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롬 10:5-13 복음이 삶의 태도를 결정하게 하라

1. 기독교에서 ‘의'의 문제는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불의와 함께 하실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불의가 심각한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다. 

2. 이 ‘의'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싶어하시기 때문이다. 그 거룩하시고 온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왜 우리와 같이 불의하고, 죄악이 가득한 인간과 함께 하고 싶어하실까? 하나님은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데도 말이다. 

3.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길 원하시기에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그 분 자신이 이 땅으로 오셔서 우리 인간의 불의를 위해 고난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4.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딱 하나이다. 실제로 일어났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실을 믿는 것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9절) 

5. 다른 것은 필요하지 않다. 어떠한 고행도 애씀도 필요 없다.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어떠한 고행이나 애씀도 우리의 불의함을 조금도 바꾸거나 개선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겸손하게 그리스도를 믿는 것, 의지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일하게 요청되는 것이다. 

6. 이 믿음은 마음에서 부터 시작된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0절) 그리고 이 믿음을 가진 자는 더 이상 수치와 부끄러움에 쳐하지 않게 된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1절)

7. 왜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옷을 벗기우시고 고난 당하실 때에 모든 수치와 부끄러움을 대신 당하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도, 우리의 수치를 가림도, 우리의 영광도 우리로 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대신 담당하셨기 때문에 받게 되는 것이다.

8. 내가 얼마나 죄악되고, 불의하며 모순된 존재인지를 깨닫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그 믿음이 우리의 모든 것들을 바꾼다. 나의 믿음을 점검해 본다. 나는 무엇을 믿고, 무엇을 따라가고 있는가? 가끔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행하셨다고,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 하면서도 나의 생각, 기질, 경험을 의지하거나 나 자신을 신뢰하고 믿을 때가 많다. 그래서는 안된다. 다시 복음 앞으로 돌아가자. 

9. 선교지에서 섬기고, 아이들을 양육하고 살아가는 모든 일상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가기 원한다. 나는 의롭지 않다. 나는 잘할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아니고서는 의를 얻을 수 없는 존재였음을 잊지 말고, 겸손하게, 인내하며, 그들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으로 (아니 이게 사실이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자.  주님 나를 도우소서.

10. 오늘도 샬롬 

* 오늘은 저희 목양팀의 에이버리 켈시 가정의 아들 갈렙의 수술이 있습니다. 엄마 젖을 잘 못 빨아서 혀 아래 부분을 레이져로 절제하는 수술이 있는데, 한국에서는 쉬운 수술임에도 불구하고 갈렙의 상황이 조금 있는 것 같고, 또 외국인이고 하다 보니 어제 치앙마이로 가서 오늘 수술을 합니다. 갈렙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728x90
반응형

롬 8:1-17 두려움이 아닌 사랑으로 

1. 우리의 인생을 드라이브 하는 많은 것들 중 가장 집요하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바로 ‘두려움'인 것 같다. 이 ‘두려움'은 어디에나 있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어두운 곳, 알 수 없는 미지에 대한 두려움부터 시작하지만 결국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귀결된다. 

2. 수 많은 종교들이 말하는 것도 동일하다.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들을 이길 수 있는 해답(?) 같은 것들을 주면서 그 두려움을 이용한 장사를 하게 된다. “이것 얻고 싶어? 그러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해!”, “가진 것 모두를 바쳐야만 이것을 얻을 수 있어”, “너의 시간을 바쳐야만 이것을 얻을 수 있어", 혹은 “고행을 하면, 율법을 지키면 천국 중에 더 좋은 곳으로 갈 수 있어" 등등이다. 

3. 두려움을 통해 사람들을 자신의 뜻대로 조정하려고 한다. 기독교가 타 종교와 다른 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기독교는 두려움을 통해 사람을 조정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물론 면죄부와 같은 흑역사가 있지만 그 흑역사는 종교개혁으로 이어지지 않았는가?

4. 오늘 본문이 이 두려움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4-15절).

