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23.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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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8:33-43 하나님을 램프의 지니로 만들지 말라

자신의 백성들에 대한 기도를 다 마친다음(33-40절) 솔로몬은 이제 다른 민족들을 위해 기도한다 (41-43절). 어제 말했던 타자의 하나님을 부른 것일까? 어떤 마음이었을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솔로몬은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적극적인 하나님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그들이 혹시 소문을 듣고 온다면…(43절)의 전제가 있다. 선교학에서는 이것을 가는 선교, 오는 선교로 구본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이방인에 대한 배려도 있다고 하니 그것만 해도 괜찮아 보인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과 다니엘의 차이점이 보이는 구절이 있었다. 40절은 ‘그리하시면 그들이 주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땅에서 사는 동안에 항상 주를 경외하리이다’라고 기도하고 있다. 자신과 자신의 백성들의 모든 기도를 올려드리고, ‘그리하시면’ 주를 경외하겠다고 기도하는 것이다. 다니엘은 어떻게 기도했는가? 단 3:18 ‘그렇게 아니 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에게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라고 그들의 상황과 관계 없는 믿음을 이야기 했다. 

‘그리하시면’의 솔로몬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다니엘이 계속 비교된다. 나는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솔로몬처럼 이것 저것 해달라고 기도하고 ‘그리하시면’ 주님을 잘 섬기겠다고 기도하는가? 아니면 다니엘과 같이 내 삶에 어려움이 있고,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만 섬기겟다고 기도하는가? 나의 기도는 솔로몬과 같을 때가 너무도 많다. 타자의 하나님께 기도하기 보다는 나의 하나님께 나를 위한 램프의 지니가 되어 달라고 기도할 때가 너무나도 많다. 솔로몬과 같이 직설적으로 나를 위해 램프의 지니가 되어 달라고 기도하지 않지만 조금 더 고상한 방법으로 하지만 내용은 같은 기도를 올려 드리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은 결코 나를 위한 나만의 램프의 지니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을 나에게 맞추려고 하지 말고, 나를 하나님께 맞추자. 하나님께 내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하나님을 나를 위한, 나만을 위한 작은 신으로 만들지 말고, 우주보다 더 크신 그 분의 자리에 계시도록 하자. 결국은 마음의 주인 문제이다. 하나님이 내 삶의 왕이신가? 아니면 내가 왕인가? 내가 램프를 지닌 알라딘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내가 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은 기도의 모습을 좀 바꿔보기 원한다. ‘~해주세요’의 기도 보다는 ‘주님의 마음이,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라는 기도를 드리기 원한다. 정말로 묻는 은혜가 있기를 원한다. 조금 더 나를 비워내고 조금 더 주님으로 채워내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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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19.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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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7:40-51 묻는 은혜, 동행하는 은혜

어느 순간 묵상을 하면서 '~을 위하여'라는 단어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 삶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한다는 그 헛된 포장이 많아서 그렇게 느껴졌나 보다. 오늘 솔로몬은 드디어 성전 기구들을 죄다 완성해서 옮겼다. 다 좋았는데, 51절을 읽는데 이 단어가 못내 마음이 불편했다.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솔로몬은 이 성전의 모든 내용들을 여호와를 위해 만든 것이 아니었고, 성전을 위해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성전의 설계와 내용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성막은 모세에게 어떻게 만들라고 하나님이 모조리 지시하셨고, 모세는 거기에 순종했지만, 성전은 하나님이 어떤 것도 말씀하시지 않았다. 솔로몬의 지혜대로, 솔로몬의 생각대로 만들어져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하나님을 위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성전을 위한 것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이 불편함… 하지만 많은 순간 내 삶도 ‘주를 위해’라는 타이틀을 걸어놓고, 내 맘대로 하고 있는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성전 지으시는데 간섭하지 않으셨을까? 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을까? 주신 그 지혜 안에서 알아서 하라는 자유의지의 표현일까? 여러가지 생각이 들지만 처음으로 돌아가면 솔로몬이 하나님께 묻지 않았던 것 같다. 다윗의 인생은 묻는 은혜가 있었다. 솔로몬의 인생은 묻는 은혜가 없다. 묻지 않고 자의적으로 한다. 자의적으로 하니 ‘하나님으로 인해, 하나님과 함께’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위해’라고 표현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 물어야, 여쭤보고 들어야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걸어갈 수 있다. 학생 때 가장 싫어했던 표현이 하나 있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공부한다’라는 표현이었다. 이것만큼 내 중심적인 표현이 어디에 있는가? 내가 무엇이길래 주님의 영광이 나한테 달려 있는가? 우리는 그 분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없어도 충분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함께 공부한다’가 더 적절해 보인다. 

오늘도 내 삶에 무엇인가를 ‘하나님을 위해’ 한다는 잘못된 비복음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영역이 없는가? 나는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존재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망각하지 말자. 은혜로 구원받았고, 내가 내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주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도 없고, 그런 생각도 버려야 한다. 내가 오늘 붙잡아야 할 것은 그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그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 하나님께 묻는 것이다. 묻는 은혜가 오늘도 내 삶에 있기를 원한다. 

하나님께 물어야 산다. 물어야 듣는다. 물어야 순종한다. 어떤 모양, 어떤 모습으로 섬길 수 있을지 물어야 한다. 오늘도 묻는 은혜, 함께하는 은혜가 충만하게 내 삶에서 나타나기 원한다. 제발 좀 묻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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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