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19-34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려면
1. 어제에 이어 계속 세례요한의 이야기가 나온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분명하게 알았다. 자신은 빛도, 그리스도도, 아님을 확실히 알았다.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대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아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뢰 아니라" (20-21절).
2. 그가 말하는 자신의 정체성은 광야의 외치는 소리였다.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3절)
3. 광야에 무엇이 있는가? 광야에는 돌들과 척박한 환경이 있는 곳이다.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도 아니다. 외치는 소리라는 것은 누군가가 들어야 하는 메시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왜 그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도시가 아니라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어야 했을까?
4. 진리는 어디서 외쳐도 진리이기 때문일 것이고, 도시에서 외칠 경우 자신의 정체성을 흔들 수 있는 유혹이 발생될 소지가 많을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례 요한도 연약한 사람일 뿐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고, 인기를 누리게 될 때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을 뿐이다.
5. 주님을 섬기는 일에 처음부터 악하게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 처음에는 그리스도를 위해 시작하지만 우리를 흔드는 유혹들이 발생되면 넘어지는게 우리 사람이고, 세례 요한은 그럴 여지를 만들지 않으려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었다.
6. 나의 정체성과 삶의 이유를 정확히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팀 켈러의 말과 같이 우리는 사랑받는 죄인이다. 나는 무익한 종일 뿐이며 하나님 앞에 어떤 내세울 것도 없는 사람이다. 내가 무슨 사역을 하는지, 열매가 얼마나 있는지는 나의 어떠함과 크게 상관이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일하심을 뿐이다.
7.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정체성을 정확히 알았다면 이제 필요한 것은 이와 더불어 내 삶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도 역시 중요하다. 나 또한 사람들을 칭찬과 인정을 무척이나 갈망하는 존재 아닌가?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함으로써 내 자신이 드러나도록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가?
8. 진심으로 겸손하게 이야기 하지만 또한 겸손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도록 얼마든지 교묘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가? 광야에서 외친 소리인 세례 요한을 보면서 그런 나의 교묘함을 직면하게 된다. 어쩌면 다른 이들은 알 수 없는 나와 하나님만 알고 있는 그런 교묘함.. 이런 교묘함을 넘어서는 한 해가 되고 싶다. 방콕이라는 대도시안에서 사역하지만 여전히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살아가고 싶다.
9. 이것이 어찌 내 힘으로 될 수 있겠는가? 매일 말씀에 나를 비추어 보는 수 밖에 없다. 하나님 말씀이 아니면 길을 잃을 수 밖에 없음을.. 매일 아침 말씀을 대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최선임을 깨닫는다. 2024년은 말씀 앞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살아가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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