5. 복음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며, 더 이상 두려움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우리가 받는다고 말한다. 그 아버지께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길을 열어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6.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하게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는 다른 종교와 같이 두려움 때문에 천국을 얻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받은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 때문에 우리는 감사함으로 이 땅에서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거룩의 동기와 이유가 다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이 두려움의 문제를 십자가에서 모두 해결하셨기 때문이다.

7. 여전히 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는 태국 사람들을 본다. 태국 차 중에 ‘이 차는 XX색입니다’ 라고 스티커가 붙은 차가 있다. 물론 실제로는 다른 색깔이다. 그 이유는 점쟁이가, 스님이 그 차 색깔이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아서 복을 못 받고 화를 얻을 수 있다고 하여 차를 갑자기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저런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것이다. 차의 색깔이 사람의 삶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이 과연 무엇일까? 결국 두려움을 이용하는 것이고, 여전히 태국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붙잡혀 살고 있다. 

8. 크리스챤이라고 다른가? 크리스챤 중에서도 하나님을 점쟁이 같이 사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일이 있을 때, 머리로 두 가지 선택을 정해놓고 심지어 마음에는 자신의 정해놓은 선택이 있음에도 기도(?)를 한다. 하나님께서 둘 중에 하나를 결정해주시길.. 그리고 가능하면 내가 마음에 선택해 놓은 선택을 지지해 주시길 기도한다. 지금 하고 있는 기도의 응답의 기한, 기도의 응답의 방법도 다 정해서 하나님께 알려 드린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인가? 모든 기도의 응답의 기한, 방법을 정해놓은 내가 하나님인가? 아님 나의 결정을 지지해 주는 그 분이 하나님인가? 이 또한 두려움에서 나온 기도의 방식이다. 

9. 내가 받은 하나님의 영, 하나님을 아빠라 부를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영을 기억하자.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이 나를 움직이는 힘이 되도록 복음을 더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을 더 힘써 알아가자. 요한1서 4:18-19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아멘

10. 오늘도 샬롬

*기도해주셔서 교회 리더들이 Silent Retreat 잘 다녀왔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쉼과 회복을 경험한 시간이어서 감사하고, 저희 부부는 아쉽게도 가지 못하고 남아서 성도들과 주일 예배를 섬겼습니다. 함께 하지 못함이 아쉬웠지만 또 남아 있는 성도들과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늘 기도해주심에 감사합니다.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3. 7. 25. 13:02
728x90
반응형

롬 4:1-12 하나님을 누구로 어떻게 믿고 있는가?

1.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브라함은 일반적인 그들의 선조 중의 하나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했고, 아브라함은 그들의 신앙에 있어서 매우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었다. 

2.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오늘 그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는 의가 어디서 난지를 설명하고 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2절)

3. 아브라함이 받았다고 여겨지는 의도 그의 행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어떻게 의롭다 여김을 받았는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3절) 아브라함이 특별할 것이 하나도 없다. 그 또한 하나님께서 믿음을 통해 의롭게 하신 사람일 뿐이다. 

4.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우리의 의로 여기신다. 믿음을 제외하고서는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는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가 없다. 다른 이들을 위해 베푸는 사랑과 자선의 행위도, 절대자를 찾기 위한 고행도,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조금도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없는 것들일 뿐이다. 

5. 따라서 믿음의 의가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 믿음이 없이는 우리에게 아무런 의도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내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더라도 믿음의 몇대손이라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자랑할 것이 없다. 

6. 그래서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를 어떻게 믿고 있는냐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있느냐? 잘못된 존재(false gods)를 하나님으로 믿는 것도 문제이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것도 문제이다. 하나님만을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 바로 그 분의 의로움이고, 우리는 이 의로움을 통해 온전한 의로움 되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7. 나는 오늘 무엇을 나의 의로 여기고 있는가? 혹시 나의 사역의 열매를 의로 여기고 있지 않은가? 내가 선교사임을 나의 의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그래도 하나님을 위해서 선교를 하고 있다는 그런 얄팍한 헌신을 나의 의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다. 내가 의로 여기고 있는 것들은 사실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이고,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지 않았다면 조금도 가능하지 않았을 일들일 뿐이다. 이런 것들을 나의 의로 여겨셔 되겠는가? 

