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1. 5.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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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66:1-20 내 삶이 노래가 되가 주님을 높이길

1. 모든 우주, 만물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이다. 그 어느 한 가지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지 않으신 것은 없다. 그렇기에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솜씨와 영광을 찬양해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의무도 아니고, 우리에게 주어진 무거운 짐도 아니다. 은혜이다. 끝도 없이 펼쳐진 우주의 그 수많은 별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빛을 내고 있다. 

2. 나는 과학 유튜브를 참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천문학에 관련된 컨텐츠들을 좋아하고 자주 본다. 보다 보면 자주 나오는 말 중에 하나는 “우주 공간이 비상식적으로 크고, 별들은 너무 많고 도대체 이렇게 너무나도 큰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한다. 우주의 크기를 상상하면 사실 그렇다. 

3. 그런데 그 우주의 광대한 크기가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나타낸다면… 우주의 수 많은 별들이 빛을 내는 이유가 그 수 많은 별들을 지으신 창조주를 찬양하기 위해 빛을 내는 것이라면… 그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어서 이 광대한 우주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우주가 이렇게 크다면.. 뭔가 말이 된다. 

4. 시편 저자는 1-2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할지어다" ‘온 땅이여’ 라는 표현은 단순히 지구의 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온 우주 만물을 지칭하는 말이다. 온 우주 만물이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그 하나님이 그보다 더 광대하시고, 영화로우시고, 높으시고, 위대하시기 때문이다.

5.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 우주 전체에서 먼지 만도 못한 지구에 사는 크지도 않은 한 민족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 그래서 그들을 찾아와 만나주시고, 그들의 신음을 들으셔서 애굽으로 부터 나가게 하신다 (6-7절). 이것이 복음이다. 도저히 그럴 이유가 없는데, 그런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이 복음이다. 

6. 이스라엘이 뭐길래? 나는 누구길래? 나는 무슨 자격이 있길래 하나님의 관심을 받고 사랑을 받는가? 생각해보면 없다. 그런데 그 분은 나를 찾아오시고, 나를 구원해주시고, 나를 하나님의 선교에 사용해주신다. 그러니 내가 해야 할 것은 찬양이다. 16절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

7. 그 분의 이름을 높이고,찬양하고, 영광을 돌리고, 그 분이 행하신 놀라운 일(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잠잠하지 말아야 한다. 누가복음 19:40절의 말씀이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8. 우리가 침묵하니 온 우주의 별들이 빛을 내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우리가 침묵하고 있으니 온 자연이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다. 내가 어찌 잠잠하리? 내 입을 열어 주를 찬양하고, 내 마음을 열어 주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것이 주일 하루가 아니라 내 삶 전체가 주님께 드리는 노래가 되어야 하고 찬양이 되어야 한다. 내 삶이 찬양이 되는 그 하루가 되기 원한다. 

9. 요 몇일 정신없는 시간들을 보냈다. 한번 흐트러지면 다시 마음을 잡는 것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다시금 마음을 잡고, 내 삶이 노래가 되어 주님의 영광이 되길 원한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 19:14)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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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1. 1.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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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62:1-12 요동치 않고 흔들리지 않으려면


1.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음이 요동치는 경험을 수없이 하게 된다. 왜냐하면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바라는대로, 내가 원하는대로 잘 되지 않는 걸음을 걸어가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어려움으로 인해, 때로는 내가 원치 않은 일로 인해 우리는 마음을 빼앗기고, 우리의 마음은 요동하게 된다.

2. 그러나 오늘 시편 기자는 담대하게 이야기 한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1-2절).

3. 이 시편의 저자는 다윗이다. 다윗의 인생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큰 공을 세워 왕이 되겠다고 결심한 적도 없었고, 왕족 출신도 아니었다. 왕이 될 것이라고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요셉처럼 꿈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들에 나가 양을 치는 목동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어느 날 사무엘 선지자가 갑자기 찾아와서 기름을 부었고, 그 때 부터 사울 왕에게 원수가 되어 쫓기고 광야로 내몰리고, 쫓기고, 아내가 납치 당하고, 자신은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는 그런 처지에 내몰렸다. 

