로를 건낸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었다. 

4. 아마도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고난과 어려움 이었을 것이다. 성도들은 예수를 믿는 것에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걸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한 고난 중에 결국 위로는 예수님 한 분이기에 바울은 결국 예수님에 대해서 또 말한다.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2-3절)  

5. 예수를 믿고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 삶의 고난과 힘겨움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마치 나침반 없는 배 처럼 말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었더라도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고난은 찾아온다. 그렇기에 세상은 우리에게 자꾸만 말한다. “예수가 밥 먹여주냐? 예수 믿어서 뭐가 달라지냐? 예수 믿으면 답이 나오냐?”

6.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천국행 티켓을 따놓았기에 모든 것이 잘되는 삶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그 고난과 어려움의 시간 동안에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그 고난을 함께 감당하시기에 그 분과 함께 은혜 가운데 견디며 살아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의 어려움과 힘듦이 이해되고 해결되는 시간이 오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견뎌낼 수 있는 것이다.

7. 어제 한동대와 NIBC를 졸업하고 지금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두 자매를 정말 오랫만에 만났다. 그들의 삶의 모습 속에서 쉽지 않은 어려움들을 보았다. 전공도 바꿔서 취업하였고 직장에서 쉽지 않은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나에게는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인간적인 위로는 많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과 그 분이 하시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8. 왜냐하면 내가 그들의 마음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내가 그들의 상황에 대해서 어설픈 위로와 격려를 하는 것 보다 그들의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시고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이야기하면 예수님께서 그들을 분명히 직접 만지실 것이기 떼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아버지이시고, 그들의 친구이시며, 그들을 누구보다도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늘 골로새서 본문을 보며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비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적으로 공감이 된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깨닫게 된다. 예수가 답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 알아야 하고, 그리스도를 더 사랑해야만 한다. 

9. 사랑하는 자가 묻게 된다. 사랑하는 자가 듣게 된다. 나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더 말하고 있는가? 기도하는 것은 나의 삶이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나올 수 있는 통로가 되길 원한다. 또한 수쿰빛 언약교회가 그런 통로가 되길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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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4. 5. 27.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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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13:14-25 지혜가 귀에 들릴 때 순종하는 지혜

1. 잠언 본문은 계속해서 지혜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잠언에서 이야기 하는 지혜를 잘 생각해보면 바른 것이고, 선한 것이다. 그렇기에 당장에 듣기에 내 귀에 거슬리는 소리일 수 있는 것이다. “지혜 있는 자의 교훈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14절) 귀에 듣기 싫은 말은 사실은 좋은 약이다. 그 순간에 듣기 싫음만 극복할 수 있다면 지혜를 얻을 수 있다.

2. 또한 성경은 선한 지혜는 또한 은혜를 베푼다 “선한 지혜는 은혜를 베푸나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 (15절) 즉, 지혜에도 선한 것과 악한 것이 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을 살리고 은혜를 베푸는 지혜가 있는 것 처럼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고, 아프게 만드는 지혜도 있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3. 물론 우리는 그런 악한 지혜를 지혜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생각으로 사람을 살리는 것도 가능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되겠다. 

4. 17-18절을 보면 14절과 결이 같은 이야기를 한다. “악한 사자는 재앙에 빠져도 충성된 사신은 양약이 되느니라 훈계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궁핍과 수욕이 이르거니와 경계를 받는 자는 존영을 받느니라"  결국 지혜를 들을 귀가 있어야 한다. 내가 원치 않더라도 바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내 귀에 거슬리더라도 참고 들을 수 있어야 한다. 

5. 나이가 점점 들면서 느끼는 것은 고집이 세진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기 보다는 내가 말하고 싶어 한다. 또 목사와 선교사라는 포지션 자체가 듣는 것 보다는 말하는 것에 더 익숙하도록 만들어간다. 그러나 지혜를 듣지 못한다면, 지혜를 들을 마음이 없다면 사망의 그물(14절)로 들어가는 것이며, 험한 길(15절)로 걷게 되는 것이다.

6. 누구로 부터 지혜를 듣고 있는가? 가장 들어야 할 것은 지혜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우리는 조금도 변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우리는 조금도 바른 길을 선택할 수 없다. 나는 지금 누구로 부터 듣고 있는가? 

7. 그리스도로 부터 들었다면 들었을 때 순종하고 있는가? 듣는다는 것은 순종을 전제로 해야 한다. 들어보고 내가 듣기에 괜찮은 것 같으면 순종하고, 들어보니 별거 없으면 안 하겠다는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는 없다. 그러한 태도는 내가 하나님보다 더 옳다고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이 고백은 들어보고 결정하겠다는 고백이 아니다. 그게 무슨 고백이든지 순종하겠다는 고백이다. 

8. 말씀을 묵상하는데서 그치지 말아야 한다. 말씀을 묵상했다는 것이 최종목표가 아니다. 우리의 최종목표는 지혜이신 그 분께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실 때에, 귀에 말씀이 들릴 때에 순종해야 한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지 않은가?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2

9. 그리스도께 듣는 것이, 순종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낫다. 가장 나은 것을 선택하는 내가 되길 원한다. 지혜의 말씀이 들릴 때에 지혜를 얻는 자가 되자.

10. 오늘도 샬롬

*어제 예배에서 디어 자매(검정색 옷)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몇 주간 예배에 참석하다가 어제 주일예배 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했습니다. 믿음이 잘 자랄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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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