8. 다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며, 나의 삶에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해야 한다. 하나님 외에는 다 썩어질 것들로 없어질 것들일 뿐이다. 하나님 외에는 나에게 소망이 없으며, 아무런 의도 없을 뿐이다. 오직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며, 그 영원하신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더 깊은 믿음을 가지기 원한다. 그게 내가 해야 할 단 한 가지 일이다. 

9.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3. 7. 24. 11:04
728x90
반응형

롬 3:21-31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방법을 따라 살아가기 

1. 모세 시대에는 율법이 ‘의’ 였다 (21절). 율법을 잘 지키면 복을 받고,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았다. 그리고 그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사람의 온갖 노력과 애씀이 필요했다. 

2. 그리고 이 ‘의로워지기 위한 애씀’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구약의 오랜 시간동안 검증이 되었다. 율법을 행위로 지키는 것은 그래도 가능하지만 (물론 그것도 무척이나 어렵지만…) 마음의 법을 지켜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3. 이러한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의를 주셨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1-22절)

4. 우리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3절).

5. 그 누구도, 어떤 사람도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우리는 그리스도가 필요하지 않다고도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의가 없이는 하나님과 조금도 함께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6. 이러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의 의’를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방법’으로 채우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선행을 통해 의를 쌓으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고난으로 자신을 정화하는 것을 통해 의를 쌓으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절대적인 의로움의 기준으로 믿으며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하며 신이 없다고 말하는 자신의 생각을 믿으며 살아간다. 즉, 모든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방법을 선택하여 그것을 자신의 신으로 믿고, 의를 세우는 방법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이것들을 우상이라 부른다. 

7. 그러나 어떤 누구도 자신의 의를 자신의 방법으로 쌓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옳다고 믿는 그 방법이 과연 옳은지 우리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우리가 옳다고 여기는 그 방법들은 모두 내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아담이 했던 시도를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나의 의로움을 죄인인 내가 좌지우지 하려는 것일 뿐이다. 

8. 우리의 의로움은 우리의 행위나 우리가 옳다고 여기는 방법에서 오지 않는다. 우리의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에서 올 뿐이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7절). 나의 의를 쌓으려는 모든 시도들, 내가 옳다고 여기는 모든 방법들을 내려 놓아야 한다. 나는 의롭지도 옳지도 않다. 나는 하나님도 아니다. 우리 피조물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방법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길임을 알아야만 한다. 

9. 내 삶에도 이러한 일들이 너무나도 많다. 내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시도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하나님 보다 더 높이 두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의 삶에 나타난 한 의,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며, 주님이 주신 방법대로 살아가기를 원한다. 의로운 삶에 대한 부분 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분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3. 7. 22. 12:05
728x90
반응형

롬 2:17-29 ‘복음의 통로’ 로서의 정체성

1. 로마서에서 먼저 유대인들의 위선과 죄를 지적한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졌다고 말하며 율법을 가진 자신들을 자랑하지만 그들은 그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다. 

2. 유대인들은 이러한 생각 속에서 자신들이 교사요 스승이라고 믿는다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0절)

3.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선택하신 것은 맞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이방의 빛’으로 부르셨지 교사요 선생으로 부르시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는 통로로 부름받은 자들이 자신의 통로됨을 잊어버리고 자고하며 자신을 교사로 선생으로 높이고 있었던 것이다.

4. 그리고 더 말이 안되는 것은 그들이 자신을 교사로 선생으로 자처하면서 그들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1-22절)

5. 이렇게 안타까운 유대인의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이 아닌가? 나에게서 보여지는 연약한 모습들이 아닌가? 선교사로 살아가기 때문에 나 스스로를 교사와 선생으로 생각하는 때가 꽤 있는 것 같다. 물론 역할적인 측면에서는 그런 부분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방의 빛'으로 부르셨지 자고하는 교사와 선생으로 부르지 않으신 것을 명심해야 한다.

