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5. 3. 25.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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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 4:34-49 삶으로 말하는 자

1. 모세는 아론과 함께 레위 사람의 인구 조사를 실시한다. 37절의 시작 부분과 41절의 시작부분이 동일한 것을 보게 된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이 반복된다. "이는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2. 물론 37절과 41절에서 다른 부분은 "모세에게 명령하신대로"라는 구절이 37절에는 포함이 되어 있고, 41절에는 포함이 되어 있지 않다는 차이점이 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행하였다. 

3. 이는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순종하거나 불순종하는 것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말씀하시면 순종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4. 때로는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하면서도 순종과 불순종을 내가 결정하려고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혹은 내가 정확하게 들은 것이 확실한가? 라는 질문을 하면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고 있을 때도 많지 않은가? 모세와 아론에게는 그런 의심도 없었고, 그저 순종만이 존재했다. 

5. 그러나 37절과 41절이 다른 부분을 보면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지만 아론은 직접 듣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통 하나님께서 부부에게 같은 마음을 주시지만 때로는 남편이나 아내 둘 중에 한 사람이 먼저 듣는 경우가 있다. 내가 직접 듣지 못할 때 우리의 태도는 어때야 하는지를 아론을 통해서 보게 된다. 

6. 아론은 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것을 진심으로 신뢰했고, 또 그런 모습을 계속해서 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아론은 자신이 직접 듣지 못했더라도 모세가 말하는 것이라면 신뢰했고, 또 순종했다. 아마도 어릴 때 부터 봐왔던 모세의 모습이 아니라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 되어 버린 변화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7. 내가 직접 듣지 못해도 우리는 순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려면 그 사람에 대한 신뢰, 즉 그 사람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또한 그 사람의 인격이 성령 안에서 열매 맺는 것을 볼 때에만 가능하다. 인격도 개 차반, 단 한 번도 주님과의 교제가 없는 사람의 말을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8. 목사로 선교사로 살아가는 나에게는 때로 하나님께서 지금 하고 계신 말씀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설교를 통해, 대화를 통해 말해야 할 때가 있다. 나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기 위해 나의 욕망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그와 동시에 나의 삶이 말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 분 안에 있음이, 십자가의 능력으로 인해 내 삶이 부족하더라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이 보여져야지만 내 설교에, 내 말에 신뢰가 생기게 될 것이다. 오늘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하며,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9. 아론이 보았던 모세와 같이 내 삶에 그리스도의 흔적이 남아 있길 원한다. 내 혈기대로 말하고, 혈기대로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신 것 처럼 그렇게 내 삶에 조금이라도 그 분의 흔적이 남길 원한다. 모세와 같이 말로 말하는 자가 아니라 삶으로 말하는 자가 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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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5. 3. 25.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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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 3:40-51 숫자에 빠지면 영혼을 잃어버린다.

1. 모든 물건이 만든 자에게 소유권이 귀속됨과 같이 우리 모두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특별히 레위인들에게 맏아들의 지위를 주셨다. 그들이 제사장의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 원래라면 지파와 상관없이 맏아들 모두는 하나님의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레위인들을 그 맏아들의 역할을 하게 하고, 다른 지파들은 그 혜택을 보게 하셨다. "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가족 중 모든 처음 태어난 것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내게 돌리라" (41절).

3. 레위인들이 맏아들의 역할로 하나님의 전에서 섬기는 대신 다른 지파의 맏아들들은 다른 역할을 맡아서 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인들의 숫자보다 이스라엘의 맏아들들이 더 많기에 그 넘어가는 숫자에 대해서는 돈으로 대가를 치루게 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태어난 자가 레위인보다 이백칠심삼 명이 더 많은즉 속전으로 한 사람에 다섯 세겔씩 받되 성소의 세겔로 받으라 한 세겔은 이십 게라니라" (46-47절).

4. 전체 인구에 비하면 맏아들 273명은 그리 많은 숫자가 아닌것 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숫자를 정확하게 셈하시고, 정확하게 속전을 하도록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것 하나도 퉁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5. 때로 숫자는 우리로 하여금 그 숫자 이면의 것들을 보지 못하게 한다. 273명이라고 하면 전체에 비하면 별거 아닌 것 처럼 느껴지고 그 정도면 대충 처리해도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273명에게는 각각의 인생과 스토리, 삶이 있으며, 숫자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대할 때에만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게 된다.

6. 사람을 숫자로 대해서는 안된다. 그 숫자가 2-3명이든, 10명이든 간에 사람을 숫자로 볼 때에 함정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심과 같이 우리도 숫자가 아니라 한 영혼, 한 영혼에게 집중해야 한다. 그 어느 누구도 예외가 되어서는 안된다. 