4. 한 마디로 그의 인생은 마음이 요동치는 경험을 수도 없이 했을 것이다. 때로는 하나님 앞에 너무나도 항변하고 싶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다윗이라면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제가 언제 왕이 되고 싶다고 했나요? 하나님 저에게 도대체 왜 그러세요? 저 좀 내버려두세요. 저는 편하게 살고 싶어요!!”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라고 말한다. 

5. 그러나 오늘 시편을 보고 있으면 처음과 나중의 고백이 조금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된다. 2절에서는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라고 고백한다. 그도 흔들리긴 한 모양이다. 그도 마음이 요동치긴 한 모양이다. 흔들리긴 했지만 크게 흔들리거나 낙심하거나 넘어지지는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후반부에 6절에 가면 조금 다르게 고백한다.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6.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삶이 이러할 것이다. 처음에는 흔들릴수도 있고, 요동칠 수도 있고, 넘어질 수 도 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영원히 온전하시고, 영원히 그 자리에 계신 분을 묵상하고 의지하고 따라가다보면 우리도 그 분의 성품을 조금 맛보게 되고, 그 분 처럼 요동치 않게 되는 것이다. 다윗도 처음에는 마음이 요동쳤고, 흔들렸다는 사실에 위로를 얻는다. 

7. 내 삶의 소망을 어디에 두는지, 나의 삶의 안정감과 방향을 누구에게 두는지가 우리의 삶을 결정하게 된다. 그 소망을 안정감을 나에게 두면 나의 삶은 원망과 두려움이 가득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의 나의 미래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염려와 두려움이 나를 이끌어가기 때문에 흔들리고 넘어질 수 밖에 없다. 내 삶의 주인이 나 자신인데, 내 삶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늘 불안하고 조금만 내가 원하는대로 되지 않아도 요동칠 수 밖에 없다. 

8. 그러나 나의 내일을 아시고, 나의 처음과 마지막을 아시는 그 분께 소망을 두고, 그 분이 내 삶을 인도해가시도록 내 삶의 주인의 자리를 내어드린다면 그제서야 우리는 쉼을 누리고, 평안을 얻을 수 있다. 요동치 않으려면 내 삶의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내 삶에 어려움과 고난이 있더라도 그 끝에 우리 하나님이 계신 것을 신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가장 아름답게 이끌어가고 계심을 신뢰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9. 오늘 나의 삶을 점검한다. 무엇을, 누구를 의지하고 있는지… There is no one, but You, God.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자가 되어 흔들리지 않는 삶을 걸어갈 수 있길 소망한다. 8절 말씀처럼 시시로 그를 의지하는 자가 되길!! Trust in Hium at all times!!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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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0. 29.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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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5:13-26 사랑으로의 초대

1. 우리를 부르신 것은 자유를 위함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13절 상반부) 이 본문이 말하고 있는 자유는 무엇일까? 이 자유는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살아가는 방종을 의미하는 단어는 분명히 아닐 것이다. 문맥을 살펴보았을 때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아마도 더이상 율법의 종 노릇 하지 않을 자유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율법에 순종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와 불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안에 있을 때에 자유를 얻게 된다. 마치 물고기가 물 속에서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과 같이 이 자유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만 우리에게 허락되는 자유이다. 이 자유를 어떻게 누려야 하는가?

3. 사도 바울은 13절 하반부에서 분명히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서로 사랑함으로 누릴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율법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4. 그래서 성령의 열매를 이야기 할 때에도 첫 번째 열매는 사랑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선과 온유와 절제니…” (22, 23절 초반부) 사랑의 열매가 없다면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전혀 맺지 못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희락도 화평도 뒤따라 올 수 없게 된다. 

5.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참된 자유는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사랑하고, 또한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자유이다. 그렇다면 사랑이 왜 성령의 첫 번째 열매인가? 육체를 따라 살아가게 되면 우리는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고 죄악된 나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나를 먼저 생각하는 상태에서는 결코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지도, 사랑하지도 못하게 된다. 

6. 결국 타인에게 무관심함, 즉 사랑없음에 도달하게 된다. 나의 욕심과 탐심과 이기심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겨낼 때 우리는 비로소 다른 이를 바라보고, 관심을 가지게 되며 사랑할 수 있게 된다.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결국 성령의 열매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7.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우리를 사랑으로 부르셨다. 이 사랑은 우리를 사랑 받는 자의 자리로, 사랑 하는 자의 자리로 부르셨다. 우리는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의 자리로 초대 받은 동시에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완전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자의 자리로 초대 받았다. 