6. 자고 하지 않고, 스스로를 오해하지 않으려면 내가 선교사 혹은 목사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부르심의 기능적인 면에 대한 집중이 아니라 부르심의 존재적인 면에 집중해야 한다. 

7. 하나님께서는 나를 복음을 전하기 위한 통로로 부르셨다. 통로에게 필요한 것은 흘려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통로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내가 그 복음을 흘려 보내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 복음이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 또한 복음이 필요한 그 한 사람일 뿐이라는 것이다. 

8. 육체의 할례(율법) 보다는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한다. 사람의 칭찬이 아니라 하나님의 칭찬을 받아야 한다 (29절). 그게 피조물이며 복음의 통로된 자가 가져야 할 자세이다. 내가 주인이 아니고, 내가 복음이 아니고, 나는 그저 전달자일 뿐이다. 오늘도 전달자로서의 나를 기억하며 주님 앞에만 진심으로 서고 주님께만 칭찬받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3. 7. 21. 12:23
728x90
반응형

롬 2:1-16 절망이 소망으로 

1. 로마서 전반부를 읽고 있으면 우리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런데 살다 보면 이 죄인들은 이 사실을 쉬이 잊어 버린다. 그래서 자신들이 죄인인지도, 얼마나 악질인지도 잘 모른다. 

2. 우리는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쌓아가는 자들일 뿐이다 (5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꽤 괜찮은 사람으로 착각하고, 이 정도면 괜찮은 신앙인, 이 정도면 괜찮은 지식인이라고 자부하게 된다. 그리고 죄를 지으면 회개하면 되지 라고 쉽게 생각한다. 

3.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한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4절 전반부). 회개도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의 결정이나 의지가 우리를 회개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도 아니다.

4.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회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이끌어 회개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다. 구원이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닌 것 처럼 우리의 회개도 우리로 부터 나는 것이 아니다. 

5. 인간은 구원에서도 회개에서도 무능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고서는 조금도 의로워질 수도 구원을 얻을 수도 또 회개할 수도 없는 존재들일 뿐이다. 우리는 구원자가 필요한 존재들일 뿐이다. 

6. 이러한 무능한 자들에게 율법을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율법을 행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13절). 그러나 우리가 과연 율법을 행하는 것이 가능한 자들인가? 

7. 율법을 생각할 때에 얼마나 답답한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 말씀 앞에 내가 얼마나 무력하고 절망적인가? 사랑이 조금도 내 안에 없음을 자녀를 키우면서, 또 매일의 일상의 삶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자주 느끼는가?

8.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시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너무나도 내 삶에 필요한 이유이다. 오늘도 나의 절망을 본다. 그리고 그 절망 속에서 소망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또한 본다. 내 능력으로, 내 힘으로 조금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삶을 그리스도께 또한 의탁한다. 사역도 주님께 의탁한다. 내가 무슨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겠는가? 성도들을 섬길 능력이 가르칠 능력이 내 안에 있겠는가? 그래서 오늘도 필요한 것은 ‘Not i but Christ’의 삶이다. 뭘 하려고 하지 말고, 변하려고 하지 말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자.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살 것이다. 

9.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3. 7. 19. 10:32
728x90
반응형

롬 1:1-17 복음에 빚진 자

1. 사도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택정함을 받은 사도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1절).  그리고 이 복음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부터 계속해서 선포된 것임을 말한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2절)

2. 하나님께서는 구약, 신약 전체를 통해서 계속 하나님의 복음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문제는 그것을 듣는 우리였다. 이스라엘은 복음의 절반만을 깨달았고, 그들은 자신들을 위한, 향한 복음만을 생각했었다. 

3. 그러나 바울이 보고 있는 복음은 이스라엘이 이해했던 복음에 비해 더 크고, 놀라우며, 유대인들만을 위한, 향한 복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이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자신의 생명을 걸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로마에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는 여러번 애를 썼다 (13절). 

4. 복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빚진 자라고 이야기 한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4절) 세상에서 가장 크고 놀라운 소식을 먼저 들은 자의 반응은 사실 이게 정상이다. 