7. 때로는 숫자나 통계의 함정에 빠질 때가 있다. 교회의 행사 중에 대부분이 참석하는데 한 두 명이 못 나오면 대부분이 참석한 것에 내 마음이 뿌듯하고 감사할 때가 있다. 행사 사진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더 그럴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 숫자에 현혹되지 말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 숫자 넘어의 한 영혼, 한 사람에게 집중하고 찾아가고 마음을 나누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8.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다. 요 4장을 보면 그 바쁜 공생애 중에도 사마리아로 의도적으로 가셔서 한 여인을 만나셨다. 나사로의 집으로 방문하셔서 마리아와 마르다를 만나셨다. 예수님은 사람을 숫자로 본 것이 아니라 한 영혼으로 보셨기 때문이다. 나는 한 영혼으로 사람을 대하고 있는가? 혹시 그들을 숫자로 대하고 있진 않은가?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으로 대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건 아닌가?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의 글귀가 떠오른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9. 그 한 사람의 일생을, 그 한 사람의 영혼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역자가 되기 원한다. 사람을 숫자로 보는 어리석음이 나의 삶에서 사라지기 원한다. 모든 장자들을 위해 돈까지 지불하라고 하셨던 민수기의 하나님, 그리고 한 영혼을 위해 이 땅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기억하며 나도 그렇게 살아가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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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5. 3. 25.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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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 2:1-34 내 삶의 중심, 오직 예수

1. 오늘 본문 같은 본문은 묵상하기가 참 어렵다. 그림으로 그리면 명확해 보이는데 그것을 글로 설명하니 읽어도 눈에 쏙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은 진 편성 및 행군 순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전쟁을 할지도 모르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명령이니 더 나와는 상관없이 느껴진다. 

2.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대략 이러하다. 이스라엘의 진은 레위인의 성막을 중심에 두고 각 방향마다 세 지파씩을 위치시킨다. 본문의 순서에 따르면 동쪽은 유다, 잇사갈, 스불론, 남쪽은 르우벤, 시므온, 갓, 그리고 가운데 레위 지파의 성막이 위치하고, 서쪽에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북쪽에는 단, 아셀, 납달리 지파를 위치시킨다.

3. 이 진에서 가장 중심은 위치적으로나 기능적으로 바로 성막이다.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 바로  그 자리가 가장 중심이다. 그런데 이 진이 의미하는 것은 다른게 아니라 전쟁시 싸우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그 중심에 전쟁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할 것 같은 성막이 위치하다니 좀 의아하게 느껴진다. 

4. 그런데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정체성이자, 이스라엘의 방향성이다. 컨트롤 타워는 어느 지파가 맡는 것이 아니라 성막에 임재하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로 순종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하는 것 같은 그 성막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바로 그 자리라는 것이다. 

5. 이것은 이스라엘 만의 정체성이 아니라 바로 나의 정체성이어야 한다. 내가 원하는데로, 내가 하고 싶은데로 살아가는 것이 나의 정체성이서는 안된다. 내 삶의 중심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하나님께서 가라하시면 가고, 서라 하시면 서는게 내가 해야 할 일이다. 

6. 그리고 승부는 세상의 관점에서 봤을 때 유리해 보이는 그 어떤 것, 예를 들면 병력이나 말의 숫자에 달린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한다. 재력이나 실력 등이 승부를 가르는 것이 아니다. 이기고 지는 것은 오직 이 세상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한다. 

7. 재력이나 실력을 쌓아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야만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또 삶의 전반적인 태도 속에서 내가 의지하는 것이 재력이나 실력이 되어서는 안되고, 오직 하나님이어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8. 오늘 내 삶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는가? 내 자아인가? 아니면 하나님이신가? 나는 무엇을 의지하는가? 세상적인 기준에서 강해보이고, 좋아보이는 재력과 실력인가? 아니면 오직 나에게 승리를 주실수 있는 하나님 한 분인가? 집을 구하면서 답답함을 느낀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집과 위로의 처소를 말씀하셨는데 뭔가 지지부진하다. 브로커는 연락을 해도 답이 없다. 그러니 자꾸 처음 주신 마음을 놓고 싶고, 내 마음대로 결정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인간적인 방법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여전히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들을 기대하며 그 분을 의지하는 것이다. 혹 내 기대와 다르더라도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여전히 그 분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9. 대학교 때 부터 많이 들었던 김명식의 '오직예수'라는 찬양이 계속 맘에 멤돈다. 내 삶이 오직 예수만을 의지하게 되기를… 주님이 주신 마음을 굳게 붙들고 재력이나 실력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예수만 의지하는 하루가 되기를 결정한다. 

10. 오늘도 샬롬

https://youtu.be/aH28jaCoPe8?si=iVf7nBkFPb1n60N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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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