8.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이 없다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고 내게 아무런 유익도 없다. 우리는 언제나 유의미한 존재가 되고 싶어하지 않는가? 인생에서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가 아닌가? 그렇다면 사랑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으로 부터) 사랑 받아야 하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들을) 사랑해야 한다. 

9.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기 위해 먼저 사랑받는 자로 서기 원한다. 내 안에 사랑 없음을 먼저 직시하고, 사랑 그 자체이신 분 안에 거해야 한다. 그래야 사랑하게 되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오늘 가장 먼저 내 아내, 내 아이들을 뜨겁게 사랑하기 원한다. 이들도 하나님으로부터 또 나로부터 사랑 받음을 통해 사랑하는 자로 세워지도록 기도해야겠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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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0. 24.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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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3:19-29 복음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1.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의 범법 때문이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19절 상반부).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죄인이 아니었다면 우리에게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 율법이었다. 율법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2. 그러나 율법은 믿음이 오기 전까지만 한시적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왜냐하면 율법은 우리를 능히 살게 할 수도 없고, 의가 오게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1절)

3. 우리는 삶에서 자주 좋은 것을 갈망한다. 때로는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을 때도 있지만, 보통은 더 좋은 것이 오면, 덜 좋은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된다. 믿음과 율법의 관계가 그렇다. 율법도 좋은 것이다. 율법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이 죄인지 무엇이 의인지를 깨닫게 된다. 또한 우리가 얼마나 의에서 먼 존재인지를 보게 된다. 그러나 율법은 거기까지이다.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만들지 못한다.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4. 그러나 그 모든 죄에서 자유로우신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을 완성하셨기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의를 얻게 된다. 내가 율법을 지켜서도 아니고, 내가 뭔가를 잘해서도 아니다. 그저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의의 우산이 되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구원을 얻게 된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복음이다. 

5. 26절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율법을 지킬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려고 애쓴다고 해도 우리가 얼마나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가? 잠시 잠깐은 율법을 지킬 수 있을지 모르나 우리의 성정은, 우리의 악한 본성은 율법을 범하고, 내 마음대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우리의 인생의 경험을 통해서 너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6. 하나님은 이런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오셨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먼 우리는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그러나 우리는 이 놀라운 은혜를 너무나도 자주 밀어낸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7. 사랑 받으려면 사랑 받을 만한 뭔가를 해야 한다. 용서 받으려면 용서 받을 짓을 해야 한다. 대가 없는 사랑과 선행이 어디에 있으며, 아무런 희생 없는 용서가 어디에 있는가? 이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치뤄야 할 대가와 희생을 예수께서 담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런 값을 치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미 지불되었다. 이미 치루어졌다.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으면 우리는 사랑받고, 용서 받고, 용납 받는 것이다. 

8. 율법은 대가를 치룬 사람이, 희생을 한 사람이 복을 받는 시스템이다. 복음은 대가를 치루지도, 희생을 하지도 않은 사람이 복을 받은 시스템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대가와 희생을 한 분이 모두 받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받는 은혜에는 어마어마한 대가가 치뤄졌다. 그럴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는 하나님 자신이 죽으신 것이다. 우리를 자녀 삼으시기 위해,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제 그 분과 한 몸을 이루어 살아가야 한다. 주님은 내 안에, 나는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과 피를 아낌없이 흘려주신 이유는 우리를 그 사랑의 관계 안으로 초청하시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를 그 관계로 나를 통해 초청하시기 위해서이다.

9.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그 분의 삶과 말씀을 기억하고 제대로 알 때에 우리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이제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분과 연합하고, 그 분과 사랑하기 위해 사랑의 법을 지키려고 하게 된다. 그렇기에 복음은 우리의 모든 존재와 생각과 삶을 바꾸게 된다.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가? 예수를 깊이 생각하자.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3:1)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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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0. 18.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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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1:1-10 바른 복음을 힘써 알자

1.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위해서 쓴 편지이다. 이 편지의 특징은 매우 급하다는 것이다. 1-5절의 짧은 인사를 한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그것도 책망의 내용으로 바로 들어간다. 왜냐하면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모든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2. 바울이 급하고 매섭게 책망한 내용은 바로 ‘다른 복음’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6절). 자신의 전부이며 모든 것 위에 모든 것 되신 그리스도를 떠나 다른 복음으로 가고 있는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해서 바울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3. 여기서 ‘다른 복음'이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건이 불충분하기 때문에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건 +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반쪽짜리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이 ‘다른 복음'이었다. 그러니 바울의 매우 급한 책망과 이를 이상히 여기는 마음이 충분이 이해가 된다. 