5. 이 좋은 소식을 나만 알고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빚진 마음이 저절로 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좋은 소식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6절)

6. 나는 복음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나를 위한, 나를 향한 소식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복음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가 왜 복음을 우리의 삶에서 게속 전해야 하는가? 내가 복음을 먼저 들은 빚진 자이기 때문이다. 

7. 빚진 자의 의식 없이는 우리는 공로를 주장하게 된다. 내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애쓴 것이 생각난다. 하나님을 위해 드린 나의 물질, 시간이 생각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모든 죄와 악함을 탕감 받은 자들 아닌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모든 빚을 탕감받았는데, 우리가 조금 수고한다고 해서, 조금 애쓴다고 해서 무엇이 우리의 공로가 될 수 있을 것인가? 

8. 복음을 전하는 것은 수고와 애씀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정말 우리가 필요할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하나님께서 홀로 하시면, 혹은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와 하신다면 훨씬 더 효율적이고 잘 전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내가 사도 바울과 같이 잘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뛰어나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저 우리 자신을 오병이어와 같이 주님께 드린다면 놀랍고 아름답고 능력있으신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오천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다. 

9. 복음에 우리의 삶을 드리기 원한다. 모든 사람이 선교사가 되고,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빚진 자임을 잊지 말고, 나같이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을 통해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린다. 

10. 오늘도 샬롬

*신학교 수업을 하면서 너무 감사한 것은 수업 내용을 통해서 학생들의 마음과 생각이 변화되는 것을 직접 보게 되는 일이다. 1교시 마치고 쉬는 시간에 자신이 자세하게 필기한 내용을 보여주면서 하나님께서 이 수업을 통해서 자신에게 어떠한 말씀을 하셨고, 자신이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 나누는데 그 나눔이 너무 은혜가 되고 감사가 되었다. 

신학교 강의를 준비하고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시는 은혜가 더 크고, 미래의 목회자들을 세워간다는 생각에 계속 하고 있습니다. 힘을 내어 계속 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3. 7. 19. 10:30
728x90
반응형

잠 8:22-36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1. 잠언 8:22-31절에서 지혜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지혜는 우리가 생각하는 지혜와 달리 좀 독특하다. 22절에는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라고 설명하며 이 지혜가 이미 모든 것이 창조되기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2. 하나님께서 하늘을 지으실 때에도(27절), 바다의 한계를 정하고(28절),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도 (29절) 함께 있었다. 30절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3. 여기까지 묵상하니 한 말씀이 자동적으로 떠오른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1:1-3)

4. 이 지혜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성자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본문은 35-36절에 가서는 이 지혜를 반드시 얻어야만 함을 설명한다.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35-36절) 

5. 우리는 왜 이 지혜를 얻어야만 할까? 왜 이 지혜를 잃으면 우리의 영혼을 해하게 되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를 구원할 어떤 능력도 없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우리는 그 자리에 없었다. 우리는 내 몸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이 우주가 왜 이렇게 큰지 조금도 알지 못한다. 

6.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원할 능력도,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힘도, 우리가 왜 태어나고 왜 살아야 하는지, 또 왜 죽어야 하는지도 조금도 알지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안에 없는 지혜를 우리는 지혜 그 자체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얻어야만 하는 것이다. 

7. 그 지혜가 육신을 입고 이 땅으로 오셨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우리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그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자, 우리의 하나님으로 믿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을 때에 그 지혜가 내 안에서 살아서 역사한다. 이 세상의 창조 원리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내 머리가 아니라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지혜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8. 그래서 구원도 얻을 수 있고, 우리의 삶도 변화시킬 수 있으며, 우리의 삶의 의미와 이유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고, 그리스도 안에 능력이 있고,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혜의 부요함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계시해 놓은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묵상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35절). 

9. 어제 교회에서 주일 말씀을 전하면서 한 번 더 다짐을 하게 되었다. 더 부지런히 말씀을 읽고 연구해서 우리 태국의 영혼들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와 사랑을 전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뿌리고 심어야 한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자. 그 안에 생명이 있다. 

10.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