4. 바울은 분명히 선포하고 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 그리스도의 복음은 완전하고 충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다른 율법의 조문은 조금도 필요하지 않다. 율법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끄는 몽학선생일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인해 복음과 율법은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5. 즉, 이전에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율법이 더 이상 우리의 구원에 어떠한 힘도 행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율법을 폐하지 않으시고 완전하게 하셨다. 우리에게 ‘사랑의 법’ 만을 주셨다. 우리는 여전히 사랑의 법을 지켜야만 한다. 그러나 구원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6. 착하게 살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의 증거로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의 리더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축소하고 율법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하였기에 바울은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잘못된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들고, 우리의 구원을 불안하게 만들며, 그리스도의 놀라운 대속을 반쪽 짜리롤 만들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복음을 잘 알아야 한다. 바로 알아야 한다. 

7. 지금 우리 주변에도 얼마나 많은 이단들이 있는가? 왜 이단들에 속아 넘어가는가? 바로 복음을 정확하게 알지 못해서이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읽고 묵상하며 연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 자체는 분명히 쉽다. 그러나 그 복음으로 어떻게 성경을 읽고 적용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공부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성경이 쓰여진 시기와 문화, 컨텍스트가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8. 복음의 순수성과 정확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미움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할 수도 있다. 바울은 10절에서 말한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복음을 위해서 미움받을 각오를 하자. 아닌 것은 아닌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좋은 말을 하기 보다는 복음을 위해 옳은 말을 하자. 복음을 위해서 부지런히 연구하고, 공부하자. 그래야 내 안에서 바른 복음이 나온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자. 선교사는 죽을 때 까지 공부하고 노력해야 하는 사람이다. 오늘도 더 많이 읽고 묵상하고 배우자. 바른 복음이 없어서 바른 복음을 오해해서 교회를 떠나려고 하는 청년들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자.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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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0. 17.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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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14:1-9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우상숭배를 멈추게 한다

1. 호세아의 마지막 장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올 것을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오라…" (1절 상반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이스라엘이 어떠하였든지 간에 여전히 사랑하시고, 여전히 인내하시고, 여전히 기다리신다. 이스라엘만 인내하고 사랑하신게 아니라 오늘 나에게도, 하나님을 거역하고 다른 길로 가고 있는 모든 영혼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2. 어떤 사람들은 왜 예수님께서 빨리 재림하시지 않느냐고 묻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이 더딘 이유는 한 영혼이라도 더 주님께 돌아오길 애타게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여전히 기다리시는 아버지 하나님으로 인해 예수님의 재림이 더디게 느껴지는 것이다. 주님께 돌아가서 우리가 할 일은 단 한 가지이다. 

3.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과 같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이라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출 20:3-5상반부)

4.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내 삶의 어떠한 우상들도 내 삶에서 이전과 같은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 우상이 나의 삶을 파괴하도록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삶의 주인의 자리에 오직 하나님만이 좌정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태도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 

5. 우상의 문제는 결국 삶의 주인의 문제이다. 내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그 존재가 누구냐는 것이다. 입으로만 부르는 주님이 아니라 내 삶으로, 내 태도로, 내 생각으로 진정으로 믿고 따라가는 존재가 누구냐는 것이다. 하나님인가? 아님 세상에 있는 우리에게 뭔가 그럴듯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존재인가? 때로는 그게 내 생각, 내 자아, 내 마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은 결정해야 한다. 그 한 분이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다른 것으로 대체할 것인가?

6. 하나님께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나의 삶의 주인이 되실 수 있을까? ‘습관이 영성이다'라는 책에서 저자 제임스 헌터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 내가 지금 사랑하고 예배하고 있는 존재가 바로 나를 규정하고 결정한다. 우상으로부터 돌아서고 싶다면 우상을 떨쳐내려고 애쓰고, 돌아서려고 단호하게 결정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 한 분만을 더 깊이 예배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즉, 하나님께 더 집중하고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7. 사랑하지 않는다고 결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결정만으로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러나 더 사랑하는 존재가 있을 때에는 이전의 것이 그다지 내 삶에 중요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아마 8절의 표현일 것이다.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이제 우상에 대해서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 뿐 아니라 관심도 없고 나와 상관도 없다. 왜냐하면 진정한 남편, 진정한 아버지, 진정한 친구이신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8. 오늘 나의 삶에서는 누구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죄의 달콤한 유혹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이시라고 고백하지만 여전히 내 삶의 주인의 자리에 내가 앉아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아이들의 진정한 아버지라고 고백하면서도 자녀들의 삶에 내가 개입하여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요소들을 즉시 바꾸려고 하고 있진 않은가? 입만 살아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지 말자. 사람들도 이렇게 입으로만 사랑하는 사람을 싫어하는데, 마음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더 싫으실까? 입술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기 원한다. 

9. 하나님을 진심으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로 오늘 하루를 살아가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수쿰빛언약교회의 여름 수련회를 잘 마쳤습니다. 이번 수련회에서 특별히 왓수형제와 똠 자매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수쿰빛언약교회를 통해 복음을 듣고 양육 받은 후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라 더 감사한 마음이 많습니다. 저희 가정이 안식년으로 자리를 비웠지만 교회에 감사한 소식들이 들려서 참으로 행복합니다. 왓수 형제마 똠 자매의 신앙이 견고하여 그리스도를 더욱 더 사랑하는 신자들일 되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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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0. 16.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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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13:1-16 헛된 시도는 피곤하게 만들 뿐이다

1. 이스라엘의 범죄는 계속 된다. 아니 이스라엘을 비롯한 인간의 역사 자체가 범죄의 역사이다. 하나님을 버리고 내가 하나님 처럼 되려고 하는 그 욕구로 말미암아 우리는 계속 죄악 가운데 거한다. 1절에서 에브라임의 죄도 동일하다 “…그가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를 높이더니…” 

2.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는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낫다 혹은 다르다' 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들은 죄인일지라도 나는 아니며, 그들은 악할지라도 나는 아니며, 그들은 어리석을 지라도 나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신의 생각이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도 (신들도) 자신을 지지해주어야 한다. 즉 내가 믿는 신은 내가 죄인임이 드러나지 않도록 거룩하셔도 안되고, 내가 지혜로와야 하기 때문에 모든 것 위에 뛰어나서도 안된다. 

3. 살아 있을 필요도 없고, 신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지만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할 필요도 없다. 그저 나의 욕망을 채워주기만 하면 되고, 그저 내가 높아질 수 있도록 나를 서포트 하는 존재이면 된다. 그것이 바로 우상이다. 이스라엘은 그렇기에 우상을 만들어낸다. 참으로 거룩하시고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유는 결국 내가 높아지기 위해서이다. 2절 상반부는 이러한 이스라엘을 설명한다. “이제도 그들은 더욱 범죄하여 그 은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되 자기의 정교함을 따라 우상을 만들었으며…”

4.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도, 이러한 나도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4절). 우리는 높아지길 원해서 바벨탑을 세운다. 그 바벨탑이 무너지면 또 다른 것들을 동원하여 또 다른 무엇인가를 세우고, 또 계속해서 높아지려는 시도들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가 넘어져 있는 그 시간에, 즉 애굽에 있을 때에도 늘 우리와 함께 하신다. 

5. 우리가 높아지려는 시도를 멈추고, 내 자신을 정확하게 본다면, 내가 얼마나 죄인이고, 얼마나 무가치하며,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지를 보게 된다면, 우리는 “나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일 뿐이다. 내가 나를 정확하게 보지 못하고,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라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우리에게 결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은 필요없는 것들일 뿐이다. 

6. 높아지기 원하는 자들에게는 ‘무너짐’외에는 답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자들에게도 ‘넘어짐’ 외에는 답이 없다. 우리는 결코 높아질 수도 하나님 처럼 될 수 있는 자들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존재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그제서야 하나님이 보이고 은혜가 임한다. 

7. 나는 오늘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가? 혹시 높아지려고 하고 있진 않은가? 나는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오늘도 수고하고 있진 않은가? 그 수고는 헛될 뿐이라 우리를 피곤하게 만들며, 닿을 수 없는 기준이라 우리를 절망케 만들 뿐이다. 우리는 나의 절망을 깨달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만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모든 것을 가진 자들이다. 무명하나 유명한자들이다. 

8. 고후 6장에서 바울이 말한 구절이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2:6후반부-8) 높아지려는 시도를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려고 할 때, 하나님 처럼 되려고 하는 시도를 버리고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이러한 말도 안되는 것 같은 역설을 삶에서 경험하게 된다. 그리스도로 인한 이 역설은 우리를 살게 한다. 우리를 회복시킨다. 우리를 자유케 한다. 어떻게 살아갈지를 내가 선택할 수 있다. 높아지려고 할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하려고 할 것인가? 

9.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한 주가 되길 원한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1분 1초가 되기 원한다. 그리하여 높아지려는 피곤하며 불가능한 시도를 참된 안식이 있기 원한다. 참된 안식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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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0. 10.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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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8:1-14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 모든 악의 뿌리는 아담이 저지른 죄의 모양과 같다. 즉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선과 악을 결정하시는 절대적인 분으로 보지 않는 것, 우리의 삶의 주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내가 삶의 주인이 되려고 하는 그 시도들에서 악은 시작되고, 우상들이 생겨나고, 우리의 삶은 망가져간다. 

2. 1절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심판에 대해 경고하신다. 왜? “그들이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1절 후반부) 언약을 어기고 율법을 범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이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율법과 언약보다 내가 더 옳다는 것이다. 내가 더 옳고, 내가 더 지혜롭고, 내가 주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대로가 아니라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언약과 율법을 버리고 이제는 내가 정해놓은 규칙, 내가 원하고 바라는대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도 면피하기 위해 이들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들이 장차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하리라"(2절) 이 말씀은 그들이 정말 주를 아는 것이  라기 보다는 주를 안다고 말하며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셀프사면권을 베푸는 것이다. 

4. 왜냐하면 진정으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안다면 내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헛된 시도는 계속해서 나온다. “선을 버렸으니" (3절), 왕들과 지도자들을 세웠으나 (4절),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4절). 심지어 그들은 셀프용서를 위해 제단도 많이 만든다. “에브라임은 죄를 위하여 제단을 많이 만들더니 그 제단이 그에게 범죄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절). 

5.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하는 모든 종교적 행위는 결국 우리의 죄를 쌓아가는 우상숭배적 행위이고, 복음에 적대적인 행위이다. 왜 셀프 용서 (가짜 회개)가 일어나는가? 하나님이 우리가 속이는 것에 속는 분이란 착각을 하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이렇게 하면 나의 죄가 용서 받을 수 있다는 거짓에 속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작게 보고, 나를 크게 보기에 생기는 일이다. 

6.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의 역사는 항상 그랬다. 하나님을 작게 보는 대신에 자신들을 크게 보고, 지혜롭게 여기고, 생명도 없는 우상을 하나님과 상대 할 수 있는 그 어떤 신 인양 크게 보기 때문에 죄악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질문하셨던 것 같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5 전반부

7.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는 동일하게 물으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나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여기고 있는가? 나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예수님을 작게 보고, 깔보고, 나를 크게 보고, 나를 지혜롭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진 않은가? 내 힘으로는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내딛지 못하면서도 나를 크게 여기고 있진 않은가? 

8. 내 안에도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었던 죄악의 뿌리가 견고한 것을 본다. 내가 결정하고, 내가 판단하고, 나 스스로를 옳다고 여긴다. 나는 모른다. 나는 옳지 않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단체의 이름이 그저 구호가 아니라 내 삶에 반드시 새겨야 하는 진리이다. Not I, but Christ.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끝나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 분이어야 한다. 그 분이 전부여야 한다. 그 분으로 인해서 변화되어야 한다. 

9. 매일의 삶 속에서 나를 부인해야 한다. 아니 순간 순간 나를 부인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분이 내 안에서 사시게 된다. 오늘 나는 나를 부인하고 있는가? 나를 낮게 여기고, 나를 틀렸다 하는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에 내 삶으로 대답하는 자가 되길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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